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 (168/203)


168화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
2022.03.18.


베네지아 정예 병사 2만과, 스테치 아텔리어를 필두로 내세운 가렛 의적단 200여 명. 레지아 계곡에서 벌어진 양측 간의 싸움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한 패배를 기록하며 막을 내리고 말았다.

고작 두 자릿수에 해당하는 소수의 베네지아 병사들만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들 모두가 살아 있는 지휘관을 버리고 도망친 비겁한 자들이었지만, 또한 동시에 가장 현명한 자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너만 남았군.”

할로우 블레이드에 묻은 피를 닦아 내던 스테치가 입을 열었다.

주위에 쌓인 것은 시체들의 산. 알프레드와 함께 병사들을 지휘하던 발스톡은 무릎이 꿇린 상태로, 자결조차 할 수 없도록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다. 주위에는 마치 재판의 참관인이라도 된 마냥, 스카이와 가렛이 빙 둘러서 있었다.

알프레드의 몸은 이미 발스톡의 옆에 쓰러져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사건의 발단이나 다름없는 동생이 아닌, 자신을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은 아버지를 원망했다.

별다른 악감정이 없는 상대였기에, 스테치는 그에게 최대한 깔끔하고 고통 없는 죽음을 선사해 주었다.

하지만 발스톡만큼은 달랐다.

“너만큼은 꼭 산 채로 잡아 두고 싶었다.”

스테치는 발스톡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푸욱-.

마치 푸딩처럼 부드럽게 발스톡의 가슴팍으로 파고 들어가는 할로우 블레이드. 검이 박혀 들어간 자리에서 가느다란 핏줄기 하나가 흘러내리고, 발스톡은 고통으로 몸부림치더니 이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래야 네놈이 어떤 표정으로 죽어 가는지를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으니까, 이 개XX야.”

스테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죽어 가던 그를, 제라드와 함께 아무런 감정조차 담기지 않은 눈으로 내려다보던 발스톡.

그런 그가 지금은 자신을 핏발 선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절망과 고통을 담아.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마.”

* * *

“스테치 아텔리어에게, 건배!”

가렛 의적단의 아지트. 스카이와 가렛, 그리고 그들의 부하들은 오래간만에 축배를 들었다.

베네지아의 정예 부대를 쓸어버린 것도 모자라, 그들을 지휘하던 셋째 왕자의 부관과 둘째 왕자를 처치했으니 그야말로 대승리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모두가 떠들썩하게 안주로 내놓은 돼지 통구이와 맥주를 즐기는 동안, 스카이는 이번 싸움의 주역을 찾아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스테치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자식 어디로 사라진 거야?”

결국 아지트 바깥까지 걸어 나간 그는, 엘레나와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잔을 기울이던 스테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스윽.

프레야가 앞을 가로막아 서자, 스카이는 두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비켜.”

“아서라. 네 친구는 마눌 님이랑 이야기 중이니까.”

“뭐야? 저 둘이 결혼했어?”

스카이가 깜짝 놀라 묻자, 프레야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했다.

“아직은 아닌데, 언젠간 하지 않겠냐?”

“…….”

스카이는 피식피식 웃으며 돌아가 버렸다.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는 프레야에게 똑같이 따봉을 날린 스테치는, 엘레나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여하튼, 오늘은 속이 다 시원하더라고.”

“이걸로 일보 전진이네요.”

엘레나가 말했다.

베네지아의 주력 부대들 중 하나를 박살 내고 둘째 왕자까지 죽이는 쾌거를 달성하긴 했지만, 왕가가 북부 전선에 주둔 중이던 병력을 모두 수도로 귀환시키는 바람에 당장 왕성을 치러 가는 건 무리였다.

비록 셋째 왕자를 죽이겠다는 그의 목표는 한층 요원해진 셈이었지만, 그래도 스테치는 그럭저럭 만족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럼, 갔다 올게.”

