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장인어른 (151/203)


151화 장인어른
2022.03.01.


“…….”

스테치는 살짝 연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가 문 앞에 서 있던 케인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물어보고 싶었지만, 일체의 질문을 불허하는 듯한 심상찮은 분위기에 밀려 얌전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찌르르-.

이름도 모를 벌레 우는 소리가 숲 여기저기에서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에 걸려 있는 유령불의 랜턴 이외에도, 반딧불이가 여기저기 날아다니면서 어두운 숲을 밝히고 있었다.

혹시라도 옆방의 엘레나가 깰세라 최대한 발소리에 주의하면서, 두 사람은 최대한 조용한 장소로 이동했다. 심야임에도 불구하고 길 곳곳에는 경비를 서고 있는 엘프들이 몇 명인가 보였다.

“무슨 일이시죠?”

어둠의 숲의 거대한 나무들 사이를 잇는 징검다리 위. 케인이 한참 동안 말없이 난간에 상반신을 얹어 놓은 채 아래만 내려다보자, 참다못한 스테치가 먼저 질문했다. 그러자 케인은 시선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 생각인가?”

“네?”

“숲으로 돌아온 김에 식은 여기서 올리는 게 좋지 않겠나? 본래대로라면 양가 부모가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하는 게 좋겠지만, 난 사정상 바깥으로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처지라서…….”

“???”

스테치는 그야말로 얼굴에 커다란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소리지? 한참을 떠들어 대던 케인은, 어쩐지 생각했던 반응이 나오질 않자 의아하다는 말투로 물었다.

“혹시 자네랑 싸웠나? 그래서 그렇게 계속 분위기가 어색했던 건가?”

“……누구랑 싸워요?”

“내 딸!”

갑자기 케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스테치는 온몸의 체모가 한꺼번에 일어서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럼, 설마 1년 가까이 함께했는데 아직도 둘 사이에 아무런 진전이 없다는 소리인가? 예쁜 내 딸을 옆에 두고도?”

근엄하고 인자하던 케인은 온데간데없고, 웬 팔불출 아저씨만 남아 있었다. 스테치가 크게 당황하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 경비를 서고 있던 엘프들이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군. 자네 설마 불능이나 게이는 아니겠지?”

“선 넘으시네요. 그 이야기 하시려고 절 여기까지 불러내신 건가요?”

“그럼 달리 또 뭐가 있다고?”

그의 대답에 스테치는 살짝 안도했다. 스테치가 굳이 인간들의 도시나 마을이 아닌 어둠의 숲에서 머문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케인이 뭔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단순한 기우였나 보다.

“거두절미하고 묻겠네만.”

케인이 한숨을 푹 쉬더니 물었다.

“내 딸이 자네를 좋아한다는 거, 알고는 있겠지?”

그의 말에 스테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네.”

『뭐?! 난 네가 여태껏 눈치 없는 놈이라서 그런 것도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진심으로 경악한 프레야의 목소리에 스테치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야, 나도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거든? 아무리 둔감해도 이쯤 되면 다 알아!’

사실 엘레나는 스테치가 알고 있던 그 어떤 여성들보다도 가장 적극적으로 자기 마음을 표현한 축에 속했다. 다만 그가 모른 척했을 뿐. 그러자 프레야가 황당해하며 그에게 말했다.

『이거 진짜 웃기는 놈일세. 그럼 다 알면서도…….』

“알면서도 지금까지 모른 척했다는 건가?”

『……그래, 내 말이 그거야.』

프레야가 시작한 말을 대신 끝맺는 케인. 스테치는 마치 두 사람에게 동시에 혼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살짝 혼란스러웠지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로님……. 제 일상은 평범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장로님이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요. 누군가를 함부로 끌어들이기엔 너무 위험한 삶이에요.”

베네지아 왕가와 얽힌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거칠고 험난해졌다. 설령 복수를 달성하더라도 그 뒤가 평탄할 거란 보장은 없었다.

스테치는 이러한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관해 말을 아끼는 한편, 감비니 요새에서 엘레나와 나눴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은혜 갚기는 충분하니 돌아가는 게 어떻겠냐는 그의 제안과, 거기에 되레 화를 냈던 엘레나.

그러자 케인은 스테치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가 잘못했구먼.”

이 딸 바보 아저씨가 진짜…… 스테치는 답답한 나머지 가슴을 쾅쾅 두들기며 말했다.

“장로님은 모르시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라니깐요. 전 바깥에서…….”

“이봐, 스테치.”

스테치의 말을 끊은 케인. 그는 살짝 어두워진 표정으로 징검다리 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네나 엘레나가 숲 바깥에서 있었던 일을 굳이 꺼내지 않는 이유는, 필시 내가 알게 되면 까무러칠 만큼 터무니없이 위험한 일에 엮였기 때문이겠지. 내 말이 틀린가?”

정곡을 찔린 스테치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뇨. 하지만…….”

“그럼, 그걸 알고 있는 내가 왜 딸을 계속 자네랑 함께 다니도록 놔두는지 혹시 알고 있나?”

스테치는 케인을 가만히 쳐다보았고, 케인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곧 말을 이어 갔다.

“내 딸은 말야……. 내가 없어진 순간부터 자유를 박탈당한 것과 마찬가지일세. 차기 장로로서 부족과 마을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나의 원수를 갚겠다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어린 시절을 모두 헛되게 날려 버리고 말았지.”

“…….”

