149화 전쟁의 서막
(149/203)
149화 전쟁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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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전쟁의 서막
2022.02.27.
“……세상에.”
그것이 막 눈을 뜬 스테치가 처음으로 입 밖에 꺼낸 한마디였다.
아치발의 신자들이 오래전부터 활동해 왔다는 이야기는 시무스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신들이 이 땅을 거닐던 시절 때부터 존재해 왔을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덥지?’
시선을 아래로 내린 스테치는 자신의 몸 위에 모포가 덮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을 뒤척였다. 그러나 고개를 살짝 돌린 스테치는, 엘레나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치고선 그대로 얼어 버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옆에 바짝 붙어 누워 잠에 빠진 엘레나. 규칙적인 내뱉는 숨결이 코끝을 간질이자, 스테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잠들어 있을 때 봐 주고 있었던 건가?
“…….”
혹시라도 깰세라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스테치는, 때마침 시설 바깥에서 들어오던 마르크와 타이밍 좋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꽤 빨리 일어났군.”
“쉿!”
스테치는 자고 있는 엘레나를 가리킨 뒤, 마르크가 들어온 입구 쪽을 향해 턱짓했다. 어두컴컴한 통로를 지나 붉은 산 바깥으로 빠져나오자, 가장 먼저 맑게 갠 하늘이 보였다.
“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광경이었다. 카델트 대사막에 들어온 이후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몰아치는 모래바람 때문에 푸른 하늘을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간만에 맑은 공기를 잔뜩 들이마시며 경치 구경에 취한 스테치의 옆에, 반지에서 튀어나온 프레야가 부드럽게 착지했다.
“마력의 흐름이 안정적이군. 내 말이 맞았지?”
“그럼 정말…… 카델트 대사막이 사실상 소멸한 건가?”
스테치의 질문에 프레야는 주변에 널린 모래밭을 스윽 훑으며 말했다.
“불과 며칠, 몇 주 만에 사막화된 땅이 원래대로 되돌아오진 않겠지. 하지만 이곳의 대기는 식물의 생장을 도울 수 있는 마력이 충만해 있어.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곳은 대륙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비옥한 대지가 될 거야.”
그녀가 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주워 저 멀리 던져 버리는 걸 지켜보던 마르크가 입을 열었다.
“……이건 큰 기회가 되겠군.”
“무슨 말이야?”
“카델트 대사막으로의 진입을 막는 유일한 장벽이 사라졌잖은가. 이제 남부든 북부든, 누구라도 원한다면 이 땅에 발을 디딜 수 있단 뜻이지.”
“그렇겠지.”
카델트 대사막은 대륙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던 절대 불침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수백 년이 넘도록 유지되어 온 장벽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프레야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장소가 머지않아 대륙의 노른자위 땅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때 북부와 남부의 국가들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세계수의 축복으로 처음부터 풍요로웠던 케일럼과 달리, 크로마토스 제국이나 사일라스 왕국은 사정이 다르다. 카델트 대사막을 선점하게 되면 케일럼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면서 식량 문제와 토지 확보를 동시에 이룰 수 있지.”
마르크가 말했다.
“베네지아는 카델트 대사막의 몬스터들을 명분으로 내세워 남부 국가들을 한곳에 엮어 두고 있었지. 하지만 그 명분이 사라졌으므로,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적을 찾아내려 할 거다.”
“그럼…….”
“어느 쪽이건 간에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주인 없는 땅이란 누구에게라도 매력적인 먹잇감이니까. 최악의 경우엔 전쟁이다.”
마르크의 말을 듣고 있던 스테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은 기회인데?”
“그렇지.”
동방장군인 마르크가 빠지고, 북방장군인 제라드가 리타이어 한 데다 첫째 왕자인 랍토레스는 사망. 베네지아의 입장에서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다. 이는 스테치가 공격을 가하기에 최적의 조건인 셈이다.
