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진실 (3) (175/203)


175화 진실 (3)
2022.03.25.


“『메멘토 모템.』”

데스트라가 언급한 그 이름.

이야기를 듣는 과정 중에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신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되니 그 무게부터가 남달랐다.

“『우리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사명을 계속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인공 아티팩트지.』”

“인공……?”

스테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자 데스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나? 왜 이토록 반지가 유독 ‘몬스터’나 ‘던전’에 대한 공격적인 기능들로 가득한지? 왜 사람이 아닌 몬스터나 아티팩트의 마력만을 흡수하도록 설계되었는지?』”

여타 아티팩트에는 존재하지 않는 자의식. 거기다 한 아티팩트에 들어 있기엔 지나치게 많은 어빌리티. 여러모로 석연찮은 구석이 많긴 했지만, 설마 신에 의해 만들어진 아티팩트였을 줄이야.

그 순간, 반지로부터 흘러나온 빛이 천천히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

프레야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평소의 건방지고 자신만만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당혹감. 데스트라는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오래간만이구나.』”

“……그렇게 친근한 척해 봐도,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몰라.”

프레야가 다소 퉁명스런 말투로 대꾸하자, 데스트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과거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게 없겠지?』”

“뭐야, 그럼 그게 당신 짓이었어?”

두 눈을 부라리는 프레야를 잠시 진정시킨 스테치는, 데스트라에게 물었다.

“결국 뭡니까? 이 반지는.”

그러자 데스트라는 말했다.

“『아치발의 신자들을 쳐부술 천적. 말로 표현하는 건 간단하지만,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어. 그야말로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 있어야 했거든.』”

엑스턴은 두 가지 목표를 핵심으로 두었다.

첫 번째는 던전과 몬스터의 파괴.

이를 위해, 반지에는 가장 먼저 커스 이팅 어빌리티가 들어가게 되었다. 그것은 메멘토 모템의 결정적인 문제거리였던 에너지 공급 문제를 해결해 주고, 착용자가 적극적으로 몬스터를 처치함과 동시에 검은 아티팩트를 수색하도록 유도해 준다는 장점 또한 지니고 있었다.

두 번째는 반지의 안정성.

아치발의 신자의 주특기는 정신 조작과 세뇌. 아무리 최고의 무기를 만들었다 한들, 그걸 휘두르는 당사자가 세뇌당해 반지를 적의 손에 넘겨주게 되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이를 위해, 세 신은 새로운 영혼을 만들어 반지 안에 정착시켰다.

사용자의 육체와 반지가 결합하고, 두 개의 영혼이 하나의 몸을 공유함으로써 발휘되는 시너지 효과에 의해 착용자는 정신 공격에 대한 영구적인 면역성을 가지게 된다.

또한 그것 이외에도 메멘토 모템이 올바른 사용자를 선정하고, 수많은 어빌리티들을 컨트롤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선 두 번째 영혼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이건 그야말로 시간 싸움이었어. 다행히도 조각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었지만, 신자들의 횡포는 끊이질 않았으니까. 이쪽이 먼저 조각을 전부 파괴하느냐, 아니면 상대가 먼저 아버지를 부활시킬 방법을 찾느냐가 관건이었지.』”

데스트라는 스테치에게 말했다.

“『검은 아티팩트를 흡수함으로써 과거의 기억을 읽어 내는 건, 그저 우리가 상정하지 못했던 부작용에 불과해. 본래대로라면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은 끝까지 아무도 모르는 과거의 일로 묻혀 버렸어야만 했지. 주변에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있는지 알 수 없는 한, 메멘토 모템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많아 봐야 좋을 것이 없으니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씹어뱉듯이 쏘아붙인 프레야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두들겼다.

“만약 그쪽이 정말 날 만들었다면, 대체 왜 내 머리를 이딴 식으로 설계한 거요? 내가 나 자신의 과거를 잊어버려야 할 이유가 대체 뭔데?”

그러자 데스트라는 스테치에게 향했던 시선을 프레야에게로 돌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에 잔뜩 화가 나 있던 프레야는 되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앞서 말했듯이, 반지에 영혼을 부여하는 작업은 여러 의미에서 필수적이었다.』”

살짝 떨리는 데스트라의 목소리.

“『적합한 사용자가 메멘토 모템을 취했을 경우, 부활 어빌리티가 상시 발동하여 사용자를 죽음으로부터 보호해 주지. 하지만 만약 마력마저 전부 없어지고 나면?』”

“둘 다 죽는 것 아닙니까?”

스테치의 물음에 데스트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메멘토 모템은 사명을 완수하는 그 날까지 절대 파괴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야. 그래서 진정한 죽음의 위기가 닥쳐올 경우, 반지는 사용자의 육신을 버리고 위협 요소로부터 멀리 떨어지도록 설계되어 있단다.』”

스테치는 북부에서 리퍼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는 마치 메멘토 모템이 몇 번씩이고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했었는데, 이제 보니 이를 두고 한 말이었나 보다.

아마 그가 반지를 던전에서 찾아낸 것 또한, 신자들의 감시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으리라.

데스트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육체와의 결합을 다시 끊는 건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는 일이야. 뼈에서 살을 뜯어내는 듯한, 거의 죽음에 준할 만큼 아주 극심한 고통이겠지. 그것을 매번 새 사용자를 찾아낼 때마다 겪어야 한다면?』”

그녀의 말을 이해한 스테치는 몸을 떨었다.