잔을 전부 비운 스테치는, 엘레나와 헤어진 뒤 프레야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바닥 한가운데에는 다름 아닌 알프레드의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프레야가 그 위로 손을 올려놓자, 시종일관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던 목걸이는 순식간에 검은 구체로 모습을 뒤바꾸었다. 두 사람이 자주 봐 온, 검은 아티팩트의 진짜 형태였다.

“준비됐어?”

“그래. 얼른 해치우자.”

애초에 베네지아의 왕자인 알프레드가 왜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의문이었다. 북부 케일럼 왕국의 엘프 의장인 시무스는, 베네지아가 본디 아치발의 신자들과 적대 관계라고 했다. 그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

“커스 이팅.”

슈오오-!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 구체가 액체처럼 녹아내리더니, 프레야와 스테치의 주변을 휘감았다.

그러나 또 다른 머나먼 과거의 흔적을 엿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두 사람의 기대와 달리, 검은 아티팩트를 흡수한 그들이 본 것은 다름 아닌 알프레드의 기억이었다.

‘뭐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알프레드라고 하는 놈의 기억 일부가 아티팩트에 스며들었나 봐. 곧 끝날 거야.』

정체불명의 지하실과, 그 안에 안배되어 있는 검은 아티팩트들. 그리고 두 왕자에게 들려주는 역사의 진실.

모든 것을 보고 들은 스테치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베네지아의 왕인 신체루스의 입에서 나오는 역사란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일부는 스테치가 알고 있는 사실과 전혀 달랐다.

‘……베네지아 왕은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지?’

검은 아티팩트는 엘프들이 만든 결전 병기도 아니었고, 메멘토 모템은 그중 하나도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어디 방 한구석에 처박혀서 골골대고 있을 줄 알았던 제라드 메서가, 알프레드와 베네지아의 왕 사이에 껴서 멀쩡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 나타난 것이었다. 심지어 기껏 날려 버렸던 오른팔은 웬 의수로 대체된 상황. 그것을 본 스테치는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끈질긴 새끼. 그때 죽여 버렸어야 하는 건데.’

스테치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시야가 밝게 물들었다.

어둡고 칙칙하던 지하실에서 벗어난 스테치는, 어느새 밝은 햇빛이 아름드리 내리쬐는 숲속에 있었다. 거대한 나무 하나를 중심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엘프들이 무언가, 아니 누군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신인, 데스트라를.

“……이제 정말 끝이 온 것 같아.”

데스트라는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댄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그녀의 모습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엘프들에게서 탄식과 울음소리가 잇따라 터져 나왔다.

마지막까지 모루를 두들기다 사라져간 엑스턴과, 인간들과 부대끼며 지내다가 행방이 묘연해진 카인.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태어난 그들이, 삶을 마감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라는 점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기나긴 삶을 회상하느라 잠시 눈을 감은 데스트라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엘프들의 시선을 눈치채고선 피식 웃었다.

“모두들, 그렇게 슬퍼하지 말거라. 이것은 죽음이 아니다. 그저 힘이 다해서 육신이 먼지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위로의 말. 엘프들은 행여나 자신들이 흐느끼는 소리에 그녀의 목소리가 묻힐까 두려워, 억지로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저희는…….”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고개를 돌린 데스트라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청년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 말은 모든 엘프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한마디였다. 부모의 품을 막 떠나는 자식처럼, 그들 모두가 데스트라와 함께 하지 못할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품고 있었다.

“엘나릴 폰드 드레이노어.”

데스트라는 청년의 이름을 직접 호명했다.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애정이 깊은 탓인지, 그녀는 모든 엘프들의 이름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두 종족을 보렴. 자신들의 신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멀쩡히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내 부재가 곧 종족 전체의 어두운 앞날을 의미하는 건 아니란다.”

“하지만…….”

“겁먹을 필요 없다. 나는 너희들을 그렇게 힘없고 나약한 종족으로 빚어내지 않았어.”

