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그 남자
(162/203)
162화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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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그 남자
2022.03.12.
주민들의 피난이 완전히 끝나고, 마을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다른 이들과 함께 피난 작업을 주도하던 케인은 그제야 마르크와 다른 스트라이더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베네지아 병사들입니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나무에 불을 질러서 이쪽을 압박해 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상대편에는 기이한 능력자가 지휘관으로서 앞장서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어쩌면 아티팩트 사용자일지도 모릅니다.”
에이다의 설명을 들은 케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스트라이더가 35명에, 마을 경비병이 약 70명 정도. 베네지아의 군세를 막아 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병사들을 막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불부터 꺼야 한다.”
케인이 말했다. 숲의 나무는 엘프들 개개인과 마을을 보호하는 천연의 방어벽. 숲이 없어지면 곧 고향을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스트라이더와 마을 경비 중 마법에 능한 사람은 나와 함께 화재 진압에 나선다. 나머지는 병사들의 시선을 끌어다오.”
“안 됩니다. 직접 나서실 생각이십니까?”
에이바가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장로님은 마을을 다스리는 장으로서의 역할이 따로 있으십니다. 싸움에 직접 뛰어드실 필요는…….”
“있지. 내 마을과 내 사람들의 안전이 걸린 일이고. 게다가 나도 나름대로 마법은 좀 쓸 줄 안다네. 능력 있는데 묵혀서야 쓰나?”
그의 말에 스트라이더들이 작게 신음했다. 장로의 마법 실력은 ‘좀’이 아니라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가 임무에 동참해 준다면 확실히 작업 속도는 배로 빨라지겠지만…….
“문제는 상대가 디스펠륨 장비를 착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건데-”
그러자 마르크가 딱 잘라 확언했다.
“그럴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음? 왜지?”
“디스펠륨의 마법 무력화 성질은 양날의 검입니다. 범위 안에만 있다면 적뿐만 아니라 아군도 마법을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엘프들의 장기는 활과 마법을 사용한 원거리전. 디스펠륨의 영역 밖에서도 충분히 상대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의 말에 몇몇 스트라이더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를 상대로 디스펠륨을 사용하면 그나마 가지고 있던 패를 스스로 없애 버리는 꼴입니다. 그러니 디스펠륨 장비는 아마 가지고 있지 않을 겁니다.”
“과연.”
“그것보다도 가장 큰 변수는 좀 전에 언급된 지휘관입니다. 전 그자가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마르크의 예상에 감탄스러워하던 에이다와 나머지 스트라이더들이 그에게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왔다.
“안다고?”
“직접 보기 전까지 확답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나는 그렇다고 추측하고 있다. 아마도 그녀는 베네지아의 서방장군, 이드릴 헨리에타다.”
“서방장군이라면…… 베네지아에서 엄청 강하다는 인간들 중 하나 아닌가?”
“조금 다르지만 거의 그렇다고 봐도 무방하다.”
마르크가 말했다.
“이드릴은 아티팩트의 힘으로 그림자를 조종한다. 거리 제한이 있긴 하지만 그림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도약이 가능하며, 또한 그것을 통해 적의 위치도 파악할 수 있다.”
낮인 데도 햇빛이 잘 투과되지 않는 어둠의 숲은 이드릴 헨리에타에게 있어 최고의 전장이었다. 혼자서도 강한 그녀를 병사들과 함께 상대했다간, 절대 이길 수 없었다.
“다음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장로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제가 아군의 지휘를 맡아도 괜찮겠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엘프들을 다스리는 자는 케인이지, 외부인인 마르크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계책을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선 케인의 입으로 지휘권에 대한 확답을 들어야만 했다.
“자네는 도망치지 않는 건가?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협력할 의무는 없을 텐데.”
케인의 물음에 마르크는 고개를 저었다.
“스테치 아텔리어로부터 부탁받았습니다. 일단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전력을 다해서 장로님을 돕겠습니다. 제가 지휘를 맡아도 되겠습니까?”
“다른 이들은 불만 없나?”
“있습니다.”
케인의 물음에 모든 스트라이더들이 침묵했지만, 에이바만큼은 예외였다. 제스터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그런 말을 꺼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일단은 듣겠습니다.”
그녀는 마르크에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선언하듯 말했다.
“당신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개인의 능력과 전략적 두뇌가 항상 정비례하지는 않아. 당신의 계책이 영 못 써먹을 물건이다 싶으면, 지휘는 우리 쪽에서 하겠어.”
“현명한 판단이다.”
마르크는 자신을 무작정 믿지 않는 에이바를 칭찬했지만, 그것을 잘난 척이라고 받아들인 몇몇 이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음, 뭐. 계속해 보게.”
케인이 말하자, 마르크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일단 이드릴에 대한 이야기부터 마저 해 보자면…….”
마르크는 돌멩이로 어둠의 숲에 해당하는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녀는 위험할 뿐만 아니라 저돌적이기까지 합니다. 뒤에서 부대가 불길을 계속 퍼뜨리는 동안, 본인은 엘프들을 찾아 숲을 누비겠죠. 하지만 그렇게 놔두진 않을 겁니다.”
“어떻게 잡을 생각이지?”