“『비록 아티팩트 안에 담겨져 있지만, 네 영혼과 의식은 대단히 섬세했다. 만약 네 기억을 그대로 유지시켰다면 우리의 임무가 조금 더 편해졌을지언정, 너는 그 고통과 아픔을 영원히 기억해야만 했겠지. 그것도 몇 번씩이나.』”

데스트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건 고문이야. 비록 반지의 영혼이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어.』”

* * *

“후으읍.”

가렛의 아지트 앞. 어두운 밤공기를 한껏 들이켜며, 스테치는 눈을 껌뻑였다. 아직도 들어야 할 이야기는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들은 내용들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만큼 데스트라가 알려 준 진실은 한 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괜찮으세요?”

엘레나가 그런 그의 옆에 다가와서 물었다.

현재 그녀의 몸은 프레야와 스테치처럼, 두 개의 의식이 공존하고 있는 상태. 보아하니 지금은 그 주도권이 엘레나에게로 넘어간 모양이다.

“괜찮지…… 않아.”

다른 때 같았으면 그냥 간단히 웃어넘겼겠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난 내가 이런 엄청난 계획에 휘말리게 될 거라곤 생각 못 했어. 나만 해도 이런데, 당사자인 프레야는 얼마나 상심했을지 상상도-”

“상심 안 했는데?”

보란 듯이 튀어나오는 프레야. 소스라치게 놀란 스테치와 엘레나의 눈길을 한 몸에 받으며, 프레야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뭐야, 너? 아까 전엔 말도 없이 사라져 놓고는…….”

“그거야 나도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상심 따윈 애초부터 하지도 않았어.”

그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난 나야. 나한테 중요한 건 지금의 내 기억이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좆도 신경 안 써. 그러니까 나는 네가 살아남도록 전력을 다할 거야. 이 기억마저도 잃어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되니까.”

예상외로 잘 받아들이는 듯한 프레야의 모습에 스테치는 피식 웃어 버렸다.

“그나마 다행이네.”

“『그래…….』”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다시 눈을 뜬 데스트라가 스테치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것 참…… 다행이구나. 정말로.』”

“착각하지 마. 그렇다고 지금 와서 당신이 좋게 보인다는 생각은 요만큼도 안 드니까.”

까칠하게 구는 프레야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데스트라의 표정은 한결 편해 보였다. 비로소 무거운 짐을 덜어 낸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아까 하려던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은데요.”

스테치는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메멘토 모템이 완성되고 난 이후, 우리는 그것을 이미 존재하는 던전 속에 숨겼다. 그때쯤의 사람들은 직접 던전을 탐험하고, 그 안의 아티팩트들을 이용하기 시작했거든. 신자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발견되기엔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지.』”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남은 우리들은, 남은 수명이 다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했어.』”

엑스턴은 최후의 순간까지 무언가를 설계하고 만들었다. 그 덕택에 북부의 드워프들은 지금의 크로마토스 제국과도 견줄 만큼 강대한 국가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카인은 달랐다.

“『스스로의 힘을 반지에 쏟아부은 탓에, 그 시점의 카인은 아버지의 조각을 스스로 부수지도 못할 만큼 약해져 있었지. 그래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미리 모아 두었던 조각들을 끌어안고 자신의 몸을 매개체 삼아 봉인했어. 메멘토 모템의 사용자가 오면, 한 번에 일을 끝마칠 수 있게.』”

“어디예요?”

“『엘프들의 숲에.』”

엘프들은 타고난 마법 능력 덕분에, 신자들의 정신 조작에 대해 비교적 강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카인은 아티팩트들을 대륙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엘프의 숲에 봉인하고, 데스트라는 ‘셸로어’라 불리는 소수의 강력한 엘프들을 선별하여 이를 보호할 것을 지시했다.

“『‘징표’를 가진 이가 숲에 나타나면, 아버지의 조각들을 건네주라고 명령했지. 그리고 나는 그 직후에 눈을 감았고.』”

“그 숲의 위치가 어디쯤이었나요?”

스테치는 대륙의 지도를 펼쳐 보이며 물었다. 데스트라는 잠시 고민하더니, 어둠의 숲에서 동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 위치를 알아본 스테치는 탄식했다.

“『왜 그러지?』”

“……방금 가리키신 그 자리에 숲은 없어요.”

“『뭐?』”

스테치는 처음으로 당황스러워하는 데스트라에게 설명했다.

“……인종 청소 전쟁이 벌어졌거든요.”

인종 청소 전쟁. 대륙이 카델트 대사막으로 인해 막 남부와 북부로 나뉜 직후, 인간들은 힘을 모아 엘프들이 살아가던 숲을 공격했다.

대륙의 피를 더럽히는 더러운 종족을 없애겠다는 명분하에 벌어진, 지독한 인종차별적 전쟁이었다. 대륙의 분단으로 반 토막이 난 엘프들의 세력은 인간들의 무시무시한 공세에 버틸 수가 없었고, 결국 살아남은 소수만이 숲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던 인간들은 엘프들을 끝장내기 직전 갑자기 전쟁을 그만두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알고 있는 진실.

스테치는 그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아마도 전쟁의 배후에는 아치발의 신자들이 있었을 겁니다. 다른 곳을 모두 뒤져 봐도 조각이 보이지 않으니까, 숲 안에 감춰져 있을 거라 생각하고는 인간들을 선동하고 전쟁까지 벌인 거겠죠. 목표를 달성했으니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어졌을 테고요.”

“『그럴 수가…….』”

데스트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베네지아의 왕이 왜 그렇게 검은 아티팩트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지 알겠군요.”

16564305535154.png

16564305535161.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