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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화 데스트라 (170/203)

170화 데스트라2022.03.20.

스테치는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엘레나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목소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스카이와 가렛은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 엘레나의 모습에 쉽사리 말을 걸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미친…… 정말로 해 버렸어.” “진짜 신이야? 진짜로?” 전체적인 이목구비는 엘레나였지만, 피부 빛이나 머리카락 색깔은 데스트라의 것이었다. 비록 처음에는 실감 나지 않았던 세 사람이었지만, 눈앞의 여성이 발하는 알 수 없는 기운에 압도되고 말았다. 스테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눈앞의 여성을 쳐다보았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동자를 마주 본 순간, 스테치는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스테치는 최대한 침착한 말투로 프레야에게 물었다. ‘어이. 이거 제대로 된 거 맞아? 엘레나는 어떻게 된 거지?’ 『지금 신체를 주도하고 있는 건 데스트라야. 보아하니 엘레나는 본인의 의지로 잠시 물러선 것 같고. 괜찮아. 문제없어.』 엘레나. 아니, 데스트라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테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소멸했어야 할 자신이 어째서 살아 있는가? 아마도 그것이 데스트라의 머릿속에 떠오른 첫 의문일 것이다. 스테치는 조용히 침묵을 고수했다. 그러자 잠시 후 데스트라가 물었다. “『너흰 누구지?』” “어……. 그게…….” “『여긴 어디고?』”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가렛과 스카이. 대체 무어라 설명해야겠는가? 자기소개 따위를 해 봤자, 이곳의 지리를 설명해 봤자 지금의 그녀에게는 무의미할 텐데. 벌떡! 대답이 늦어지자, 그녀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빠른 발걸음으로 방에서 빠져나갔다. 여신의 갑작스런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란 세 사람이 뒤늦게나마 그 뒤를 쫓았지만, 데스트라는 이미 아지트 바깥으로 나간 상태였다. 누구보다도 빠르게 움직인 스테치는, 아지트 바로 앞에서 레지아 계곡의 정경을 둘러보던 여성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축 늘어진 두 어깨는 그녀가 느끼고 있을 상실감과 허탈함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모르겠어.』” “기다려 주세요.” 스테치는 뒤를 돌아보는 데스트라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상대는 오랜 잠에서 깨어난 엘프들의 여신. 혹시라도 불안해하지 않도록 생전과 비슷한 대우를 해 드리는 것이 마땅하리라. 뒤늦게 따라온 스카이와 가렛이 황급히 그를 따라 무릎을 꿇는 사이, 스테치가 물었다. “실례지만, 꼭 확인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말 여신 데스트라 님이 맞으십니까?” “『…….』” 데스트라는 그의 질문을 듣고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끈질기게 대답을 기다리던 스테치의 귀로, 데스트라의 힘없고도 씁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렇게나 오랜 시간이 흐른 건가.』” 비록 스테치의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지만, 눈앞의 여성이 정말 데스트라임을 확신하기엔 충분한 발언이었다. 스테치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마 궁금하신 게 많으시겠죠.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라면 무엇이든 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질문을 던졌다. “『지금이 몇 년이지?』” “1705년입니다.” “『……놀랍군. 다시 살아서 이 땅을 밟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는데.』”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날짜를 들은 데스트라는 의외로 약간 안심하는 눈치였다. 스테치는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그녀를 되살려 냈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을 들은 데스트라는 ‘그렇게 간단히?’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프레야가 인간과는 다른 시각의 소유자였기에 가능했던 일. 그녀가 아니었다면 데스트라의 코어 구조를 파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으리라. “-해서 지금 여신님의 그 몸은 원래의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그녀는 신의 그릇이 되는 역할에 기쁘게 자원했죠.” 스테치의 말을 들은 데스트라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애정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격한 모양이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는, 눈물방울을 훔쳐 낸 뒤 물었다. “『그래서…… 이런 일까지 해서 굳이 날 깨운 이유가 뭐지?』”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다. 자기도 모르게 잔뜩 긴장한 스테치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말했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스테치는 전후 사정을 알려 주기 위해 메멘토 모템을 낀 왼손을 들어 보였다. 순간, 그를 응시하던 데스트라의 눈빛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물론 그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스테치는, 자신이 뭔가 잘못했나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괜찮으십니까?” “『알려 주겠다.』” 방금 전까지와 달리 힘 있는 목소리였다. 그 변화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던 나머지 듣고 있던 스테치가 살짝 놀랄 정도였다. “『진실을 알고 싶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궁금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물어봐도 좋다. 