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의문투성이 (171/203)


171화 의문투성이
2022.03.21.


수 개월 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이! 너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개 같은 놈들, 양심이라곤 없는 거냐!”

각각 인간과 드워프로 구성된 두 진영이, 드넓은 평원을 사이에 끼운 채 서로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언제 어느 쪽이 먼저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결국 참다못한 드워프 하나가 워 해머를 휘두르며 앞으로 뛰쳐나왔고, 이를 신호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일제히 돌진했다.

“죽여 버려!”

콰아앙!

무기와 무기가 격돌하려는 찰나, 수 킬로미터 상공에서 수직 낙하한 무언가가 전장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충격파와 바람에 밀려난 드워프와 인간들이 바닥을 구르는 동안, 땅속 깊숙이 파인 구덩이에서 누군가가 훌쩍 뛰쳐나왔다.

엑스턴은 기다란 수염을 흩날리며 씹어 먹을 듯한 기세로 말했다.

“이 개XX들아.”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그의 눈빛에, 주변에 서 있던 모두가 움찔거렸다. 비록 드워프의 신체 특성상 체구는 인간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은 수백 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사람조차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우리가 서로의 목에 칼부터 들이대라고 가르쳤냐?! 존중과 이해는 어디 팔아먹고, 감히 이따위 짓을 눈앞에서 대놓고 벌여!”

그러나 사람들의 머리는 이미 정상적인 사고 능력을 잃어버렸는지, 되레 엑스턴에게 따지고 들었다.

“놈들의 손에 억울하게 죽어 간 동포들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부당합니다! 저희들의 분노를 헤아려 주십시오!”

어영부영 전투가 다시 재개되려는 기미가 엿보이자, 엑스턴의 목둘레에 굵은 핏줄이 두드러졌다.

“닥 - 쳐 - 라 - !!”

터져 나오는 서슬 퍼런 마력의 파동이 평원 전체를 휩쓸었다. 담이 약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엑스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나마 두 다리로 버티고 선 이들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어 대며 쥐고 있던 무기를 놓쳐 버렸다.

푸쉬이익-!

기계식 건틀릿이 뜨거운 스팀을 뿜어내면서, 관절부 틈새로 주황빛 아우라를 발산했다.

“지금부터 내 눈앞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오는 놈이 보인다면……. 진정한 신의 분노가 무엇인지 뼈저리도록 느끼게 만들어 주마.”

* * *

“엑스턴!”

데스트라가 도착했을 땐 이미 상황은 종결된 후였다. 두 집단은 무기를 엑스턴의 앞에 던져 놓은 뒤 삼삼오오 흩어지고 있었고, 끝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덤벼들었던 드워프나 엘프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죽이진 않았어.”

바윗덩이 위에 걸터앉아 있던 엑스턴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누구 한 명 내 손에 죽는 것도 시간문제야.”

종족 간에 벌어진 최초의 싸움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세 신의 개입으로 사태는 신속하게 진압되었지만, 그것이 불러온 파장은 생각 이상으로 만만찮았다.

먼저, 사건의 여파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엘프와 인간들 사이에는 씻을 수 없는 깊은 불신이 자리 잡게 되었다.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두 종족은 걸핏하면 서로를 힐난하고 헐뜯을 만큼 관계가 악화되고 말았다.

게다가 문제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엘프와 인간의 다툼을 기점으로, 대륙 곳곳에서 세 종족들의 피 튀기는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싸움이 본격화된 이유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아는 바가 없었으며, 누가 먼저 선을 넘었는지조차 불분명했다.

세 신은 날마다 대륙 전체를 돌아다니며 고조된 분위기를 진정시키고자 애를 썼다. 하지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고, 결국 그들은 기존의 비폭력적인 노선을 버려야만 했다.

“그래서 어때? 뭔가 알아냈어?”

엑스턴은 데스트라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바윗덩이 위에서 훅 뛰어내렸다. 그의 시선은 기절한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로 꽂혀 있었다.

“그 사람들은?”

“이번 싸움의 주동자들이다.”

그의 말을 들은 데스트라는 땅바닥에 쓰러진 엘프에게 손을 뻗었다. 간단한 마법을 사용해 사내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던 데스트라는, 기억들의 순서가 미묘하게 틀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또 이러네. 대충 예상은 했지만.”

현재 각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 중인 모든 무력 충돌 사태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사건의 뒤에는 반드시 주동자가 있으며, 그들의 기억에 부자연스러운 공백이 있다는 점. 하지만 그나마도 자세히 살펴보면 눈치채기 힘들 만큼 희미한 흔적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왜 갑자기 무기를 들고 날뛰었는지, 감정이 폭발한 계기가 무엇인지 등등, 어느 하나도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다.

‘우리가 모르는 제3자가 이 사람들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게 분명해. 하지만…… 이토록 광범위한 분쟁을 조장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뭐지?’

게다가 종족 간 싸움은 대륙 전체에 걸쳐서 벌어지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건 간에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움직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데스트라의 옆에서 엑스턴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다, 진짜. 하루만 해도 벌써 몇 번째냐?”

남들이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만능이 아니다. 뚜렷한 단서도 없고, 전투가 벌어질 장소나 시간을 예측할 방법도 없다. 대륙의 끝과 끝을 오가며 이미 터져 버린 일을 수습하느라 시간은 소모되며, 희생자의 발생은 불가피하다.

몸도 마음도 지쳐 간다.

“상황이 좀 답답하긴 하지. 나도 이해해. 하지만 가망이 없어 보인다고 해서 손 놓고 구경만 할 순 없어.”

