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고백
(152/203)
152화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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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화 고백
2022.03.02.
한편 잠을 설친 건 엘레나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이제부터 무슨 얼굴로 스테치 아텔리어란 남자와 얼굴을 마주해야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갑자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예, 예에엣!”
긴장감이 극에 달해 버려 목소리 톤이 올라가 버린 엘레나. 혹시라도 수상하게 여겨질까 두려웠던 그녀는, 마치 막 일어난 것처럼 꾸미기 위해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문을 열자,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의 스테치가 있었다. 엘레나는 팔 한쪽을 몰래 꼬집으며 간신히 맨정신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걸 전혀 알 길이 없었던 스테치는 평소답지 않게 흐트러진 엘레나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아?”
“네, 뭐…….”
“같이 아침 산책이라도 좀 할래? 아침 숲 공기가 엄청 좋더라고.”
평소라면 마냥 좋아했겠지만, 상대의 생각을 알고 나니 이제는 긴장감뿐이다. 아직 별다른 이야기가 나온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리니 엘레나는 그야말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어디 안 좋아? 정 아니다 싶으면 나중에-”
“누가 안 간다 그랬나요?”
엘레나는 스테치의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기껏 망쳐 둔 머리를 다시 정리하고, 옷을 입고. 재빠르게 모든 걸 처리한 그녀는 심호흡을 한 뒤 밖으로 나갔다.
“갑시다.”
“으, 응.”
스테치는 엘레나와 함께 마을 외곽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일반적인 숲에 비해 어둡긴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운치 있게 느껴졌다.
그렇게 산책을 시작한 뒤로 10분이나 흘렀지만,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처음엔 긴장되고 들떴던 엘레나가 슬슬 이상하게 생각할 무렵, 스테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돌아와 보니 어때?”
“생각했던 것보단 괜찮아요. 아빠도 만날 수 있었고요.”
“다행이다.”
스테치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참 신기하지. 이 숲은 내 고향도 아닌데, 마치 집에 온 것처럼 편한 기분이 들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단순히 이곳이 어두워서 어둠의 숲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저는 이 음영 때문에 오히려 포근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 말을 들은 스테치는, 발걸음을 멈추고선 앞서가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엘레나는 잠시 경치를 즐기느라 스테치에 대해 의식하던 것도 잊고, 주변을 둘러보기에 바빴다.
‘대체 언제부터였지?’
난 언제부터 그녀를 좋아했을까?
엘레나는 분명 매력적인 여성이었지만, 스테치가 처음부터 그녀를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돕겠다고 나서 줬던 고마운 조력자였을 뿐.
그러나 정작 그녀는 단순한 동료 이상의 것을 매번 스테치에게 베풀어 주었다. 던전을 드나들면서도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수도 없이 감수한 것은 물론이고, 검은 아티팩트의 영향으로 잠들었던 때는 목숨을 걸고 그를 도와주었다.
스스로도 인연이 없다고 생각한 감정이 희미하게 싹트기 시작했을 무렵, 스테치는 프레야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숨기고 묻어 두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스테치가 입을 열자 엘레나가 고개를 돌렸다. 올 것이 왔구나. 엘레나는 각오를 다지고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그러나 스테치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녀가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닌, 뜬금없는 사과의 말이었다.
“장로님이랑 얘기하는 네 모습을 보니까……. 어쩐지 미안해지더라고. 기껏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그걸 나 때문에 미뤄 둔 꼴이 된 거 같아서…….”
잔뜩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는 결국 그 이야기? 엘레나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생각을 왜 해요? 애초에 따라간다는 말은 제가 먼저 꺼낸 건데…….”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왔을 때, 엘레나는 가슴속에 담아 두고 있던 모든 응어리들을 지워 버릴 수 있었다. 이미 그것만으로 충분하건만, 하지 않아도 될 사과를 왜 굳이?
“겨우 그런 이야기 하려고 여기까지 부른 거라면-.”
“아니야! 그런 건 아니지만……. 아이고.”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스스로가 답답하게 느껴졌는지 쓴웃음 짓는 스테치에게, 엘레나는 따지듯이 물었다.
“뭔데요?”
“…….”
스테치는 대답하는 대신,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 위에 얹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스러워하는 엘레나. 그러나 스테치는 그녀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한 그 행위에, 기분이 이상해진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거 참……. 간단한 말 한마디일 뿐인데, 왜 이렇게 입 밖으로 꺼내기가 힘들까.”
“평소엔 원하는 대로 다 하시면서, 뭘 주저하고 계신 건가요?”
“그러게. 잘 안 되네, 이거.”
그녀의 말을 들은 스테치가 쓴웃음을 지었다.
엘레나 드레이노어.
사랑이라곤 인생에서 단 한 번밖에 겪어 본 적 없는 데다, 동족이 아닌 인간 남자를 사랑하게 된 그녀.
스테치는 호수처럼 맑고 깊은 눈동자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러더니,
스윽-.
그는 자기도 모르게 엘레나의 머리 위에 얹어진 손을 그대로 흘려내려, 천천히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부드럽다.
“……정말 괜찮아? 우리 일 잘못되면 평생 도망치면서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이제 그런 식의 질문 좀 그만해요. 무슨 대답이 나올지도 다 알면서…….”
이미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긴장감이 너무 심했던 탓일까? 스테치는 생각만큼 잘 표현되지 않는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결국 그는 자기가 느끼고 있는 것을 최대한 에둘러 표현했다.
