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재래
(169/203)
169화 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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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재래
2022.03.19.
모두가 잠든 늦은 시각.
스테치와 프레야, 그리고 엘레나는 흔들거리는 등불 밑에 모여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귀중한 유물 목걸이를 박살 낸 프레야에게 미친 듯이 화를 냈던 엘레나였지만, 스테치는 애써 그녀를 달래며 그가 보았던 꿈의 내용을 들려주었다.
데스트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엘레나의 표정은 다채롭게 변화했다. 처음엔 미심쩍어하다가, 그다음엔 눈시울을 붉히더니, 나중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마지막으로 데스트라의 재 가루에서 건져 낸 보석 이야기에 이르자, 그녀는 말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푸른 보석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알았죠?”
“뭘?”
“유물 목걸이 안에 이런 게 들어 있을 줄 어떻게 알았냐고요.”
“드레이노어, 그리고 목걸이 형태의 물건. 여기까지 봤는데 눈치 못 챌 리가 없잖아?”
“하지만 보통 사람은 그걸 봐도 이런…… 이런 낡은 유물을 떠올리진 못 한다고요.”
엘레나의 말을 들은 프레야는 손가락으로 보석을 감싸고 있었던 유물 파편을 손가락으로 굴려 대며 말했다.
“이건 그저 평범한 로켓이었어. 하지만 아무도 함부로 안을 들여다볼 생각을 안 하니까……. 경첩에 먼지가 껴서 열 수 없게 되고, 곧이어 색까지 바래면서 돌멩이처럼 굳어 버린 거야. 점점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이게 소중한 물건이라는 인식만이 남게 되고, 정작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잊고 만 거지.”
프레야의 설명을 들은 엘레나는 보석을 조심스럽게 만져 보았다.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듯한 푸른 빛에 엘레나는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더니 물었다.
“그럼 이 보석의 정체는 뭐죠? 여신께서 남겨 주신 물건임에는 확실한데…….”
“그건 데스트라의 코어다.”
“코어?”
“그래. 그야말로 여신을 품은 알이지.”
의미불명의 말을 중얼거린 그녀는 데스트라의 코어를 집어 들며 스테치에게 물었다.
“여신이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해?”
‘이것은 죽음이 아니다. 그저 힘이 다해서 육신이 먼지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어.”
“얼핏 들어 보면 그냥 엘프들 달래 주려고 좋은 말 해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처음부터 끝까지 여신은 사실을 말하고 있었어.”
그 말을 들은 스테치는 데스트라의 말을 그대로 곱씹어 보았다.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녀의 정수를 담은 코어는 이렇게 버젓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다시 깨어날 수도 있다는 소리야? 엘프들의 여신이?”
그 말을 들은 엘레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프레야와 스테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기야 창조주가 부활한다는 소리를 갑자기 들어 봤자, 별로 와닿지 않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맞아. 코어가 있는 이상,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
스테치는 천천히 의자의 등받이로 몸을 기대고 의자를 기울였다.
“이건…… 정말이지 생각도 못 했는데.”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스테치는 그저 승리에 대한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신을 부활시키네 마네 하고 있다니, 도저히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
한참을 말없이 무언가를 고민하던 스테치는, 힘겹게 입을 열어 프레야에게 물었다.
“이건 그냥 순수한 가정인데, 여신을 다시 일깨우려면 뭐가 필요하지?”
쿠당탕!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엘레나의 뒤로 쓰러진 의자가 나뒹굴었다.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조차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엘레나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 하실 생각이세요?”
“가정이라고 했잖아.”
말은 그랬지만, 엘레나의 귀에는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시도해 볼 용의가 있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사실, 그녀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처음엔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 보니까 죄다 연결되어 있어. 세 종족의 신을 만든 절대자. 검은 아티팩트. 그리고 베네지아의 왕. 그냥 넘어가기엔 꺼림칙스러운 무언가가 뒤에서 벌어지고 있단 말야.”
스테치가 말했다.
“신을 부활시킬 수만 있다면…… 이 모든 문제들이 전부 해결돼. 난 그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준비해 두고 싶을 뿐이야.”
그는 프레야에게 물었다.
“그래서, 뭔가 생각해 둔 거라도 있어?”
“없진 않지.”
프레야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여신 데스트라는 마지막 순간에 한 줌 재만 남기고 빛과 함께 소멸했어. 사람과는 달리 몸이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야. 즉-”
“마력이구나.”
스테치는 프레야의 말을 대신 마무리 지었다. 데스트라가 소멸하면서 발한 것은 밝은 황금빛, 그러니까 고순도의 마력이었다.
“음. 아마도 데스트라를 부활시키는 데에 필요한 재료는 마력이야. 그런데…….”
프레야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방금 전까지 코어 내부를 계속 살펴보고 있었거든? 이 안에는 데스트라의 의식, 그리고 몸을 만들어 내기 위한 고도의 마법 회로가 삽입되어 있어. 마력을 흘려보내기만 하면 코어가 자동적으로 데스트라의 재생 작업을 시작하겠지. 다행히도 그녀의 의식 자체는 깨우고 유지시키는 데에 필요한 마력 자체는 많지 않아 보여.”
“……하지만?”
“하지만 의식을 정착시킬 ‘몸’에는 너무나도 많은 마력이 들어가.”
“대체 얼마나 필요한데?”
“엄청나게. 많이. 그것도 실시간으로.”
스테치는 끙- 하고 낮게 신음했다. 일이 쉽게 해결되리란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지만, 시작부터 해결해야 될 장애물이 너무 컸다. 프레야의 말대로라면 데스트라는 부활해서 첫 숨을 들이쉬기도 전에 다시 소멸하고 말 것이다.