데스트라는 쓰러진 엘프에게 뻗었던 손을 거둬들이며 말했다.

“그…… 어쩌면 아버지와 한번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해 봐야 할지도 모르겠어. 일이 너무 커지기 전에 말이야.”

그러자 엑스턴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소라면 나도 그 말에 동의하겠는데, 말했다시피 아버지가 요즘 대화를 잘 안 하시잖아. 게다가, 아버지라면 분명 우리가 직접 해결하길 바라실 거야.”

휘오오-.

한창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딘지 모르게 오싹한 기분이 든 데스트라가 몸을 살짝 떠는 순간, 수백 킬로미터 바깥에서 터져 나온 검은 기운이 그녀와 엑스턴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윽!”

감각이 날카로운 신의 육체였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잘 알 수 있었다. 불쾌하면서도 끈적한 무언가가 전신에 휘감기는 느낌. 엑스턴도 데스트라와 마찬가지였는지, 바람이 불어온 방향을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뭐였지?”

“이거 어째 불안한데.”

* * *

“꺄아-”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닥을 구르는 여성의 목. 머리 잃은 몸은 그대로 한두 발자국 정도를 더 걸어가는가 싶더니, 이내 줄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솜니아는 이렇다 할 특색 하나 없는 평범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인구수 90여 명에 불과한 이 마을은 지금, 갑작스레 불어닥친 혈풍으로 갈려 나가는 중이었다.

“캬오오!”

파도처럼 몰려오는 괴물의 무리. 가장 선두에서 땅을 울리며 질주해 온 괴물 하나가, 전갈의 것처럼 생긴 뾰족한 독침을 도망치던 남자의 뒤통수에 찔러 넣었다.

푸욱!

단 한 방으로 절명하여 축 늘어진 남자. 괴물은 입맛을 다시며 시체를 들어 올리더니, 시체의 발끝부터 주둥이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식사 장면은 솜니아 쪽으로 날아오던 카인의 눈으로 정확히 들어왔다. 이때 그는 마을로부터 고작 수십 미터 거리만을 남기고 있었다.

‘뭐지, 저 생물들은?’

처음에는 맹수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전혀 아니다.

아버지를 도와 세상 만물을 창조할 때조차도 저런 생물은 만든 적도,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있어 괴물의 외견은 중요치 않았다.

‘감히 내가 보는 앞에서 사람을 죽여?’

꾸드득-.

참혹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카인은 피가 맺히도록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는 전신의 마력을 팔뚝으로 끌어모은 뒤, 지면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콰르릉!

푸른 번개와 함께 땅속 깊숙이 꽂힌 주먹. 지형을 일그러뜨리며 퍼져 나간 충격파가 전방을 휩쓸었다. 검이나 화살 정도로는 생채기 하나조차 낼 수 없었던 괴물들의 몸뚱이가 조각조각 터져 나갔다.

“크와아악!”

조금은 겁을 먹을 만도 하건만, 그러거나 말거나 피 묻은 턱을 카인의 목으로 드리우는 괴물. 그러나 카인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두 손으로 주둥이를 붙잡은 뒤, 괴물을 양 갈래로 찢어 버렸다.

휘익!

카인은 두 손에 쥔 고깃덩이를 차례로 집어 던졌다. 음속에 가까운 스피드로 날아간 괴물의 사체가 다른 놈들에게 꽂히는 사이, 그는 뒤쪽을 흘끔 살펴보았다. 카인이 시간을 끌어 준 덕분에 솜니아의 주민들은 모두 대피하고 없었다.

“흥!”

순수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광선이 그의 손을 따라 일직선으로 뿜어져 나갔다. 마을을 말 그대로 집어삼킬 기세로 몰려오던 괴물 무리는 카인의 손짓 몇 번 만에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맙소사.”

마을 옆 언덕에서 카인의 싸움을 지켜보던 솜니아 마을 주민들은 입을 쩍 벌렸다. 신이 억눌러 왔던 힘을 폭발시키는 순간, 그 가공할 만한 파괴의 권능 앞에서 사람들은 그저 말없이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앗!”

집채만 한 바위의 거인이 거대한 팔로 카인을 후려쳤다. 잠깐이나마 카인이 죽거나 다친 건 아닐까 싶어 걱정한 사람들은, 손가락질 한 번으로 거인을 박살 내는 그의 모습에 입을 벌렸다.

양손에 푸른 번개를 두른 카인은, 그것을 채찍처럼 휘둘러 주변에 닿는 모든 괴물들을 태워 버렸다. 괴물 떼의 기세가 한풀 꺾일 때쯤, 데스트라와 엑스턴이 도착했다.

“이게 무슨 난장판이야? 이 괴물들은 또 뭐고?”

두 사람은 죽어 있는 괴물들의 육편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괴물들의 생김새는 마치 동물의 가장 거칠고 위협적인 부분만을 모아 섞어 놓은 듯했다.

“몰라. 하지만 이놈들이 어디서부터 계속 튀어나오고 있는 건지는 알아.”

데스트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와 엑스턴이 느꼈던 꺼림칙한 기운은, 정확히 카인이 가리킨 방향 쪽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 보자.”

콰과광!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카인과 더불어 나머지 둘이 합류하자,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하던 괴물들이 이제는 역으로 학살당하고 있었다.

“저건가?”

기운이 흘러나오는 근원을 쫓아 5km 정도를 이동한 셋은, 심연의 구렁텅이처럼 끝없는 어둠으로 가득 찬 동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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