“하지만 그건 결국 나중에 벌어질 일이지, 지금은 아니야.”
스테치가 말했다. 마르크가 했던 이야기는 가능성이 크지만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런 일은 단기간에 걸쳐 일어나지 않는다. 적시가 올 때까지는 숨죽이고 끈질기게 기다리는 수밖에.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지?”
“길이 열렸으니까, 일단 남부로 되돌아간다. 지난 몇 개월간 남쪽 상황이 어떤지도 좀 파악해 보고 싶으니까.”
감비니 요새에서의 전투를 겪으면서, 스테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개인의 무력이 아무리 강해도, 군대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는 똑같은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 스테치의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선, 최소한 이전에 동원했던 스카이와 그의 동료들 정도의 전력이 필요했다.
‘스카이에게 두 번씩이나 도움을 바랄 수는 없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어쩌면 가렛?’
그때, 고민하는 스테치의 뒤에서 엘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얼마 안 됐어.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엔 내가 며칠 만에 일어난 거야?”
“이틀이요. 확실히 몸이 익숙해지고 있나 봐요.”
처음 검은 아티팩트를 흡수한 이후 다시 깨어나기까지 2주일 정도가 걸렸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틀은 엄청나게 짧아진 거라 볼 수 있겠다.
스테치는 잠시 엘레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엘레나.”
“네?”
왜 저러지? 엘레나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자, 스테치가 물었다.
“숲에 한번 돌아가 볼까?”
* * *
베네지아의 왕성, 캐슬 브랜든의 연병장.
콰광!
“으헉!”
거구의 병사들이 공중으로 붕 날아오르더니 땅으로 뚝 떨어졌다. 두꺼운 갑옷은 강력한 충격을 받아 안쪽으로 푹 찌그러져 들어간 상태였다.
“굉장하군요, 왕자님!”
감탄해 마지않는 발스톡의 시선 끝에는 새로운 팔을 단 제라드가 있었다. 금속성으로 이루어진, 뱀 뼈를 연상케 하는 형태의 팔. 제라드가 팔을 스트레칭하듯 쭉 펴자, 팔의 관절부 여기저기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움직이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어 보이십니다.”
“팔을 조율하는 데에만 거의 1개월이 넘게 걸렸으니까, 이 정도 결과조차 나와 주지 않으면 곤란해.”
제라드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아티팩트 ‘타이런트(Tyrant)’. 베네지아 왕가의 지하 보물고에 잠들어 있던 그것은, 본래 등짝에 박아 제3의 팔로써 운용하는 아티팩트였다. 마침 팔을 잃은 제라드의 입장에서는 안성맞춤인 물건이라 볼 수 있었다.
“추…… 축하드립니다, 왕자님.”
쓰러져 있던 병사들이 복부를 움켜쥔 채 일어나면서 힙겹게 말했다. 그저 한 번 가볍게 휘둘렀을 뿐인데, 갑옷이 완전히 우그러져 버렸다. 맨몸으로 맞았다면 일격으로 골통이 박살 나 사망했을 위력이었다.
“…….”
제라드는 말없이 연병장 한구석에 놓아둔 상의를 다시 걸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병사들 입장에서야 이 정도도 굉장해 보이겠지만,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당사자인 제라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타이런트는 단순한 팔 이상의 힘과 능력을 품고 있었지만,
병사들을 상대로 시험해 보기엔 너무나도 파괴적이었다. 만약 그걸 쓸 날이 온다면 그때는 아마도…….
콰직!
훈련 상대가 되어 준 병사들을 다독이던 발스톡은 난데없이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연병장을 둘러싼 벽에 커다란 구멍을 내 버린 제라드는, 잔뜩 흥분해서 헐떡이고 있었다.
“헉…… 헉…….”
스테치 아텔리어. 그의 팔과 목표를 앗아 간 자. 제라드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만약 그가 전력을 쏟아부을 만한 상대가 있다면 그건 오로지 스테치뿐이리라.
