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160/203)
160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160/203)
160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2022.03.10.
아침 6시.
이른 시각, 잠들어 있던 거구의 사내가 눈을 떴다.
“……?”
호흡할 때마다 폐와 비강 깊숙이 스며드는 풀과 꽃 내음. 해가 뜰 시간이 아닌데도 창문 밖에서부터 새어 들어오는 은은한 푸른빛. 사내는 그제야 자신이 군용 막사가 아닌, 어둠의 숲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평소 몸에 밴 루틴 탓인지, 기상 시간조차도 마음대로 조절이 안 된다.
자그맣게 한숨을 내쉰 마르크는 이불에서 빠져나와 미리 받아 둔 맑은 물로 세수를 했다. 적당히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닦고, 갑옷까지 걸쳐 평소처럼 완전 무장한 그는 방패를 등에 메고 방문을 열어젖혔다.
“일어났군.”
때마침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토루빔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가자.”
마르크는 턱짓하는 토루빔의 뒤를 따라갔다.
스테치와 엘레나가 떠난 직후, 숲의 유일한 인간으로서 남게 된 마르크 맥도웰은 엘프들의 복잡미묘한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만 했다.
스테치 아텔리어가 데려왔으니 충분히 신뢰할 만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엘프들이 그를 좋아할 만한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생각은 불과 며칠 뒤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스스로 적당한 장소를 찾아 몸을 단련하고, 짬이 날 때마다 숲 외곽의 경비나 정찰, 사냥 일도 도맡아 했다. 그림자처럼 묵묵히 마을을 돕는 그의 모습에, 한 달가량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무도 마르크가 인간이라는 점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필요한 말이 아니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그의 성격도 이런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한몫했다.
“자.”
20분 정도를 더 걸어간 두 사람은, 이윽고 커다란 나무들로 둘러싸인 스트라이더 전용 훈련장에 도착했다.
사방에 널려 있는 연습용 표적과 장애물들. 평소처럼 기초 체력 단련부터 시작하려던 마르크는, 훈련장 한가운데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사용이 다 끝나면 깨끗하게 정돈하고…… 응?”
마르크의 시선을 따라간 토루빔도 입을 다물었다. 훈련장을 선점한 이는 엘프 남성이었는데,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남성을 금방 알아본 토루빔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시작이네, 저거.’
지금 이 시간대에 마르크보다 더 일찍 와 있을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안색이 창백해진 토루빔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자마자, 남성이 홱 고개를 들어 올려 마르크를 노려보았다. 잘생겼지만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얼굴.
그가 외쳤다.
“죽여 버린다아아아!!”
푸드득!
숲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목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러나 마르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등에 멘 방패를 풀어 바닥에 던져 놓았다.
탓!
거의 30m 정도 되는 거리를 단숨에 좁힌 사내는, 그대로 공중으로 뛰어올라 발차기를 날렸다. 마르크가 상체를 비틀어 침착하게 공격을 피하자, 지면에 착지한 사내는 폭풍 같은 공격을 퍼부어 댔다.
“으아아악!”
마구잡이로 팔다리를 휘둘러 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하나가 급소를 노린 예리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마르크의 눈동자는 그 모든 움직임을 정확히 캐치해 내고 있었다.
마치 벌레를 쫓아내는 듯한 손놀림으로 주먹과 발끝을 툭툭 쳐 내며 궤도를 비틀어 놓는 마르크.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기민함으로 상대의 동작을 무력화시킨 그는 앞으로 한 발짝 성큼 나아갔다.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큭!”
사내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면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흡사 바위를 연상시키는 듯한 마르크의 방어에 압도된 나머지, 사내는 처음에 기세 좋게 달려들었던 것이 무색하게 점점 뒤로 더 많이 물러서고 있었다.
재미없군.
