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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정보 수집 (155/203)


155화 정보 수집
2022.03.05.


달튼이 알려 준 도주로를 따라 낡은 창고에 도달한 스테치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뒤 상회 안으로 들어섰다.

수상한 복장에 몇몇 상인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왔지만, 다행히도 다짜고짜 후드를 들춰 남의 얼굴을 확인해 볼 정도로 정신 나간 이는 없었다.

“스테치 너는 이제부터 이 방을 쓰면 돼.”

달튼은 품 안에서 열쇠 뭉치를 꺼냈다. 그가 운영 중이던 메디코프 상회는, 본업이던 술집과 여관을 겸하기 위해 2층 이상부터가 숙박 시설로 되어 있었다. 덕분에 기나긴 행상일에 지친 상인들은 상회 건물에 자주 머무르는 편이었다.

“자, 여기. 그리고 다른 두 분은…… 각방을 쓰게 해 줄까?”

방 열쇠를 스테치에게 막 건네준 달튼이 고민하자, 스테치가 말했다.

“방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자. 일단 들어와.”

달튼과 함께 방으로 들어간 세 사람. 생각 이상으로 공간이 넓어서 여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갔는데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였다. 스테치는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고선 입을 열었다.

“일단 네가 무사한 걸 보니까 다행이다. 클라이드는 잘 지내?”

“그 친구? 요즘 엄청 잘나가. 창의력이 좋은 대신 방향성이 조금 엇나가 있던 게 흠이었는데, 옆에 사람 붙여 주고 관리하니까 그제야 물건이 팔리더라고.”

클라이드는 달튼이 만든 메디코프 상회의 전속 대장장이로 고용되었다. 상회의 힘을 등에 업고 사람들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한 그는, 덕분에 인생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무기와 방어구들을 만들게 되었다.

특유의 기술과 센스가 가미된 무구들이 소수의 구매자층들로부터 컬트적인 인기를 끌게 되면서, 클라이드의 제작품은 매일 빠짐없이 꾸준히 판매가 이뤄지고 있었다.

“클라이드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너 예전에 만든 검은 어디다 팔아치웠냐?”

그의 눈은 스테치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할로우 블레이드로 향해 있었다. 몸 전체를 두르는 망토에 가려 남들이 못 봤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화려한 검신의 무늬 때문에 이목을 끌었으리라.

“망가졌어.”

“어쩌다?”

“베네지아 셋째 왕자 새끼 멱모가지 따 버리려다가.”

쿠당탕!

의자에 앉아 몸을 뒤로 기울이던 달튼이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이후 장장 한 시간 반이라는 긴 시간 동안, 스테치는 그를 진정시키는 한편으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적당히 각색하여 들려주었다.

“너 인생 진짜 파란만장하게 사는구나.”

달튼은 스테치가 털어놓은 이야기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왕국의 요새를 점거한 것도 모자라, 왕자를 거의 죽일 뻔했다고? 거기에 북부가 뭐? 사막은 또 어쨌다고?”

“숨넘어가겠다. 숨 쉬어, 숨.”

“세상에…….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 나가겠다, 이 친구야.”

농담이 아니었다. 동화 속에나 나오는 전설 속 인물이나 이룩할 만한 업적들에, 한 사람이 거쳐 왔다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온갖 사건 사고들. 스테치의 목에 걸려 있는 800만 크라운은 그를 잡기엔 턱없이 적은 액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 그럼 아까 날 찾아온 이 아가씨가 아티팩트 그 자체란 말야? 이런 건 전례가 없는데.”

마냥 신기해하는 달튼에게, 스테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너희들 생활이 갑작스럽게 위험해졌다면 그건 간접적으로는 내 잘못이야. 그 점은 미안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복수를 중단할 생각은 없어.”

“……내가 널 힐난할 거라 생각했다면 그건 착각이야. 확실히 이 나라는 어떤 방식으로든 한 번 크게 변혁할 필요가 있으니까.”

달튼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종 차별 문제. 국민의 소득을 고려하지 않은 과도한 세금. 이런 문제들은 현 왕가가 버티고 있는 한은 결코 바뀌지 않을 사안들이야. 남부연합국의 실질적인 리더나 마찬가지인 베네지아가 계속 이런 기조를 유지한다면, 남부의 어느 왕국으로 가도 마찬가지겠지.”