“……처음엔 무시하려고 했어.”
이 감정을.
“뭘요?”
엘레나가 조용히 물었지만, 스테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간 말없이 눈만 마주치고 있던 스테치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묻어 두고, 덮어 두려고 했는데. 그런데 그게 잘 안 돼. 너만 보면 그게 안 돼. 단 한 번도 내가 내 마음대로 못 한 적이 없었는데…… 너를 보면 한도 끝도 없이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는 기분이야.”
사람 마음이 어디 감춘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던가? 그동안 두르고 있던 벽을 케인과의 대화로 완전히 허물어뜨리자, 억눌러 왔던 감정이 일시에 쏟아져 나왔다.
눈앞에 있는 그녀가 미칠 듯이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동안 스스로도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심지어는 이대로 복수를 때려치우고 함께 조용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머리가 어떻게 됐나?’
한번 마음을 다잡았을 뿐인데, 매일같이 보던 얼굴이 이렇게나 아름다워질 수도 있구나.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어 버리는 스테치.
스테치의 말을 듣고 있던 엘레나는, 그의 손과 맞닿은 부분이 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화끈거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흠칫거리며 한쪽 손을 들어 올린 그녀는, 자신의 뺨을 덮은 그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천천히 포개어 겹쳤다. 그것은 그녀가 내보이는 무언의 표시였다.
“…….”
따뜻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적막을 깨고 새 지저귀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스테치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는 스테치와 엘레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
잠시 후, 귀 끝까지 새빨개진 엘레나는 스테치를 팍 밀쳐냈다. 한쪽 손가락 끝으로 입술을 매만지던 그녀는,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닫고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더니 마찬가지로 얼굴을 붉힌 채 낄낄거리던 스테치에게 핀잔을 주었다.
“보…… 보통은 이런 건 나중에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퍽! 퍽!
괜시리 부끄러워졌는지 스테치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기는 엘레나. 하지만 손에 들어간 힘이 풀리면서 속도가 점점 느려지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스테치는 양팔을 살짝 벌려 보였다.
“아, 진짜. 내가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랑 엮여 가지고.”
깊은 한숨을 내쉰 엘레나는 터덜터덜 걸어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고, 스테치는 그런 그녀를 꼭 안았다.
“덕분에 분위기도 풀리고 좋았잖아, 뭘 그래?”
“아직 내 귀는 멀쩡하거든요? 어물쩍 넘길 생각하지 말고 제대로 얘기해 줘요. 지금 당장. 안 그러면 방금 한 거 취소니까.”
『어이구야. 같이 살면 꽉 쥐어 잡히겠네, 이거.』
두 사람의 행각을 보고 있던 프레야가 어처구니없어하며 내뱉은 말이었다. 엘레나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긴 스테치가 말했다.
“좋아해, 엘레나. 그리고…… 나 같은 놈을 좋아해 줘서 고마워.”
* * *
“저희도……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알프레드는 이례적으로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베네지아의 왕, 신체루스에게 말했다.
첫째 왕자는 또 미래시에 대한 정보를 염탐했는지, 멋대로 대사막에 향해 놓고선 행방불명. 거기다 대사막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마력 폭풍은 소멸하기까지 하고…….
알프레드는 조사와 수색을 겸하기 위해 소규모 부대를 편성했다는 보고를 올리며, 흘끗 왕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왕위 계승권 1위의 첫째 왕자의 실종 소식, 그리고 역사가들이 뒤집어질 만한 엄청난 해프닝을 듣고서도 아무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의 표정은 평온하다 못해 심드렁해 보일 지경이었다.
‘착각…… 이겠지?’
알프레드가 남몰래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신체루스가 입을 열었다.
“모두들, 당황하지 마라.”
랍토레스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수도에 와 있던 이드릴, 그리고 다른 대신들이 시선을 왕에게로 옮겼다.
“남부연합국을 지키는 방패국으로써, 우리는 그 어떤 때에도 굳건해야 한다. 알프레드?”
“예.”
“빠른 시일 내에 북부 왕국들과의 접선을 시도해라. 이런 일이 벌어져서 놀란 것은 비단 우리들뿐만이 아닐 테니까, 괜히 그쪽에서 엉뚱한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연락을 취하는 편이 낫겠지.”
알프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헨리에타 장군? 당분간 수도에서 떠나지 말게. 자네한테는 따로 부탁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네!”
긴급 회의가 종료된 직후,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에서 나섰다. 단 한 사람, 알프레드를 제외하고. 그는 따로 남아 있으라는 왕의 지시 때문에 남들이 방을 빠져나갈 때까지도 기다리는 중이었다.
“첫째 왕자의 수색은 적당히 하다가 중단해라. 그런 데에 병사들을 놀리고 있을 여력은 없으니까.”
“예? 그게 무슨-”
알프레드는 크게 놀랐다. 일국의 첫째 왕자가 사라졌는데, 수색을 강화해도 모자랄 판에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구,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그것이 내가 녀석에게 내리는 벌이다. 공적에 미쳐서 날뛰는 놈을 후계로 삼을 생각은 없으니까. 살아 있다면 제 발로 알아서 돌아오겠지.”
자식에 대해 너무나도 무심한 발언에 알프레드는 쉽사리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알프레드는 자신의 의견을 굳이 내비치지 않고, 왕에게 인사를 올린 뒤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