사내의 발길질을 적당히 받아 주던 마르크는 문득 스테치 아텔리어와의 싸움을 떠올렸다. 몸 전체를 망가뜨릴 것만 같이 격렬하면서도, 처절함이 느껴지는 그런 싸움을.
그때의 고양감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퍼억!
“으겍-”
안면에 스트레이트 한 방. 갑작스럽게 정면으로 얻어맞은 사내가 잠시 비틀거리는 사이, 마르크는 다음 주먹을 뒤로 당겼다.
후웅!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펀치. 몸을 바짝 낮춰 그것을 피한 사내는, 전신의 체모가 일제히 곤두서는 듯한 오싹한 감각에 입술을 핥았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그 위력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공격이었다.
‘썅, 눈에 훤히 보이는 공격인데 왜……!?’
마르크의 주먹질은 동작이 너무 커서, 얼핏 보기엔 허점투성이였다. 하지만 수년간 단련시킨 강인한 육체와 교본과도 같은 격투 스타일이 더해지자, 사내는 좀처럼 마르크에게 반격할 수 없었다.
“빈틈.”
“뭐? 으와앗!”
쿠당탕!
멱살을 붙잡힌 사내의 시야에서 천지가 뒤집혔다.
강렬한 통각이 전신을 한 차례 휘젓고 지나감과 동시에, 사내는 아주 잠깐 정신을 잃었다. 의식이 돌아왔을 땐 이미 바닥에 큰 대자로 드러누워 있었다.
사내는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 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대미지가 컸는지 버둥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마르크가 손을 내밀자, 표독스런 눈길로 그를 째려보던 사내가 악을 썼다.
“아아악! 빌어먹을 새끼!”
“결국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나무 위에서 줄곧 두 사람을 내려다보던 또 다른 엘프 하나가 훌쩍 뛰어내리더니 사내의 옆에 착지했다. 엘레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은 여성 하나가, 흉악할 정도로 거대한 활을 등에 메고 있었다.
“스트라이더 에이다 님!”
마르크의 뒤에서 달려온 토루빔이 그녀를 알아보고선 부복했다. 에이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쪽 발을 들어 올려, 뾰족한 뒷발꿈치로 사내의 복부를 짓밟았다.
“끄헉!”
헛숨을 토해 내고 완전히 뻗어 버린 사내. 토루빔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스트라이더 제스터 님이 워낙 거칠게 나오셔서…….”
“말 안 해도 이해합니다. 이 멍청이는 제가 처리하죠.”
토루빔은 임무로 복귀하기 위해 그 자리에서 빠졌다. 에이다는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마르크에게 말했다.
“미안하게 됐어. 이 녀석, 꼴에 엄청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혹시나 싶어서 와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또 이러고 있네.”
“덕분에 적당히 몸을 달궜으니 상관없다.”
‘흐음…….’
에이다는 마르크를 위아래로 쭈욱 훑어보았다.
마르크는 장로인 케인으로부터 숲의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된다는 허락을 얻었지만, 극소수의 스트라이더들은 그가 훈련장에까지 들어오는 것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다.
스트라이더가 엘프들 사이에서 독보적이면서도 특수한 직책인 만큼, 그들의 생활 영역은 동족을 포함한 다른 이들의 접근을 철저히 금하고 있었다. 아무리 마르크가 특혜를 받았다곤 해도 외부인은 외부인. 함부로 발을 들여놓게 놔둬서는 안 된다! ……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르크가 마을에 머무르고서 한 달이 지난 지금, 그러한 스트라이더들의 주장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왜냐하면 그와의 대련을 신청했던 스트라이더 모두가 그에게 패배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스트라이더들 중에서 마법과 무기를 금한 일대일 맨손 격투만으로 그를 이길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는 어느 정도 핸디캡을 준 2 대 1 격투에서조차 너끈히 버텨 내는 그의 모습에, 스트라이더들은 짜증은커녕 되레 존경심이 생겨날 지경이었다.