“과거는 절대 바꿀 수 없어. 내가 이렇듯 살아 돌아왔어도, 엘레나의 잃어버린 소중한 시절을 보상해 줄 방법은 없어. 그렇다면 최소한 지금부터라도 딸이 원하는 삶을 살도록 해 주는 게 아버지로서의 도리라고, 나는 생각하네.”

스테치는 케인의 말에 침묵을 고수했다. 선뜻 대답하기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하지.”

잠시 후, 케인이 말했다.

“자네는 엘레나를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상 이게 문제의 핵심이었다. 엘레나가 아무리 스테치에게 호감이 있어도, 당사자에게 별다른 생각이 없다면 이런 불편한 관계는 당장에 끊어야 옳았으니까.

“좋아합니다.”

그러나 스테치의 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 * *

“…….”

나뭇가지 위에 올라탄 채 귀를 바짝 기울이던 엘레나는 온몸이 화끈거리다 못해 현기증이 올 지경이었다. 하마터면 떨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견뎌 낸 그녀는, 나무 기둥에 등을 바짝 붙인 채로 숨을 헐떡였다.

우연찮게 들린 소음에 잠에서 깬 그녀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아버지와 스테치가 대화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무슨 수상쩍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싶어 뒤를 따라와 봤건만, 설마 이런 내용일 줄은…….

“어이.”

“?!”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엘레나. 비명이 터져 나오려던 그녀의 입 위로 손이 덮이고, 프레야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쉿, 이러다 들키겠다.”

“프레야?! 어떻게……?”

“난 인간이 아니잖아. 집중 좀 하면 주변에 누가 있는지 정도는 훤히 보이지.”

“지금 여기 있으면 아텔리어 씨가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그 바보는 지금 온 정신이 다른 데에 팔려서 나 정도는 신경도 안 쓰고 있을걸?”

프레야가 숨죽여 킬킬거리더니 엘레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들은 거야?”

당황했던 것도 아주 잠시. 엘레나는 방금 전에 엿들은 대화를 다시 떠올리곤 얼굴을 붉혔다.

“아, 알면서도 모른 척했냐는 부분쯤부터…….”

“그럼 중요한 알맹이는 거진 다 들었겠네.”

프레야의 말에 엘레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처음 스테치의 ‘대답’을 들었을 때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머리가 식고 나서 다시 보니 마냥 좋아할 만한 일은 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그들은 베네지아 왕가를 상대로 결말이 불확실한 싸움을 걸고 있는 상황. 엘레나를 더 깊숙이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서 함부로 확답을 주지 못했다는 스테치의 판단은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과연 스테치가 저 대답을 자신의 앞에서도 그대로 꺼낼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자기가 그 대답을 듣는 날이 오기나 할까? 엘레나는 그것이 걱정이었다.

또르륵-.

갑자기 엘레나의 뺨을 타고 굴러떨어지는 눈물에 프레야는 깜짝 놀라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눈물방울을 대신 훔쳐 준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엘레나에게 물었다.

“왜 그래? 내가 뭘 잘못했어?”

“아뇨. 그냥…….”

한번 터져 나온 감정의 격류를 억누르는 건 매우 힘들었다.

간신히 입을 연 엘레나는 방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프레야에게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엘레나가 방금 전까지 거의 울 뻔했다는 것도 잊어먹었는지 콧방귀를 뀌었다.

“원, 걱정도 심하시네. 진정 좀 해.”

“네?”

두 눈을 끔뻑거리며 프레야를 쳐다보는 엘레나. 프레야는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예전에 감비니 요새에서 너랑 스테치, 둘이서 했던 대화 기억나? 스테치 녀석이 하는 말을 듣고 너는 분노했었지.”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테치가 끓는 자기 속도 모르고 ‘이제 그만 돌아가도 된다.’는 말을 꺼냈을 때, 엘레나는 그것이 자신을 배려하기 위함이었음을 알면서도 화를 내고 말았다.

“……근데 그게 왜요?”

“걔가 그때 이후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너한테 돌아가란 말을 단 한 번이라도 또 내뱉은 적이 있었냐?”

“없었죠.”

“그렇지?”

어느새 프레야는 사뭇 진지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저놈이 조금 둔한 감이 없잖아 있긴 해도, 의지나 결단력마저 부족하진 않아. 한번 정한 일은 신속하고 확실하게 해치우는 놈이라고. 그러니까 스테치가 병신이 아닌 이상에야…….”

프레야는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더니, 곧 엘레나의 어깨를 탁탁 두들기며 말했다.

“자, 들키기 전에 어여 돌아가서 잠이나 자. 이러다 들키겠다.”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데? 엘레나는 질문조차 하지 못하고 프레야의 손에 떠밀려 자기 방까지 돌아가야만 했다.

결국 졸음이 홀라당 날아가 버린 스테치는 방으로 돌아오고 나서 해가 뜰 때까지 계속 깨어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태평스럽게 잠을 자는 건 불가능했다.

이른 아침이 되고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할 무렵, 스테치는 벌게진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야?”

의자 등받이에 턱을 얹고 앉은 프레야가 물었다. 엘레나가 스테치의 속마음에 대해 전부 엿들었다는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결국은 스테치가 뭐라고 말할지가 관건이다.

“이미 좋다고 말까지 한 마당에 뭘 머뭇거리는 건데?”

“닥쳐.”

스테치가 험악하게 대꾸하긴 했지만, 프레야의 말이 옳았다. 사실, 케인의 허락까지 떨어진 상황에 이 이상 무슨 변명이 필요할까? 하지만 사안이 중대한 만큼 충동적인 판단은 피해야만 했다.

“……좋아, 결심했어.”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옷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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