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패착의 원인
(163/203)
163화 패착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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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화 패착의 원인
2022.03.13.
“시작됐다.”
마르크와 이드릴의 접전이 시작된 것을 확인한 케인이 손짓하자, 스트라이더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크가 세운 작전은 간단했다.
그가 이드릴의 주의를 끌고 발을 묶는 동안, 나머지 스트라이더들과 케인은 화재를 진압할 것.
그림자가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지 도약이 가능한 그녀를 무슨 수로 붙잡아 두겠다는 소리인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스트라이더들은 그의 계획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이드릴의 인지 범위를 피하기 위해 크게 우회한 그들은, 곧 후미에서 숲을 불바다로 만들며 천천히 이동 중인 병사들을 발견했다.
“보세요.”
토루빔이 가리킨 곳에는 나무에 정체불명의 액체를 끼얹고 있는 병사들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기름 같아 보이진 않았다.
“저것 때문에 불이 번지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어요.”
병사들만 상대한다면 모를까, 퍼져 나가는 불길도 함께 잡지 못한다면 이 싸움은 엘프들의 패배로 이어지고 말 것이다.
“마법을 쓸 줄 아는 스트라이더는 나와 함께 소화(消火) 마법을 사용한다. 나머지는 병사들을 견제하는 데에 집중해라.”
“예!”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고 있던 스트라이더들은 케인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일제히 화살들을 쏴 날렸다. 한창 불을 붙이는 데에 집중하고 있던 병사들 중 몇몇은 날아온 화살에 맞아 픽픽 쓰러졌다.
“적습이다! 방어 대형으로!”
“《실드 월》!”
5~10명씩 짝지어서 둥글게 원형진을 형성한 병사들은 스킬을 사용하여 방어를 굳혔다. 그러나 스트라이더들은 그런 그들의 노력을 비웃듯, 화살을 움켜쥔 손끝에 힘을 집중시켰다.
“《패너트러블 샷》!”
콰지직!
“끄아아악!”
방패와 갑옷을 종잇장처럼 구기고 들어간 화살촉이 가슴팍에 박혀 들어가자,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순히 공격을 막아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병사들이 물러서고 뒤쪽에 서 있던 마법사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포스 월》!”
“《파이어볼》!”
방벽을 전개함과 동시에 엘프들에게 날아가는 불덩이.
《액티브 스킬: 디스펠(lv 7). 마력을 흐트러뜨림으로써, 발동된 마법 스킬을 강제 무효화시킵니다. 스킬 레벨이 상대의 스킬보다 낮을 경우엔 효과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법사들이 애써 시전한 마법을 손가락 한 번 튕기는 행위로 지워 버린 케인은, 곧이어 주문을 발동했다.
《액티브 스킬: 아쿠아 스플래터. 넓은 각도로 물을 분사합니다.》
“와아악! 어푸-”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물이 병사와 마법사들을 덮쳤다. 몇몇 스트라이더들이 화살로 병사들의 공격을 견제하는 사이, 나머지는 케인과 똑같은 마법을 사용하여 나무를 물로 적셨다.
화르륵!
한번 나무에 붙은 불을 다시 꺼트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케인의 마법 능력이 워낙 뛰어난 덕분에, 강력한 수압에 밀린 불길이 서서히 밀려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거 까딱 잘못하면 우리가 되레 당하겠는데.’
케인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적들의 수가 워낙 많은 데다가, 불을 끄는 속도가 불이 번지는 속도와 거의 똑같았다. 다행히도 적의 진격과 더불어 불꽃이 옮겨붙는 것은 멈췄지만, 제시간에 화재를 진압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어 버렸다.
“어쩔 수 없지……!”
손아귀에서 푸른 빛을 발하던 케인의 마력이 황금색으로 변했다.
* * *
퍼엉!
“아악!”
그림자 방어막을 뚫고 전해질 만큼 무시무시한 충격. 반응할 틈도 없이 마르크의 방패에 얻어맞은 이드릴은 저 멀리 날아갔다.
‘뭐지?’