단 한 사람을 빼고.
낄낄거리며 웃은 에이다는 조그마한 수첩을 꺼내더니 제스터의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펼쳤다. 빼곡히 찬 빗금 뒤에 더해지는 새로운 빗금 하나. 지금까지의 기록대로라면 마르크를 상대로 한 그의 전적은 0승 전패였다.
“녀석을 대신 박살 내 줘서 고마워. 지금까지의 전적을 모아서 한꺼번에 보여 주면 조금은 주둥이를 닥치겠지.”
탁!
수첩을 품에 도로 넣은 에이다는 기절해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제스터의 뺨을 좌우로 후려갈겼다. 단순히 깨우려는 행위로 보기엔 개인적인 감정이 다분해 보였다.
잠시 후, 그녀는 자기보다 덩치가 훨씬 큰 제스터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어깨에 걸쳤다.
“……그쪽은 나와 붙을 생각이 없나?”
마르크가 물었다.
“글쎄. 난 근접 격투보단 장거리 저격 전문이라서.”
어깨를 으쓱거리는 에이다. 특이하게도 그녀는 지금까지도 마르크에게 싸움을 걸지 않은 유일한 스트라이더였다.
대부분의 스트라이더가 최소한 한 번 이상 마르크와 대련해 보았다는 점을 생각해 봤을 때, 에이다의 경우는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쉽군. 좋은 경험이 될 텐데.”
마르크는 솔직하게 아쉬운 감정을 내비쳤다.
동년배 남성을 훌쩍 뛰어넘는 근력, 거기에 족제비처럼 잽싼 발재간. 비록 에이다가 직접 나선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백 퍼센트 확신할 순 없었지만, 마르크는 그녀가 숨기고 있는 실력이 상당할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자 에이다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괜히 이상한 말로 신경 긁지 말고 볼 일이나 봐. 나는 어디의 누구와는 다르게 스스로 주제 파악을 할 줄 아니까, 질게 뻔한 싸움을 걸 생각은 없다고.”
터덜-. 터덜-.
그녀는 제스터를 어깨 위에 얹은 채 훈련장을 총총걸음으로 벗어났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마르크는 이내 새로 짠 훈련 프로그램을 시험해 보기 시작했다.
* * *
“오늘도 싸웠어?”
한편, 숲 외곽쪽의 경계 임무로 복귀한 토루빔은 동료들의 질문에 답하느라 바빴다.
“어. 그리고 제스터 씨가 또 졌지.”
“굉장한데. 지금까지 한 번도 못 이긴 거잖아.”
감탄스러워하는 반응에 토루빔은 순순히 동의했다. 엘프들은 선천적으로 인간에 비해 마법 능력이나 신체 능력이 우월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엘프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정예 요원인 스트라이더가 고작 인간 하나한테 쪽도 못 쓰다니, 원래대로라면 부끄러울 노릇이었다.
하지만 마르크가 ‘그’ 스테치 아텔리어의 동료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닥 납득 못 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둘 중 누가 이길지 승패 여부를 두고 도박 중이라는 말이 돌던데. 우린 도박 금지인 거 잘 알지?”
“므어? 우륀 그런 거 모르는뒈에?”
싸늘한 말투로 속을 떠보려는 토루빔과, 그런 그에 맞서 노골적으로 모르는 척하는 동료들.
그렇게 그날도 평소와 같을 줄 알았다.
“야, 잠깐만…… 야!”
한창 스파이 글래스를 들여다보던 엘프 하나가, 자꾸 헛소리만 지껄여 대는 동료들에게 빽 소리 질렀다.
“뭔데 난리야?”
“저기 좀 봐, 빨리!”
다급한 목소리에 토루빔이 그의 손에서 스파이 글래스를 낚아챘다. 투박하게 깎인 렌즈 너머로 무언가를 살펴보던 토루빔의 입에서 경악 어린 목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저, 저게 대체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