그 말을 들은 스테치는 그가 예전에 방문했던 겔렌 마을을 떠올렸다. 자기 땅의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 지방 영주는 비단 겔렌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오직 사리사욕만을 위해 아랫것들을 착취할 뿐.

가렛 같은 사람이 나타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째서 이 나라는 진작 쿠데타나 봉기로 망하지 않은 걸까?

‘하긴, 미래시라는 아티팩트가 있으니 국민들이 폭발하지 않도록 조련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겠지.’

문득 그런 생각을 하는 스테치에게, 달튼이 말했다.

“왕자를 죽인다니……. 분명 엄청난 일이지만, 그 정도라도 해 주지 않으면 이 나라는 바뀌지 않겠지.”

“그렇게까지 거창한 생각을 품고 시작한 복수는 아니었지만, 뭐 그것도 겸사겸사 챙긴다고 쳐 두자.”

스테치는 어깨를 으쓱였다.

“블랙 마켓은 그럼 아직 멀쩡하다 이 말이지?”

“분위기가 험악해진 건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큰 문제는 없어.”

“좋아. 마침 찾아봐야 할 사람이 있는데, 도무지 어디 있는지 모르겠거든. 스카이 걸킨이라고 하는데 혹시 알아?”

“……알지. 하여간 끼리끼리 논다더니, 너랑 엮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거물이구나.”

달튼은 작은 종잇조각과 펜을 꺼내 무언가를 메모하며 말했다.

“상회 사람들을 시켜서 알아볼게. 볼일은 그게 다야?”

“일단은 끝. 결과가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려고.”

대충 뒷사정도 전부 들었겠다, 용건이 끝난 달튼은 방을 나서던 도중 멈춰 섰다. 스테치와 엘레나, 그리고 프레야의 시선이 집중되고, 달튼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네 복수는 개인적인 원한으로부터 시작했겠지만, 난 그것이 불러올 결과가 이 답답한 나라를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꿔 줄 거라 기대하고 있어. 블랙 마켓의 지부장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난 너를 항상 지지하고 도와줄 거야. 그걸 잊지 마.”

“……그래, 고맙다.”

“그럼, 나가 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

그는 고개를 돌려 세 사람을 쭉 둘러보더니 물었다.

“방은 사람 수대로 쓸 거냐?”

* * *

스테치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엘레나와 함께 클라이드의 공방을 방문하기로 했다. 달튼만이 아니라 그와도 나눠야 될 말이 한가득했으니까.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은 엘레나는 맨얼굴로 다닌 반면 스테치는 시내로 나갈 때 후드를 썼는데, 다행히도 병사들은 딱히 그를 터치하지 않았다.

“공방을 더 큰 건물로 옮겼다고 들었는데. 저쪽인가?”

멀찍이서부터 들려오는 망치 소리. 스테치가 한 건물 근처로 가까이 다가가자, 밀려 나온 후끈한 열기가 그의 얼굴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가스 실린더 내부에 먼지가 이렇게 많이 끼면 나중에 폭발할 수도 있단다. 다시 닦거라.”

“……네, 스승님.”

빼꼼 열린 공방의 문 틈 사이로 보이는 한 소년. 그리고 검댕이 묻어 지저분해진 얼굴을 닦아 내며 소년에게 지시를 내리는 클라이드. 스테치는 엘레나와 함께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야. 클라이드가 이젠 도제까지 두고 있다니, 내 눈으로 보고도 못 믿겠네.”

“뭐야? 어떤 놈이 그런 심한 말을…….”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 클라이드가 마주 보게 된 것은, 후드 밑에서 미소 지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스테치였다. 클라이드는 갑작스런 친구의 등장에 놀라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스……?!”

“쉬잇. 나 수배 중인 거 기억 안 나?”

“헉! 그랬지 참.”

스테치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자 그제야 조용해지는 클라이드.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도제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자, 뒤쪽에 서 있던 엘레나가 눈치 좋게 나서서 그를 옆으로 데려갔다.

