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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화 개미가 싸우는 방식 (166/203)


166화 개미가 싸우는 방식
2022.03.16.


스테치를 눈앞에 둔 알프레드는 고조되어 가는 긴장감으로 인해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흉악 수배범이라는 악명과 다르게 꽤나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가 지금껏 왕국 내에서 저질러 온 행위들을 생각해 보면 절대 방심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대가 스테치 아텔리어인가?”

스테치는 알프레드의 질문에 대한 답변 대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눈앞에 적의 수장이 있는데, 한가하게 잡담이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어?”

앞으로 내달렸던 스테치는 뭔가 이상을 감지하고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알프레드와의 거리는 고작 5~7미터 정도에 불과했는데, 어째서인지 아무리 달려 봐도 그와 스테치 사이의 간격은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소용없다.”

알프레드는 한 손에 움켜쥐고 있던 지팡이 형태의 아티팩트를 들어 올렸다.

‘무슨 술수를 벌였길래…….’

마치 좁은 방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알프레드의 목소리는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현상에 초조해하던 스테치가 프레야에게 물었다.

‘이게 대체 뭐야?’

『공간이 뒤틀려져 있어.』

어느 방향으로 이동해 보아도, 알프레드가 보는 앞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스테치는 시험 삼아 《에어 불렛》을 쏴 보았지만, 주문은 그대로 자신에게 되돌아올 뿐이었다.

프레야는 진심으로 당황했는지 중얼거렸다.

『이거 한 방 먹었군. 설마 아티팩트로 이런 짓까지 가능할 줄 누가 알았겠어? 미안하지만 함정에 빠진 것 같다.』

한편, 스테치를 쳐다보던 알프레드의 얼굴에는 방금 전까지와 달리 희미하게나마 승리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조금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성공했어!’

그의 아티팩트가 가진 능력은 공간 왜곡. 한정된 거리, 한정된 영역 내부의 공간을 퍼즐처럼 꼬아 둘 수 있으며, 한번 그 안에 갇힌 자는 빠져나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굳이 지형이 좋지 않은 계곡까지 대포를 끌고 와 포격을 쏟아부은 것은, 다름 아닌 스테치 아텔리어를 능력이 닿는 거리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꾸민 계략이었다.

알프레드가 손짓하자, 이를 알아본 발스톡이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법사 부대, 앞으로!”

한창 병사들과 가렛 일당이 포격과 화살을 주고받으며 싸우느라 바쁠 때, 뒤쪽에 서 있던 마법사들이 알프레드의 주변으로 걸어 나왔다.

“《포스 월》!”

알프레드의 주변으로 반구형의 투명한 보호 장벽이 씌워졌다. 이것으로 주변에서 눈먼 포탄이 날아오거나 기습이 들어와도, 아무런 방해 없이 계획을 진행할 수 있었다.

“젠장! 쟤 저기서 대체 뭐 하는 거야?!”

사격을 스카이와 엘레나에게 맡긴 채, 스파이 글래스로 병사들의 동향과 스테치를 살펴보던 가렛이 소리를 질렀다.

만약 스테치가 직접 뛰쳐나가지 않았더라면 적들의 집중포화를 맞고 전부 죽었으리라. 다행히 그가 나서 준 덕분에 시선이 분산되고 한숨 돌릴 수 있었지만, 그는 어째서인지 둘째 왕자와 대치한 채로 꿈쩍도 안 하고 있었다.

“뭔가 일이 터진 게 틀림없어요. 우리가 도와주러 가야…… 큭!”

콰광!

엘레나는 바로 옆에서 수 미터 높이 이상의 불기둥이 치솟자 깜짝 놀라 머리를 숙였다. 어깨로 스피라투스의 포신을 떠받치고 있던 스카이가 거의 씹어뱉듯이 소리쳤다.

“지금 우리한테 그럴 여유가 있어 보여?! 가렛, 순간이동은?”

“거리가 너무 멀어!”

콰과광!

잠깐 뜸해졌던 적의 포격이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연사력은 엘레나의 아티팩트인 스피라투스 쪽이 훨씬 뛰어났지만, 그래 봤자 고작 1문에 불과했다. 다수의 마법포를 상대로 하기엔 살짝 버거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한편, 알프레드는 뒤쪽에 서 있던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스테치가 서 있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

스테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위기를 직감한 프레야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커스드 아머!』

퍼버벙!

반투명한 사기의 갑옷이 스테치의 전신을 덮는 순간, 오색찬란한 주문들이 그에게로 퍼부어졌다. 상하전후좌우. 공간 왜곡의 도움을 받아 형성된, 그야말로 도저히 빈틈이 보이지 않는 전방위 공격이었다.

스테치는 시야가 하얗게 물들 정도로 강렬한 빛에 놀라 뒤로 주춤거렸지만, 충격으로 몸이 좀 흔들리기만 할 뿐,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굉장하네.”

죽다 못해 아예 증발해 버릴 거라 생각한 스테치가 꿋꿋이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을 본 알프레드는, 한 손으로 불덩이를 쏘아 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설마 베네지아 정예 마법사들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 내고도 무사할 줄이야.

‘뭐, 처음부터 쉬운 일이 될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어.’

자신이 몸을 쓰는 일에 영 재능이 없다는 것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체력도 낮고, 그나마 쓸 수 있는 마법조차도 실력은 그냥저냥이었다. 그런 그가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타고난 머리밖에 없었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네놈을 천천히 갉아먹어 주겠다.’

잠시 후 마법 공격이 멈추자,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던 스테치가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마력을 전부 소모한 알프레드와 마법사들이, 마력 회복제를 까서 입 안에 털어 넣는 걸 보곤 이를 악물었다.