하지만 그 전에—』” 그녀는 스카이와 가렛을 가리키며 말했다. “『부외자는 잠시 자리를 비워 줬으면 좋겠군.』” 지목받은 이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스테치와 데스트라를 번갈아 보더니, 결국 하는 수 없이 아지트로 돌아갔다. 그렇게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데스트라가 말했다. “『말해 보아라.』” 스테치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금껏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메멘토 모템에 대한 것.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왔던 길과, 아치발의 신자라는 집단과의 조우.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데스트라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여신님을 깨우게 됐습니다.” “『…….』” “처음엔 제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생각치도 못했던 많은 문제들과 엮이면서, 더 큰 골칫거리로 변해 가더군요. 저는 이제 뭐가 옳고 그른지 제대로 판단조차 하기 힘들 지경입니다. 그러니 부디 알려 주세요. 제가 빠트리고 있는 게 대체 뭡니까?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스테치의 질문을 들은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이미 너는 진실에 상당히 근접해 있단다. 고작 한두 발짝 정도만을 남겨 놓고 있지.』” “그런가요? 그런 것치고는 여전히 안갯속을 헤집고 다니는 기분인데 말이죠.” 그러더니 그녀는 스테치에게 물었다. “『……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만, 그래도 들어 보겠니?』” * * * “요즘 아버지가 이상하지 않아?” 뜬금없는 엑스턴의 질문에 데스트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가?” “음……. 딱히 콕 집어서 말하기는 어려운데.” 엑스턴이 말했다. “평소엔 아버지랑 설계도나 아이디어를 교환해 가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논의하곤 했거든. 그런데 요즘은 아예 대화하길 꺼리시더라고. 마지막으로 말을 섞어 본 게 벌써 4개월 전이라니까?” “아버지가 이유 없이 그럴 분은 아니잖아. 네가 뭔가 실수라도 저지른 거 아냐?” 되레 엑스턴에게 핀잔을 준 데스트라는 잔을 막 입으로 가져가고 나서야 안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눈치챘다. 아쉬운 듯 입맛만 쩝쩝 다시는 그녀의 뒤에서, 미리 대기 중이던 시종이 눈치 좋게 나서더니 준비해 둔 과실주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어머, 고맙다.” 조각 같은 얼굴에 미소까지 더해지니 눈이 다 부실 지경이다. 시종은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물러섰다. 한편, 엑스턴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항변했다. “절대 그럴 일 없어. 난 이래 봬도 사랑받는 아들이라고.” “놀고 있네……. 좋아. 그렇게 신경 쓰이면, 나중에 내가 아버지한테 가서 한마디 해 주고 올게. 그거면 됐지?” “마음대로 해.”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과자와 음료를 즐기던 그들은, 수 킬로미터 바깥에서 들려오는 파공음을 듣고선 두 눈을 치켜떴다. 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데스트라와 엑스턴이 더 이상 무시하기 힘든 수준으로까지 커졌다. 쾅! 곱게 깔려 있던 포석이 산산 조각나고, 무언가가 바닥에 안착했다. 시종은 갑작스러운 해프닝에 기절할 만치 깜짝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렸다. “등장 한번 요란하네.” 엑스턴이 투덜거렸다. 먼지구름을 뚫고 걸어 나온 이는 다름 아닌 카인. 그러나 평소와 달리 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조급해 보였다. “데스트라, 네 도움이 필요해.” “무슨 일인데?” “남쪽에서 인간과 엘프 간의 싸움이 벌어졌는데, 둘 중 어느 쪽도 내 지시를 듣지 않아. 둘 이상이 아니면 막기 힘들겠어.” “뭐?” 인간이 자신들의 신이 하는 말을 무시한다니, 일반적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데스트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엑스턴도 그녀를 따라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둘보다는 셋이 낫겠지?” “물론이지.” 공중으로 붕 떠오른 셋은 카인이 날아왔던 방향을 그대로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30분쯤 날아갔을까? 지상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본 데스트라는 급제동을 걸었다. “저건?” 데스트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널려 있는 시체들. 설마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토록 심한 유혈사태가 발생했으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카인도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에 놀랐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저기, 저쪽에!”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엘프를 마무리 짓기 위해, 돌덩이를 든 채 다가가는 인간이 하나. 그것을 본 데스트라는 순간 피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이었다. 슈화아악-! 눈 깜짝할 사이에 엘프와 인간의 사이를 가로막고 선 데스트라. 자식이 공격당해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부모는 없다. 데스트라가 상대를 이 세상에서 말끔하게 소멸시키려는 찰나, 엑스턴이 뒤에서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 “안 돼.” 신은 피조물에게 직접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들 셋이 가장 처음에 정해 놓은 기본 룰이었다. 본보기가 되어야 할 신이, 폭력에 의해 공포의 대상으로 보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데스트라가 터져 나오려는 화를 강제로 억눌러 삭이는 사이, 카인이 인간에게 외쳤다. “그만둬라! 종족 간 싸움이라니, 이게 웬 말이냐!”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창조주가 내리는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쥔 돌덩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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