“괜찮으십니까?”
등 뒤에서 말을 걸어오는 발스톡. 제라드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킨 뒤, 발스톡이 건네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음, 문제없다.”
하반신의 갑옷을 벗고, 위아래로 막 예복을 갖춰입은 제라드. 그런 그의 옆으로 이번엔 또다른 이가 다가왔다.
“새 팔은 좀 쓸 만하냐?”
“형님.”
그에게 말을 건 이는 다름 아닌 둘째 알프레드. 제라드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쓸 만한 정도가 아닙니다. 이 팔은…… 예전에 사용하던 골드메라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새 팔을 온전히 그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타이런트의 신경침을 신체에 박아 넣는 순간, 신체는 새로운 신체 부위를 받아들이기 위한 변이를 시작하게 된다. 신경과 신경이 다시 연결되고,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뼈와 혈관이 재생성된다.
하루에도 최소 30번 이상,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격통이 낮밤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처음 아티팩트를 이식한 날, 제라드는 타이런트처럼 강력하면서도 유용한 아티팩트가 왜 먼지만 뒤집어쓰고 보물고에 봉인되어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약의 도움을 받아도 버티기 힘든 수준의 고통을 24시간 내내 감수하라니, 어지간한 절박함과 인내심이 없다면 사용할 엄두조차 못 낼 물건이었다.
“고맙습니다.”
제라드의 진심 어린 감사에, 뒤에서 보고 있던 발스톡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왕위를 두고 경쟁하는 관계에 있는 둘째 왕자에게 감사라니. 발스톡의 입장에서는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알프레드도 이런 제라드의 반응을 기대하진 않았는지,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흠흠. 나에게 말할 필요 없다. 그 아티팩트를 네게 넘겨주기로 결정한 것은 내가 아닌 아버지시니까.”
“……그렇죠.”
제라드는 오른팔을 위해 새롭게 디자인된 상의의 단추를 채우며 대꾸했고, 알프레드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 끝났으면 날 따라와라. 폐하께서 결과를 듣고 싶어 하신다.”
알프레드, 그리고 발스톡과 함께 왕의 알현실로 향하는 제라드. 그러고 보니 새 팔을 얻고 싶냐는 왕의 물음에 대답한 뒤로 꽤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다.
출입이 허가되지 않은 발스톡은 알현실 입구에서 한 발짝 물러섰고, 제라드는 알프레드와 함께 살짝 긴장된 얼굴로 왕이 있는 알현실에 들어섰다.
“폐하, 제2 왕자 알프레드 님과 제3 왕자 제라드 님이 왔습니다.”
알프레드는 왕의 옆으로 가서는 가볍게 묵례를 했고, 제라드는 왕이 보는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체루스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새 팔은 마음에 드느냐?”
“예. 아주.”
“좋다.”
제라드의 반응에 신체루스는 무미건조한 투로 말했다.
“현 시각 이후로 제라드 메서를 북방장군의 직위로 복귀시키겠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기에,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놀라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동방장군은 물론 첫째 왕자도 자리를 비운 현 상황에서, 북방을 책임질 적임자는 셋째인 제라드밖에 없었을 테니까.
“폐하!”
갑자기, 바깥에서 뛰쳐 들어온 누군가가 신체루스를 불러 댔다. 알현실 바깥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그를 막아섰지만, 상대는 마구 몸부림치면서 신체루스에게 외쳤다.
“큰일 났습니다! 카델트 대사막…… 대사막의 마력 폭풍이 완전히 소멸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뭐?”
알프레드는 물론이고, 제라드를 포함한 다른 신하들 모두가 이 생각치도 못한 해프닝에 당황했다. 그러나 소식을 전해 온 이를 응시하는 신체루스의 얼굴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마치 이런 일이 오리라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드디어 오는가, 녀석이.’
신체루스는 남몰래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