어머니처럼 조곤조곤 타이르는 데스트라. 그러나 시야가 곧 흐려지는지, 그녀는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힘겹게 떠 가며 말을 이어 나갔다.

“비록 내가 없어지더라도…… 남겨 둔 희망은 언제까지나 너희들 곁을 함께할 거야.”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파앗-.

말을 마친 데스트라의 전신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던 엘프들은 저마다 고개를 돌리거나 팔을 들어 앞을 가렸다.

잠시 후 빛이 멎어 갈 무렵. 데스트라가 있던 자리에는 한 줌 정도 되는 재 가루가 쌓여 있었다.

“여신이시여!”

숲이 떠나 갈 정도로 큰 울음소리였다. 어느 누구의 장례식도 이보다 슬프고 장엄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가장 가까이에서 데스트라의 마지막을 보고, 말까지 나눴던 엘나릴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

그는 재 가루 틈새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한쪽 손을 들어 가루를 천천히 훑어 낸 뒤 아래 파묻혀 있던 것을 들어 올렸다.

살아생전 데스트라의 머리카락처럼 맑고 푸른 빛을 띤, 마름모꼴 형태의 보석이었다. 보석을 집어 낸 엘나릴은, 다른 엘프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서며 외쳤다.

“모두들, 들어 주십시오!”

힘 있는 목소리에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엘프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엘나릴은, 좌중이 조금 진정한 듯 보이자 그제야 말을 꺼냈다.

“우리는 나약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 건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그분의 기대에 보답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보석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분의 유언대로, 그분이 남기신 희망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할 겁니다.”

엘나릴은 목에 걸고 있던 동그란 로켓을 풀어 내린 뒤, 그 안에 보석을 담아 뚜껑을 닫았다.

* * *

검은 아티팩트를 흡수하고 30분이 지나고, 바닥에 앉아 있던 스테치와 프레야가 동시에 눈을 떴다.

처음 의식이 되돌아온 스테치가 막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이유 모를 슬픔과 허탈함이었다. 사랑하는 이들의 앞에서 눈을 감은 데스트라의 모습은, 정작 그녀와 일면식도 없는 스테치조차 먹먹하게 만들 정도였다.

유일하게 스테치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바로 이름이었다.

“이번 꿈에서는 그다지 새로운 정보가 없었네. 그나저나 드레이노어라니…… 그 성을 가진 사람이 그 시절에도 있었다니, 깜짝 놀랐잖아.”

이제 보니 엘레나는 아주 유서 깊은 집안의 후손이었던 셈이다.

혼자서 떠벌이던 스테치는 나중에서야 프레야가 묵묵부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테치가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녀는 무언가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야, 왜 그래? 괜찮아?”

스테치가 어깨를 붙잡고 흔들자, 프레야는 그런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 아직 눈치 못 챈 거야?”

“뭘?”

스테치의 반응을 들은 프레야는 벌떡 일어나서 방을 나가 버렸다. 홀로 남게 된 스테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뒤늦게나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프레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디로 간 거야?’

거나하게 취해 복도에서 비틀대던 몇몇 이들에게 물어 가며 프레야를 쫓아간 스테치는, 아지트 바깥에서 들려오는 엘레나와 프레야의 목소리를 들었다.

“미안하다.”

“뭐 하는 거예요!”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다급히 아지트 바깥으로 튀어 나간 스테치의 시야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프레야를 쳐다보는 엘레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콰그락!

프레야가 손에 힘을 주자,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무언가가 박살 났다. 엘레나는 큰 충격을 받고 넋을 잃었는지, 목 언저리를 매만지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무, 무슨 짓을……?”

“……역시.”

프레야는 스테치와 엘레나가 보는 앞에서 손아귀를 벌려 보였다.

조각조각 박살 난 엘프 유물 목걸이의 파편들, 그리고 흠집 하나 없는 푸른 빛의 보석 하나가 프레야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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