전신의 뼈가 삐거덕거리는 듯한 고통 속에서, 이드릴은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나 마르크는 그녀에게 생각할 여유조차 주고 싶지 않았는지 연신 주먹을 날려 댔고, 간신히 그것을 피한 이드릴은 상대에게 발길질을 날렸다.
콱!
그러나 그녀의 발이 적중한 것은 마르크의 몸이 아닌 방패.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흠!”
방패에 장식된 사자 머리의 입에서 커다란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천지를 뒤흔들 것만 같은 포효가 숲 전체에 울려 퍼지며, 그 여파로 몸이 뻣뻣하게 굳은 이드릴은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스르륵-.
몸을 뒤덮고 있던 얇은 그림자 막이 지면으로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며 이드릴은 식은땀을 흘렸다.
‘위, 위험해!’
제대로 된 목숨의 위협을 느껴 본 적이 대체 얼마 만이었을까? 정말로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녀는 마비가 풀리자마자 옆으로 몸을 굴렸고, 그와 거의 동시에 그녀의 머리통이 있던 자리로 스파이크 너클을 낀 마르크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콰광!
움푹 파인 땅바닥에서 주먹을 거둬들인 마르크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벌써 몇 미터 이상 거리를 벌린 이드릴이 헐떡이고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마르크.”
자기 몸뚱이만 한 사이즈의 거대한 타워 실드. 갑옷 위에서도 윤곽을 알아볼 수 있는 근육질의 신체. 안대로 가린 오른쪽 눈.
만약 상대가 누군지 좀 더 빨리 눈치챘더라면, 아티팩트의 능력에 그토록 쉽게 당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거지?”
“…….”
마르크는 방패를 내세우고 이드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림자를 벽처럼 만들어 세워 마르크의 충돌을 막아 냈다.
콰과곽!
벽 너머임에도 불구하고 그 충격이 피부에 와닿는다. 이드릴은 전율감과 짜증을 동시에 느끼며 말했다.
“이 빌어먹을 덩치가!”
마르크의 발밑에서 튀어나오는 그림자의 가시. 그러나 그 정도는 예상했는지, 마르크는 가볍게 뒤로 훌쩍 물러남으로써 이드릴의 공격을 피했다.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지금껏 이딴 거지 같은 숲에 처박혀 있었어? 그리고 대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이드릴이 이를 갈며 외쳤다.
“베네지아의 장군인 네가 왜 날 공격하고 있는 건데? 설마 엘프들과 한 패거리가 된 건 아니겠지?”
“알 바 없다.”
으아악-
마르크와 대치 상태에 빠진 이드릴은, 뒤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비명 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당했다……!’
예상치 못한 상대의 등장에 정신이 팔린 것이 실책이었다.
당연히 뒤에서 무언가 다른 수를 꾸미고 있을 것을 짐작했어야 하는 건데……! 이드릴이 도약을 사용해 부대에 복귀하려는 순간, 마르크는 방패를 든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
뭐지? 이드릴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그 순간, 어딘가에서 날아온 창대 같은 화살이 마르크의 방패 표면을 강타했다.
콰캉!
날카로운 금속음과 불똥을 튀기며 땅에 떨어지는 화살. 충격을 흡수한 레오니다스가 주황빛으로 번뜩이는가 싶더니, 다시금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사자후를 터뜨렸다.
그러자 도약을 위해 이드릴의 몸을 덮어 가던 그림자가 그대로 다시 사라져 버렸다.
“이건……!?”
“그렇겐 안 되지.”
마르크가 말했다.
“나와 마주친 이상 여기서 한 발짝도 도망 못 간다.”
마르크 맥도웰의 등장은 그녀에게 있어 완전히 상정 외 요소였다. 상대가 엘프였다면 혼자서도 몇백 명이든 도륙 내 줄 자신이 있었지만, 마르크가 상대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방패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자후는 면역이 없는 상대를 잠시간 마비시키는 힘이 있었다. 이드릴의 경우엔 그림자 조작 능력이 일시적으로 못 쓰게 될 정도로 상성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지금 네가 하는 행위는 베네지아에 대한 반역 행위에 해당한다. 이제 넌 장군도 뭣도 아냐!”
