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소중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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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화 소중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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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화 소중한 마음
2022.03.03.
어둠의 숲 엘프들은 숲에서 구할 수 없는 자원이나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특별히 선별한 소수의 인원에게 인간 문화를 교육시켜 정기적으로 숲 바깥에 내보낸다.
덕분에 엘프들은 숲에 고립된 것치고는 외부 정보에 어느 정도 훤한 편이었다.
“전부 다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보스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정작 범죄 조직의 수괴를 놓친 탓에 위에서는 쉬쉬하는 분위기지만,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죠.”
버든베어에서 범죄 조직에 대한 대규모 소탕 작전이 펼쳐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 스테치는 충격에 빠졌지만, 보스인 스카이가 잡히지 않았다는 말에 조금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건 그렇고 굉장하네. 설마 서방장군이 직접 지휘하는 부대에게서 도망치다니.”
엘레나가 물었다.
“그렇게 악질인가요?”
“사실 내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마르크와 동급의 힘을 지닌 장군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지.”
스카이는 유능한 인물이었다. 지금쯤이면 이미 어딘가 다른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고도 남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어디인지 모른다는 점이었지만…….
“이럴 때 메시지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받는 상대가 화살을 유도해 주는 특수 마커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메시지 마법을 쓰는 건 불가능했다. 스테치가 잠시 고민하느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동안, 엘레나가 말했다.
“다른 소식은 뭐죠?”
“이겁니다.”
외부 연락 담당의 엘프가 건넨 것은 한 장의 종이. 그것을 받아 든 엘레나는 깜짝 놀랐다.
“어……. 정말 똑같이 생겼네요.”
그녀의 말에 스테치가 눈길을 돌려 보니,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밀하게 묘사된 스테치의 얼굴이 수배지 종이에 그려져 있었다. 그 현상금은 무려 800만 크라운으로, 스카이에게 걸렸던 액수의 7배가 넘었다.
아무래도 감비니 요새에서의 사건 이후로 스테치를 잡는 데에 제대로 혈안이 된 모양이었다.
“와, 나 유명해졌네?”
“더 궁금하신 게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상대는 손을 흔들며 방을 나섰다.
“그래도 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여기도 마냥 안전한 곳은 못 되는구만.”
베네지아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어둠의 숲을 살펴보러 오지 않는 이유는, 인간들에 대한 엘프들의 지독한 적개심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인간인 스테치가 어둠의 숲에 있을 확률은 한없이 0에 수렴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베네지아가 어둠의 숲에 군대를 보내올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어.”
“왜 벌써부터 그런 끔찍한 상상부터 하시는 건가요?”
엘레나의 퉁명스런 질문에 스테치가 말했다.
“직업병이지 뭐.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거기에 대비하는 게 내 일이었잖아. 뭐, 요즘은 잘 안 풀리면 그냥 몸으로 때우는 편이 더 많아졌지만.”
스테치가 침대로 걸어가서 쓰러지자, 엘레나가 잽싸게 그의 팔을 베고 누웠다. 한쪽 팔로 엘레나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엘레나……. 부탁이 있는데. 케인 아저씨한테 결혼 이야기 좀 그만 꺼내 달라고 해 주면 안 돼?”
“별로 안 듣고 싶어 하는 눈치던데요.”
엘레나의 말에 스테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가 봐도 확연히 관계가 진전된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케인은 물론이고 엘레나의 할머니까지 즐거워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두 사람 모두 결혼이니 뭐니 하는 건 아직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그런 건 일 다 끝나면 해야지.”
“그렇죠.”
『얼씨구?』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프레야가 황당해했다. 그러니까 하기는 할 계획이구나?
“그럼 일단은 셋째 왕자의 근황을 확인하는 게 먼저겠네요.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누구도 들은 바가 없으니까요.”
엘레나의 말에 스테치가 끙- 하고 작게 신음했다.
