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알프레드의 경우
(165/203)
165화 알프레드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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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알프레드의 경우
2022.03.15.
“햐, 엄청나게 많구먼.”
능선의 바위처럼 꾸며진 엄폐물 뒤에 숨은 채, 계곡 주변을 둘러보던 가렛이 중얼거렸다. 레지아 계곡 아래에는, 어느 새 갑옷을 걸친 병사들로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베네지아의 병사들이다. 그것도 우리 예상치보다 훨씬 많은 숫자야…….”
옆에서 그것을 함께 지켜보던 스카이가 중얼거렸다.
며칠 전.
레지아 계곡에 주둔 중이던 스테치 일행은 수도에 심어 둔 가렛의 부하로부터 편지 하나를 전달받았다.
편지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베네지아가 잠잠해진 북부 전선으로부터 병사들을 물리는 중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수도에 남아 있던 기존 병력이 둘로 나뉘어져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향했다는 것이었다.
“서쪽은 몰라도 최소한 동쪽으로 갔다던 병사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이제 자알~ 알겠군.”
“뭘 노리고 온 걸까?”
“그걸 몰라서 묻냐? 흉악 현상 수배범인 스테치 아텔리어를 잡으러 납신 게 뻔하잖냐.”
스카이가 가렛에게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가렛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테치의 말에 의하면, 베네지아의 미래시 아티팩트는 확정된 미래 중에서도 극히 일부분만을 보여 준다고 한다. 그렇다면 상대는 이 장소에서 스테치와의 싸움이 벌어질 것을 확신하고 왔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정작 스테치가 이곳에서 베네지아 군대와 일전을 벌일지는 아직 확정된 사안이 아니었다. 막말로 지금 그가 여기서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길을 택하면, 미래시의 내용과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이 오류는 뭐지?
스테치 아텔리어가 반드시 이곳에서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어딘가에서 곧 나타난다는 뜻일까?
‘나도 내가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저것 좀 봐.”
머릿속이 복잡해진 가렛은 고개를 휘휘 젓는 사이, 스카이가 스테치에게 스파이 글래스를 넘기며 말했다. 계곡을 향해 진격 중인 병사 무리의 후미 쪽에는, 마법포를 끌고 오는 병사와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스테치는 가렛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 저번에 계곡의 주요 시설에 디스펠륨 철판 깔아 뒀다고 그랬지? 그게 마법포의 포격을 막아 낼 수도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스테치와 함께 스파이 글래스를 들여다보던 스카이가 대신 대꾸했다.
“순수한 마력탄이라면 모를까, 만약 저쪽에서 순수한 금속 탄자를 쓴다면 디스펠륨으로는 막아 낼 수 없어.”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쓸모없다는 소리로 알아들을게.”
그 말에 가렛은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기껏 거금을 들여서 대(對)마법용 방어책을 준비해 놨건만,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말을 들으니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지휘관은 누구지?”
“잠시만…….”
혓바닥을 빼물고 병사들의 선두에 누가 서 있는지를 살펴보던 가렛은, 풍채 훤한 금발의 남성 하나가 말을 탄 채 앞장서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얼굴. 가렛이 눈을 비비적거리는 모습을 본 스테치가 물었다.
“왜, 누군데?”
“저 녀석은 둘째 왕자인 알프레드 메서야. 근데 왜 이런 곳에 와 있는 거지?”
가렛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알프레드는 일평생을 책상 앞에서 살아온 행정 관료에 지나지 않았다.
이드릴 헨리에타라는 훌륭한 대체재가 있건만, 왜 저런 비실비실한 놈이 전장에 튀어나온단 말인가?
“스테치.”
갑자기 불쑥 나타난 프레야가 말을 걸어오자, 스테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은 아래쪽에서 착실히 계곡을 향해 접근해 오는 병사들 무리에게로 꽂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알프레드 메서에게로.
“검은 아티팩트다.”
* * *
“…….”
알프레드는 초조하게 말을 몰고 있었다.
병사들 사이에서 후끈하게 올라오는 열기, 심심하면 똥오줌을 갈겨 대는 군마들. 하나같이 왕성에 있었더라면 겪지 않았을 고생들이었다.
“괜찮으십니까?”
현장에서 누군가를 지휘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그를 위해, 함께 따라나선 발스톡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멀미로 울렁거리는 속을 간신히 다스린 알프레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괜찮다.”
아니,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려서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으니까.
‘만약, 만약 스테치 아텔리어가 정말 이곳에 있다면…….’
미래시는 끝끝내 발동하지 않았고, 결국 스테치 아텔리어의 정확한 위치는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알프레드는 순수한 추론을 통해 스테치가 숨어 있을 거라 예상되는 장소를 두 곳으로 추려내는 데에 성공했다.
바로 어둠의 숲과, 레지아 계곡.
각각의 장소들이 지목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베네지아 왕국에 저항할 세력을 키우기 용이하면서, 은신하기 편한 곳.
둘째, 베네지아가 이제껏 단 한 번도 본격적으로 수색해 보지 않은 미지의 장소.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어둠의 숲은 서쪽, 레지아 계곡은 동쪽으로 서로 정반대 쪽에 위치해 있다는 것.
양쪽 모두를 수색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데다, 대규모 병력의 작전 행동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 혹여 스테치 아텔리어가 없는 곳을 먼저 급습했다가, 그가 도망가기라도 한다면 찾을 길이 요원해지고 만다.
상대가 도망갈 틈을 않으려면 숲과 계곡, 두 군데를 동시에 급습해야 한다는 것이 알프레드의 생각이었다.