“자자, 누나랑 같이 잠깐 옆에서 기다릴까?”

“어엇……!”

엘레나의 손에 등이 떠밀린 어린 도제가 멀리 떨어진 것을 확인한 클라이드는, 그제야 걱정스런 눈으로 스테치를 쳐다보며 물었다.

“반갑긴 한데……. 정말 안 좋은 타이밍에 돌아왔어. 대체 밖에서 뭔 짓을 하고 다녔길래 사방이 네 수배지투성이냐?”

“똑같은 설명 다시 하기 힘드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달튼한테 물어봐. 그나저나, 성공한 거 보니까 내 속이 다 후련하다. 그런데 어쩌다가 도제까지 들이게 된 거야?”

“일이 갑자기 많아지니까 나 혼자서 작업을 모두 처리할 수 없겠더라고. 그렇다고 아무나 고용하자니, 특정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으면 함께해 봤자 의미가 없고. 그래서 그냥 아예 내가 직접 쓸 만한 기술자를 키워 내기로 마음먹었지. 근데 너-”

“-네가 준 검은 어떻게 됐냐고? 미안, 박살 났어.”

“……뭐 하다가?”

“아주아주 중요한 일을 하다가. 여기선 말 못 하고, 달튼이 알려 줄 거야.”

“그게 네 목숨을 구했냐?”

“구하는 것 이상이었지.”

“그래. 그거면 됐어. 무기든 방어구든 주인을 잘 섬겼으면 그걸로 된 거지.”

의외로 클라이드는 기절하거나 욕설을 퍼붓지는 않았다. 그것은 여타 장인들과는 다른, 무기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가치관 때문이었다. 스테치는 그걸 알고 있었기에 구태여 검이 파괴된 것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지 않았다.

“그럼, 지금은 뭘 쓰고 다니는 건데?”

스테치는 손에 끼고 있던 너클과, 허리춤에 차고 있던 할로우 블레이드를 꺼내 보였다. 그러자 방금까지만 해도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던 그의 목소리는 말을 제대로 이어 나가기 힘들 정도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그는 할로우 블레이드에 새겨진 화려하고 복잡한 무늬를 감상하고, 그가 만든 페네트레이터의 설계 사상을 그대로 계승한 너클도 작동시켜 보면서 즐거워했다.

“예술품. 예술품 그 자체야. 이것들은 전부 박물관으로 가야 해…….”

“답지 않게 뭔 헛소리야?”

스테치는 딱밤을 날려 클라이드를 제정신으로 만들고 난 뒤 각각의 무기에 얽힌 배경을 말해 줬다. 그 과정에서 북부로 갔다는 소리에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발타자르와 찰리의 이야기가 나오자 클라이드는 곧 두 눈을 반짝였다.

“역시 세상은 넓구나. 특히 이 검…… 할로우 블레이드라고 했던가? 무기를 아티팩트화 시킨다니, 발상부터가 상식을 뛰어넘는데.”

연신 감탄을 금치 못하던 그는 스테치를 쳐다보며 말했다.

“생일 선물을 앞당겨 받은 기분이야. 고맙다. 이쯤 되면 더 이상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이는데?”

클라이드는 스테치의 너클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말했다.

“당분간 여기 머물 계획이라면, 그 동안 이 녀석을 나한테 맡겨 줘. 아직 더 개선시킬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는 것 같으니까.”

“나야 고맙지.”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질 때쯤이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간 스테치와 엘레나. 달튼이 서 있는 바 테이블을 그대로 지나친 두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직행했다. 친구들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스테치는, 긴장감이 일시에 풀린 탓인지 갑작스러운 졸음이 몰려왔다.

똑똑.

“어?”

스테치가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그 앞에는 엘레나가 서 있었다. 분명 자기 방 안에 놔두었을 짐을 모두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스테치가 물었다.

“어……. 달튼이 방 하나 주지 않았어?”

“방금 내려가서 방을 물리고 오는 길이에요.”

“왜?”

그러자 엘레나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제 와서 지금까지처럼 따로 잠 자기도 뭐 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안 될까요?”

스테치의 잠이 홀라당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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