철저한 정보 통제 탓인지, 감비니 요새에서 패퇴당한 제라드가 이후 어찌 되었는가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왕성에 머무르고 있다면 사실상 베네지아 군대 전체와 맞서 싸울 각오를 해야 하는데, 스테치도 그것만큼은 최후의 선택지로 남겨 두고 싶었다.
“마르크 말로는 성안의 의료진들이 집중 관리에 들어간 이후로는 제라드를 본 적이 없다던데.”
스테치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가렛. 가렛을 찾아야겠어.”
“그 산적이요?”
엘레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응. 내가 아는 한 이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뭔가 해 보려고 나선 건 그 녀석이 처음이야.”
스카이와 마찬가지로 왕가에 대한 적개심도 있으며, 나름의 세력도 갖추고 있는 가렛이라면 스테치와 함께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몇 번인가 서로 도와준 적도 있으니, 어쩌면 스테치가 하려는 일에 동조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녀석이 자기 입으로 말했었잖아. 나라 곳곳에 자기 부하들이 퍼져 있다고. 그중 한 명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가렛 본인에게 금방 연락이 닿을 거야.”
“하지만 어떻게 찾아내실 생각인데요?”
“블랙 마켓의 정보상에게서 정보를 구해 볼 거야. 일단 클로드 마을로 가야겠어.”
친구인 클라이드와 달튼이 있는 곳. 사실상 스테치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처음 듣는 이름인 것 같은데……. 제가 가 봤던 곳은 아닌 것 같네요.”
“너랑 만나기 전에 들렀던 마을이거든. 블랙 마켓의 지부장과 만나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야.”
자신 있게 말하긴 했지만, 스테치는 내심 불안했다.
현재 베네지아 왕국의 모든 범죄 조직은, 국가 주도의 대대적인 색출 작전으로 인해 존재 자체를 위협받고 있는 상황. 최악의 경우엔 클로드 마을의 블랙 마켓 지부는 이미 사라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 왜 직접 가 보려는 거야?』
‘아니지. 난 어디까지나 가정을 했을 뿐이고. 실제로는 버젓이 남아 사업을 키우고 있을지 누가 알겠어?’
블랙 마켓 최대의 장점이자 단점은, 음지에서 활동하는 사업 특성상 바깥에서는 내부 사정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직접 가서 보고 듣는 것 이외에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스테치는 불안함과 동시에 일말의 희망도 함께 품고 있었다.
‘우리가 들렀던 달튼의 블랙 마켓은 지부 중에서도 아주 작은 축에 속해. 실제로 깊게 들어가 보면 저어기 높으신 귀족들까지도 엮여 있거든. 왕가도 그래서 어지간하면 더 파고들지 않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만 끝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다만 이번에도 그럴지 안 그럴지는 모른다는 게 문제지…….’
어쨌든 향후 계획이 결정되자마자 스테치 일행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장기 보존이 가능한 음식과 식수를 배낭에 가득 채우면서 본격적인 출발 준비를 시작했다.
“야, 마르크.”
스테치는 스트라이더들의 전용 훈련장에서 단련 중이던 마르크를 찾아 말을 걸었다. 상의까지 시원하게 벗어 재낀 채 땀을 뻘뻘 흘리던 그는 스테치를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
“너는 여기 남아 있어야겠다.”
“……왜지?”
“지금 네 모습을 한번 봐라. 어디 한 군데라도 평범한 곳이 있는지 없는지.”
스테치는 마르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흉터로 그득한 근육투성이의 커다란 몸과 안대, 거기다 자기 몸만 한 사이즈의 거대하고 화려한 방패.
여기까지만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데, 하물며 마르크는 베네지아의 전(前) 동방장군이다. 북부라면 모를까, 병사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온다면 큰 문제가 벌어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마르크는 로브 따위로 가리기엔 하나같이 개성 강한 특징들투성이였다.
“게다가 지금부터 내가 만나러 가 볼 사람들은 죄다 널 싫어하는 사람들이라고. 따라오면 일이 엄청나게 골치 아파져.”