“그녀의 약점은 빛입니다. 태양이나 횃불 같은 광원체 근처에서는 능력이 사실상 봉인되어 버립니다. 우린 그 점을 이용해서 이드릴을 잡을 겁니다.”
그는 스트라이더들을 주욱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제가 알고 있는 그녀의 약점을 모두 알려 드리겠습니다.”
* * *
“흐음…….”
레이피어 형상의 아티팩트, ‘녹터널’을 지면 깊숙이 박아 넣은 이드릴. 그녀가 정신을 집중하여 감각 범위를 최고 한도로 넓히자, 딛고 있는 그림자가 곧 그녀의 눈과 귀의 연장선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자잘한 들짐승들뿐. 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쳇.’
짜증이 난 이드릴은 자리에서 일어나 녹터널을 뽑아냈다. 뒤를 돌아보자 길게 늘어진 병사들이 불길과 함께 진격 중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속도도 느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너무 밋밋한데?’
좀 더 격렬한 저항을 기대하고 있었던 이드릴로서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둘째 왕자의 지시가 떨어졌을 때는 간만에 스트레스 해소 좀 하나 싶었는데, 이래서야 오게 된 보람이 없었다.
“지휘관!”
이들의 외침을 들은 지휘관은 부대에서 튀어나와 허둥지둥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작업 속도를 조금만 더 빠르게 할 수는 없는 건가?”
“면목이 없습니다, 장군님. 하지만 이건 저희도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라…….”
일단 불꽃이 옮겨붙은 나무들은 잘 타들어 갔지만, 아무래 그래도 번지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게다가 제아무리 이드릴이라고 해도 아티팩트를 막 사용하면서 적진 깊숙이 파고들었다간 역공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부대의 이동 속도와 맞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드릴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았다. 포위망을 깨지 않게 주의하도록.”
피융!
그 순간, 마치 그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듯 거대한 화살 하나가 날아와 그녀의 복부를 꿰뚫었다.
“……카학!”
충격으로 몸이 붕 떠오른 이드릴은 새빨간 핏덩이를 토해 내며 뒤로 날아갔고, 눈앞에서 벌어진 갑작스런 상황에 너무 놀란 지휘관은 입을 쩍 벌렸다.
쿠당탕!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을 나뒹구는 이드릴의 몸뚱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죽은 사람을 연상시켰다. 뒤에서 나무에 불을 지르던 병사 몇몇은 그것을 보곤 당황했는지 입을 쩍 벌렸다.
그러나 잠시 후,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밀어내며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이드릴이 솟아올랐다.
지휘관도 그녀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죽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못한 기습에 적잖이 당황했던 모양인지 두 사람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군, 괜찮습니까?”
지휘관의 물음에 이드릴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감각의 범위를 넓혀 적의 위치를 파악하고자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말도 안 돼.”
그림자를 통한 그녀의 색적 범위는 최대 100~200미터. 그렇다면 200미터나 되는 거리 바깥에서 자신을 저격해 왔다는 소리인가? 아무리 엘프라고 해도 이건 이 정도면 거의 신기에 가까운 기술이었다.
“부대는 맡기겠다, 지휘관! 병사들에게 기습에 주의하라고 지시해라!”
“예!”
카앙!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또다시 날아오는 두 번째 화살. 그러나 이미 제2타가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이드릴은 그림자를 일으켜 방어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래, 이래야 좀 해 볼 만하지!”
이를 갈며 그림자 안으로 녹아내리는 이드릴. 차갑고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의 몸을 감싸고, 흑백으로 변한 시야가 반전되었다.
일단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의 그림자로 도약해 보는 이드릴. 두 번에 걸쳐 앞으로 이동한 이드릴은 곧장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콱!
“으윽!”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날아온 세 번째 화살. 불시로 날아오는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해 그림자를 얇게 만들어 두르고 있었지만, 충격을 완전히 막아 내기엔 역부족이었는지 화살이 적중했던 그녀의 옆구리에서는 핏방울이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녹터널은 고작 한 번 보고 그 특성을 파악하기 어려운 아티팩트였다. 특히 그림자를 이용한 도약 능력과 조작 능력이 결합되면, 대부분의 적은 말 한마디 꺼내기도 전에 죽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상대는 이드릴이 도약해서 빠져나오는 타이밍과, 그녀가 그림자로 분신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까지 전부 꿰뚫어 보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분신이 쓰러지는 걸 확인했을 텐데도 곧장 두 번째 화살을 쏴 날린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어째서 엘프가 내 능력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확인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두 번째 도약을 시도했다. 도약의 연속 사용은 많은 기력을 소모하지만,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엔 상대의 공격 하나 하나가 너무 위협적이었다.
‘어?’
그러나 그녀가 그림자의 바다로 몸을 담그자마자, 넓혀진 그녀의 인지 범위 안에서 인기척 하나가 감지되었다. 육중하고 거대한 성인 남성이 하나. 어쩐지 낯설지 않은 그 느낌에, 자석처럼 끌린 그녀는 남자의 앞으로 도약했다.
스르륵.
“…….”
그림자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가 본 것은, 방패를 내세운 채 황소처럼 자신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마르크 맥도웰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