“그걸 이제 알았나? 난 이미 장군직 따위 때려치운 지 오래다.”
너무나도 선선히 나오는 대답에 이드릴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베네지아에서 ‘장군’이란, 다른 귀족들보다도 우선시되며 평생의 인생을 보장받을 수 있는 명예로운 직책. 그런데 그걸 스스로 걷어차 버리는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곳에 있었다. 그것도 그녀의 바로 앞에.
“정신 나간 놈……! 하여간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드는 남자야, 넌!”
휘익!
마르크가 방패 낀 팔을 휘두르자 이드릴은 재빠른 스텝으로 그것을 피했다. 이드릴은 반격을 줄이고 철저한 회피 위주의 싸움을 이어 나가는 한편, 마르크의 그림자를 조작했다.
‘지금!’
이드릴이 녹터널을 크게 휘두르자, 마르크의 뒤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심상찮게 일렁거렸다. 직후 크고 작은 예리한 스파이크들이 마르크의 배후와 측면을 노리고 튀어나왔다.
피융!
그 순간, 어딘가에서 날아온 화살이 이드릴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그녀의 인지 범위를 넘어서는 200미터 바깥에서의 장거리 저격이었다.
그러자 그림자 속에서 분신을 조작하고 있던 이드릴의 본체가 강제로 지상에 튀어나왔다. 갑작스러운 해프닝에 이드릴이 주춤거리는 사이, 마르크는 이드릴이 있는 방향으로 돌진했다.
부웅!
너클 낀 주먹을 찔러 넣는 마르크. 뒤늦게서야 반응한 이드릴은 녹터널의 날을 세로로 세워 그의 공격을 막아 냈다. 수 발자국 이상 뒤로 물러난 이드릴은 이를 악물었다.
“옛 버릇을 아직 못 고쳤군.”
마르크가 중얼거렸다.
사람은 반드시 어떤 행동을 취하기에 앞서 준비 동작을 취하게 된다. 이드릴과 몇 번인가 대련해 본 경험이 있는 마르크는, 그녀가 능력을 사용하는 준비 과정중에 짧게나마 빈틈이 생긴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썅!”
이드릴은 욕설을 퍼붓더니 녹터널을 크게 휘둘렀다. 마르크가 다시 움직이려는 것과 동시에, 이번엔 족쇄 형태의 그림자가 튀어나와 그의 두 다리를 봉인했다.
그리고 지면으로는 마르크를 원형으로 둘러싼 그림자가 펼쳐졌다. 괴물의 턱처럼 거대하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그림자의 괴물이, 그를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기세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피융!
그러자 별안간 날아온 화살이 이드릴의 어깨를 두들기면서, 마르크를 구속하던 그림자가 잠시 흔들리고 말았다.
“아악, 빌어먹을 놈이……!”
사실 그녀와 마르크의 실력차는 그닥 크지 않았다. 오히려 마르크의 아티팩트에는 능력 사용에 걸린 조건 떼문에, 상대적으로 이드릴 쪽이 유리한 편이었다. 하지만 엘프들의 조력이 붙으면서 그 단점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적의 품 안으로 깊숙히 들어온 이드릴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마르크의 뒤에는 강력한 저격수가 붙어 있었다.
‘태세를 정비해야…… 이대로 가다간……!’
마르크가 적으로 두기엔 최악의 상대라는 사실이, 싸우면 싸울수록 강하게 체감되었다. 이드릴의 약점과 버릇을 훤히 꿰고 있는 데다, 사실상 그녀의 능력에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아티팩트까지 소유하고 있는 자.
마르크 단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작전이 어긋나 버린 것이다.
‘차라리 이 자리에 그 스테치 아텔리어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있었으면 오히려 더 싸우기 편했을 텐데……!’
본인이 들으면 코웃음 칠 만한 소리를 속으로 주워섬기는 이드릴. 그런 그녀에게 다가오며 마르크가 입을 열었다.
“네놈과 네놈의 병사들 모두, 이 숲에서 생을 마감하게 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