가렛같이 현 왕가에 불만을 품고 있는 자가 마르크를 보게 되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그것이 스테치의 가장 큰 걱정이었다. 함께 북부를 돌아다녔던 스테치와 엘레나가 아닌 이상에야, 그를 신뢰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마르크는 입을 열었다.
“그런 쪽으론 생각 못 해 봤군. 하지만 조건이 있다.”
“네가 내미는 조건이야 어차피 뻔하지. 덤벼.”
스테치가 검을 뽑자, 마르크는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으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콰캉!
검과 방패가 맞닿으며 불똥을 튀겼다.
잠시 후.
땀과 먼지가 엉겨 붙어 지저분해진 채로 주저앉은 마르크와, 그에게 검을 겨눈 채 숨을 헐떡이며 내려다보는 스테치가 있었다. 승부의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지만, 이전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군, 아텔리어.”
마르크는 스테치의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이번엔 아티팩트조차 거의 사용하지 않던데.”
“…….”
스테치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메멘토 모템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궁금하던 그는, 의도적으로 반지의 사용을 자제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보는 바와 같았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그래도 오롯이 혼자만의 힘으로 마르크를 이긴 것이다. 2 대 1로 싸우고도 고전을 면치 못했던 감비니 요새 시절을 떠올려 보면 그야말로 놀라운 변화였다.
‘이제 와서 성장했다고? 내가?’
그런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좀 더 근본적으로 신체가 강해진 듯한 기분.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스테치는,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마르크에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어쨌든, 내가 널 남기려는 이유는 하나 더 있어.”
“뭐지?”
“나와 엘레나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 이 마을을 지켜 줘.”
그러자 마르크는 한층 진중해진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베네지아의 영역 안에 있는 한, 이 숲도 백 퍼센트 안전한 게 아냐. 언제 적이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아. 그러니까, 마을을 부탁한다.”
“……알겠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 마을을 완벽하게 지켜 보이지.”
스테치는 마르크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한 번 친 뒤, 훈련장을 나서서 마을로 돌아갔다.
흙투성이가 되어 지저분해진 스테치가 마을에 다다를 무렵. 그는 낯익은 얼굴의 여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엘레나와 케인을 발견했다. 스테치를 본 여인은 그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반갑구나, 스테치.”
“어라?”
그녀는 다름 아닌 엘레나의 할머니, 올리비아였다.
“안녕하세요.”
가볍게 묵례하는 스테치. 그러자 올리비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들한테서 이야기는 들었다. 그래, 손녀랑 사귀게 됐다면서? 두 사람의 앞길에 축복이 가득하길 비마. 다른 인간이나 엘프라면 모르겠지만, 너라면…… 괜찮다.”
“가, 감사합니다.”
스테치는 얼굴을 찡그렸다. 딱히 소문내지도 않았는데, 대체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스테치가 케인을 흘끔 쳐다보자, 그는 히죽히죽 웃어 댔다.
스테치는 올리비아에게로 시선을 돌리고선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엘레나에게 줄 물건이 있어서 말이다.”
케인은 목에 걸고 있던 유물 목걸이를 풀어 엘레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당연히 엘레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왜 저한테 주세요?”
그러자 케인이 말했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유물은 그것을 지니고 있는 자에게 신의 가호를 내려 준다고 하더구나. 앞으로의 여정에서 네게 부적으로 쓰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건 장로의 증표잖아요.”
“장로의 증표이기 이전에, 어차피 유물은 결국 다음 수호자가 될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할 물건이란다. 그리고…….”
그는 품 안에서 유물과 똑같이 생긴 목걸이를 꺼냈다.
“누가 반발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가짜를 준비해 놨으니.”
“……아빠, 장로가 그래도 괜찮아요?”
엘레나는 피식피식 웃으면서도, 할머니와 아버지를 크게 벌린 양팔로 끌어안았다. 유물이 정말 부적으로써의 효능이 있건 없건, 그것에 담긴 마음은 소중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