“……님. 알프레드 왕자님!”
발스톡의 부름을 들은 알프레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 있는 병사 모두가 목숨이 다해서 왕자님을 지킬 겁니다. 그저, 너무 앞서 나가지만 말아 주십시오.”
“알겠다.”
알프레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성을 떠나기 전, 왕이 하사해 준 새로운 아티팩트. 지하에 잠들어 있던 검은 구체들 중 하나를 조정하여 만들어 낸 추적 장치로, 엘프들의 고대 유물을 착용하고 있을 스테치가 근처에 있을 시 반응하도록 되어 있었다.
우웅-.
아니나 다를까, 손에 쥔 목걸이에서 불길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는 여기에 있다.
“마법포를 준비시켜라.”
“예!”
이미 부대와 마법포를 끌고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대의 이목을 끌었을 터. 더 늦기 전에 자리를 잡고 기습에 대비해 둘 필요가 있었다.
잠시 후. 포대를 지면에 단단히 고정시킨 것을 확인한 그는 발사 명령을 내렸다.
“발사!”
우우웅-!
마법사들로부터 마력을 흡수한 마법포는, 곧이어 포구에서 푸른 불꽃과 함께 거대한 마력 에너지탄을 토해 냈다. 기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마력탄은 그대로 계곡 능선에 적중하면서 무시무시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과광!
무너져 내린 절벽 일부가 땅에 떨어지면서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고작 1문으로 저런 파괴력이라니?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병사들은 신형 마법포의 절륜한 위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멈추지 마라! 포격을 계속해라!”
알프레드의 지시가 떨어지자 2차 포격이 이어졌다. 이미 스테치 아텔리어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으니, 이제는 그가 알아서 튀어나올 때까지 죽도록 두들기는 일만 남았다.
“우와아악! 어떻게 된 거야!”
콰광!
쏟아지는 폭격 속에서 가렛이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은신은 완벽했건만, 어째서인지 상대는 그들이 숨어 있던 위치로 정확하게 포격을 가해 오기 시작했다. 적을 계곡 내부로 깊숙이 끌어들여 포위하려는 작전은 이제 물 건너간 셈이었다.
“가렛! 부하들을 이 구역에서 빼! 이러다간 전부 개죽음이다!”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이 상태로는 한 발짝도 못 움직여!”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였다간 마력탄에 맞아 온몸이 터져 나갈 것이다. 그러자 스카이와 가렛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테치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미친놈아, 죽고 싶어 환장했어?! 빨리 머리 숙여!”
“저쪽이 저렇게 나오는데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잖냐?”
그렇게 중얼거린 스테치는 움켜쥔 손아귀 안에서 번뜩이던 뇌정(雷霆)을, 마법포가 있는 쪽으로 풀어놓았다.
“《서지》!”
그 순간, 앵커를 박아 두었던 마법포 하나가 박살 났다. 워낙 갑작스럽게 터진 일이라 모두가 허둥거리는 사이, 포격을 맞았던 능선 쪽에서 인영 하나가 튀어나왔다.
“으아아아아아!”
《라이트닝 스피드》와 싱크로의 영향으로 한 줄기 벼락처럼 변한 스테치가, 계곡 아래의 알프레드가 있는 쪽을 향해 절벽에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저, 저 바보가!”
가렛과 스카이는 기겁하여 스테치를 내려다보았다. 계속되는 포격을 막고 시선을 끌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다짜고짜 병사들 무리 한가운데로 돌진이라니?
“이봐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가렛과 스카이가 고개를 돌려 보니, 커다란 무언가를 들어 올리느라 낑낑대고 있는 엘레나가 보였다.
가렛이 엘레나에게 넘겨주었던, 용병 대장 가로드의 포격용 아티팩트 ‘스피라투스’. 평소엔 화살 사이즈의 탄자를 만들어 내느라 작아져 있던 아티팩트가, 지금은 대포 같은 탄을 만들어 내기 위해 커져 있었다.
“좀 도와주실래요? 이 상태로는 저 혼자선 못 쓰거든요.”
“……그런가. 저게 있다면 이쪽도 적한테 한 방 먹일 수 있겠어!”
탄성을 내지른 가렛이 스카이에게 말했다.
“신호탄 쏴! 어차피 들킨 거 우리도 반격한다!”
스카이가 팔목에 달린 장치를 작동시키자, 사출구에서 튀어나온 섬광탄이 하늘 높이 날아올라 반짝였다.
그사이 가렛은 엘레나와 함께 스피라투스를 붙잡고선 아래쪽으로 포신을 겨누었다.
투쾅!
포구에서 발사된 탄환이 병사들을 휩쓸고 날아갔다. 물론 그 위력에 걸맞게 반동도 장난이 아니라서, 어깨로 포신을 받치고 있던 가렛은 팔 전체가 저릿거릴 지경이었다.
이딴 괴물 같은 무기를 한 손으로 들고 마구 쏴 재낀 가로드가 새삼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쏩시다!”
“예!”
스테치가 휘젓고 다니느라 포격이 뜸해진 틈을 타, 가렛과 스카이는 엘레나를 도와 적 진영으로 무차별 포격을 가했다. 기껏해야 화살이나 자잘한 마법이 날아올 것을 기대했던 병사들은, 생각지도 못한 적의 공격에 당황한 나머지 우왕좌왕했다.
“크헉!”
앞길을 가로막는 병사 하나를 막 베어 넘긴 스테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알프레드를 노려보았다. 실용성이 의심되는 화려한 갑옷을 걸친 채 말 고삐를 쥐고 있던 그는, 스테치와 눈이 마주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