“신의 육체니까. 본래의 능력과 힘을 다룰 수 있는 몸을 유지하려면 그만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거지.”
스테치는 메멘토 모템이 끼워진 손을 프레야의 앞에서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반지 안에 저장된 마력을 전부 쓰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5초? 10초? 따지는 게 의미 없는 수준이야.”
“……해결책을 강구해 봐야겠다.”
스테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물론 신을 되살리는 것이 필수 사항은 아니므로,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법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 * *
며칠 뒤. 스테치는 가렛과 스카이를 방 안으로 불러들였다.
“중요한 일이라는 게 뭐지?”
“시답잖은 일이면 난 가 본다. 해 봐야 될 실험이 남아 있어.”
스카이의 말을 들은 가렛이 빽 소리를 질렀다.
“이 폭탄마 새끼! 너 한동안 여기서 뭐 만드는 거 금지야! 네가 뻑 하면 폭발물 만지작거리는 바람에 내가 불안해서 잠을 못 자겠어!”
“남이사 뭘 만들든 무슨 상관? 만들어 두면 또 요긴하게 써먹을 거면서 말이 많아.”
스테치는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는 두 사람 사이에 손을 끼우고 갈라놓았다.
“미안. 근데 지금은 둘 다 좀 닥쳐 줘라.”
어쩐지 장난칠 수 없는 분위기에 가렛과 스카이는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푹 내쉰 스테치는 그들에게 말했다.
“원래는 조용히 우리들끼리만 일 보려고 했는데…… 혹시 사고라도 나면 나중에 곤란해지니까 미리 설명해 두려고 불러낸 거야.”
“뭘?”
“……엘프들의 여신인 데스트라라고 들어 봤어?”
스테치의 설명은 짧고 간결했다. 데스트라의 코어가 그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과, 지금부터 그걸 통해 여신을 부활시킬 생각이라는 것. 스테치는 그 증거로 푸른 보석을 보여 주었다.
예상대로, 두 사람의 반응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그러니까…… 신?”
“맞아.”
“난 신 따위 안 믿어. 아무튼 안 믿어.”
가렛은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는 해프닝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스카이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보이려 했지만, 애써 무시하려는 티가 팍팍 났다.
“잠깐 기다려 봐.”
양미간 사이를 손가락으로 집으며, 가렛이 말했다.
“네가 방금 설명했잖아. 마력이 많이 소모된다고. 그런데 무슨 수로 부활시키겠다는 거야?”
“엘레나가 도와줄 거야.”
스테치는 의자에 앉아 있던 엘레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듯 발가락 끝을 꼼지락대고 있었다.
“무슨 말이야?”
“내가 설명할게.”
그때, 프레야가 나섰다.
“마력을 불어 넣으면 코어는 순서대로 데스트라의 의식, 그리고 육체를 재생시킬 거야. 다만 엘레나가 그 육체를 대신해 줌으로써, 육체는 이미 재생이 완료되었다고 코어를 착각하게 만드는 거지. 간단해.”
“……너네 진짜 미쳤구나?”
가렛이 얼굴을 팍 찡그리며 말했다.
“자칫 잘못하면 여기 아가씨가 어떻게 될지 조금이라도 생각해 봤어?”
“해 봤어. 그리고 미안하지만, 너희 둘을 부른 이유는 동의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야.”
스테치가 딱 잘라 말했다.
“게다가 이건 엘레나가 먼저 고안한 아이디어였어.”
그러자 가렛은 입을 쩍 벌리며 엘레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긴장한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워 보였다. 프레야는 가렛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여신의 의식은 엘레나의 것과 섞이는 일 없이 공존하게 될 거야. 혹시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어.”
“다른 사람이 할 수는 없는 거야?”
“가능은 하겠지만, 되도록이면 신과 가까운 특징을 지닌 이가 소체가 되는 편이 나아. 엘레나는 어쨌든 여성이고, 거기다 엘프니까.”
가렛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스테치는 엘레나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녀의 이마 정중앙에는 데스트라의 코어가 부착되어 있었다.
“……괜찮겠어?”
“당연하죠. 제가 바란 일인걸요.”
엘레나는 신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배알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스스로 이번 계획을 기쁘게 제안했다.
그 모습을 본 스테치는 데스트라가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새삼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스테치는 상체를 엘레나에게로 바짝 기울였다. 비록 그녀가 자원한 일이었지만, 스테치는 죄책감이 들었다.
“절대 잘못되도록 놔두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정말로?”
엘레나의 짓궂은 질문에, 스테치는 그제야 마지못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그럼…… 준비되면 말해.”
의자에 앉은 채로 심호흡을 하던 엘레나는, 스테치와 프레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프레야는 반지로 되돌아가고, 스테치는 왼손을 들어 엘레나의 이마 위에 얹었다.
마력이 푸른빛과 함께 코어 내부로 흘러 들어가면서, 엘레나는 몸에 전기가 통한 것처럼 움찔거렸다. 이마 언저리가 간질거리긴 했지만, 고통은 일절 없었다.
“이거…….”
지켜보고 있던 스카이와 가렛은 도저히 엘레나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길게 늘어뜨린 그녀의 머리카락은 서서히 청명한 푸른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혈색 때문에 살짝 붉었던 피부색도, 점점 더 새하얗게 변해 갔다.
잠시 후, 그녀가 눈을 떴다.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던 그녀는,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을 발견하고선 어색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어…… 안녕?』”
그것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여신 데스트라가 꺼낸, 첫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