비록 이렇다 할 대미지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커스드 아머가 무적을 자랑하는 방어구인 것도 아니다. 이렇게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에서 계속 적의 공격을 모조리 받아 주다간, 죽는 것도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퍼버벙!

다시 시작된 공격을 남김없이 모조리 맞아 가며, 스테치는 한층 다급해진 목소리로 프레야에게 물었다.

‘어빌리티 시저는?’

알프레드 옆에 있는 마법사 한 명이라도 조종할 수만 있다면, 이 싸움은 이미 이긴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대답은 절망적이기 그지없었다.

『……썅, 안 돼. 역장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가 없어!』

이건 정말이지 최악의 상황이다. 최소한 동료들에게 현재 상황을 전달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지금 이 안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잔꾀만 많아 가지고……. 응?”

알프레드를 노려보던 스테치는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기운을 느끼고는 시선을 떨구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할로우 블레이드가,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라?”

스테치의 반응에 프레야가 말했다.

『아까부터 왕자 놈이 가진 검은 아티팩트에 반응하고 있어. 하지만 지금 상황을 벗어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이진 않는데.』

그러나 스테치의 생각은 달랐다.

* * *

절거덕!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포탄을 쏘아 대던 스피라투스의 포구가, 갑자기 쇳소리와 함께 먼지만 뱉어 대기 시작했다. 스피라투스의 발사각을 조절해 주던 스카이는 당황하여 물었다.

“뭐야, 이거 갑자기 왜 이래?”

“탄이 다 떨어졌어요! 포구에 흙이든 뭐든 아무거나 집어넣어 봐요!”

가렛은 스카이를 도와 스피라투스의 용머리로 장식된 포구 안에 흙과 돌덩이를 퍼다 밀어 넣었다. 그러자 스피라투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동그란 형태의 탄자를 생성했다.

“……으윽!”

이어서 방아쇠를 당겨 대던 엘레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갑자기 무게 중심이 흔들린 스카이는 비틀거리다가 옆으로 쓰러졌고, 근처의 다른 부하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가며 지시를 내리던 가렛은 깜짝 놀라 외쳤다.

“어이! 무슨 일이요, 아가씨!”

“잠깐…… 어지러워서.”

엘레나가 헐떡였다. 하지만 그게 보통 증상이 아님을 가렛만큼은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아티팩트는 사용자의 마력이 아닌 기력을 소모시킨다. 엘레나는 짧은 시간 안에 스피라투스를 과용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었다.

“조심해!”

그때, 스카이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가렛과 엘레나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깔끔한 궤도를 그리며 날아온 마법포의 복합탄이 정확히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야단났네, 진짜. 다들 숨 참아!”

혀를 찬 가렛이 왼팔을 크게 휘두르자, 팔 한 짝 가릴 만한 사이즈에 불과했던 타른카페가 천막처럼 커지면서 스카이와 엘레나를 뒤덮었다. 엘레나는 영문을 몰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고, 스카이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나, 또 이거야?”

콰광!

포탄은 방금 전까지 그들이 있던 장소에 정확히 직격했다. 파편과 모래 먼지가 비산하는 가운데, 다른 차원으로 몸을 숨기고 있던 세 사람이 움푹 파인 크레이터 한가운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콜록-, 콜록!”

“우웨에에엑!”

엘레나는 연신 기침을, 스카이는 토악질을 해 댔다.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 감각이다. 가렛이 황급히 엘레나에게 다가가 등을 두들겨 주는 모습을 본 스카이는 입가를 훔치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X발, 속 시커먼 새끼 같으니. 야! 이쪽도 힘들어 죽겠는데 대놓고 여자만 챙기는 건 무슨 심보냐?”

“헛소리 그만해. 이 아가씨가 지금 느끼는 고통은 너 정도에 비할 바가 아니란 말이야. 이러다 잘못하면 진짜 죽어!”

가렛은 엘레나에게 약병을 건넸다. 약초를 으깨고 달여 만든 기력 회복용 강장제였다.

“마셔요. 없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엘레나가 약물을 전부 들이켜는지 확인한 가렛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바닥에 앉아 있던 스카이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빈둥거리지 말고 일어나. 마침 좋은 수가 생각났어.”

“뭐든 말해 봐라. 지금 같은 상황에선 뭘 해도 안 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저번에 네가 만들겠다던 그거, 준비됐어?”

“뭐…… 아, 액체 폭탄? 진작에 끝났지. 근데 그건 애초에 취미용으로 만들던 거라 지금 없는데? 아지트 작업실에 처박혀 있을걸.”

포탄이 유성처럼 머리 위를 지나쳐 가는 와중에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엘레나는 어쩐지 웃긴다는 생각을 하며 텅 빈 약병을 내려놓았다.

가렛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그럼 잠깐 좀 갔다 올게. 어쩌면 그 폭탄이 이 압도적인 전력 차를 타파해 줄 유일한 방법일지도 몰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 둘이서 어떻게든 버티고 있어.”

“그걸로 어쩌게? 여기서 던지려고?”

스카이가 신랄한 어투로 물었다.

“멍청아,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그 액체 폭탄은 어쭙잖게 화살 같은 것에 발라서 쏜다고 될 물건이 아냐. 4리터 정도 되는 분량을 한꺼번에 때려 박아야 하는데, 케이싱은 어떻게 하고 날려 보내는 건 또 어쩌게?”

“글쎄.”

가렛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턱짓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스카이는, 엘레나의 옆에 떨어져 있는 스피라투스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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