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수급(首級) (176/203)


176화 수급(首級)
2022.03.26.


엘프들은 인간에 비해 우수한 마법 능력, 그리고 정신 조작에 강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숲에 검은 아티팩트들을 모아 봉인해 둔다는 카인의 생각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카델트 대사막이라는 단 하나의 예기치 못한 변수가 모든 것을 뒤집어 버렸다.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구나, 정말로.』”

비록 고개를 떨구고 있던 탓에 표정을 보진 못했지만, 그녀가 얼마나 큰 허탈감과 참담함을 느끼고 있을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최소한 하나는 확실해졌어. 베네지아 세 왕자의 아버지, 신체루스 국왕은 아치발의 신자야.”

스테치의 말을 들은 프레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 녀석이 아치발의 신자라면, 왜 검은 아티팩트를 하필 곧 죽으러 가는 자기 자식의 손에 쥐여 준 거지? 네가 날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검은 아티팩트가 흡수당할 위험성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텐데.”

“몰라. 곧 죽을 줄 몰랐나 보지.”

잠시 고민해 보더니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스테치. 프레야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게다가 사막에서 봤잖아. 이유는 몰라도 북부의 신자들이랑 베네지아 왕가는 서로 적대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였어. 나는 베네지아의 왕이 정말 신자이긴 한지도 의심스러운데.”

“『그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데스트라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았는지, 스테치를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신자들 사이에서도 어째서인지 파가 갈리는 듯하더구나. 드물긴 했지만 예전에도 신자들끼리 싸우는 광경을 종종 본 적이 있었거든. 아마 그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데.』”

“그런가요?”

이건 처음 듣는 정보다.

“『아마도 아버지를 부활시키는 방식에 대해 이견이 있는 모양이지.』”

생각해 보니, 북부의 신자들이 검은 아티팩트를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계획에 사용해 왔던 것에 반해, 베네지아는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검은 아티팩트를 그저 보관만 해 왔다. 뭔가 이유가 있는 건가?

“『……뒷 내용이 어떤지는 상관없다.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니까.』”

데스트라가 말했다.

“『아버지의 부활은 필연적으로 대량 학살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렇게 되면 네가 아끼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결국은 대륙 전체가 파멸에 휩싸이게 되겠지.』”

그녀는 스테치를 응시했다.

“『네가 나서야만 한다. 스테치 아텔리어.』”

* * *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침 해가 밝을 무렵. 방에서 빠져나와 해돋이를 구경하던 스테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심경이 복잡하다.

처음엔 단순히 복수만 할 생각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대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에 휘말리고 만 것인가.

슈오오-.

반지에서 나온 프레야는 터덜터덜 걸어가더니 바위에 등을 기대선 채 팔짱을 끼곤 말했다.

“어렵게 여길 필요 없잖아. 네 목표인 베네지아의 왕자의 배후에는 왕이 있어. 네가 베네지아를 상대로 싸워야 할 명분이 하나 늘었을 뿐이라고.”

“그거야 단순히 생각하면 그렇지만…….”

뭔가 영 찜찜하단 말야. 스테치는 목구멍 언저리까지 올라오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그러자 프레야는 스테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적도 뭔가 꿍꿍이속이 있기야 하겠지.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봐. 우리가 행동을 망설일 때마다, 상대가 생각할 여유를 주는 꼴이라고.”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스테치가 피식 웃어 버리자, 때마침 뒤에서 데스트라가 다가왔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늘 하던 대로 할 겁니다. 사냥감이 집에서 안 나올 생각이라면, 이쪽에서 직접 쳐들어가는 수밖에요. 왕자를 조지면서 왕 모가지도 함께 따 버리죠, 뭐.”

“『조심해야 된다. 상대는 조각을 여럿 가지고 있어. 그걸로 무슨 짓을 꾸밀지 몰라.』”

고개를 끄덕이던 스테치는,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내용을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실례지만,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뭐지?』”

스테치는 왼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가리켰다.

“저는 메멘토 모템의 기능 대부분을 해금했어요. 그런데 아직도 두 개나 되는 어빌리티가 남아 있어요. 이 둘의 해금 조건은 뭐죠?”

갑작스러운 질문에 살짝 당황했는지 데스트라는 대답을 머뭇거렸지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스테치의 시선에 못 이겨 결국 입을 열었다.

“『그건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해 둬라.』”

“최후? 우우,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드는데요.”

스테치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가벼운 말투로 받아 보았지만, 데스트라의 눈빛은 무겁고 진중하기 그지없었다.

“『너는 지금껏 네가 반지를 통해 흡수한 마력들이 전부 새로운 어빌리티를 해금시키는 데에 소모되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렇지 않단다.』”

“예?”

“『어빌리티의 해금 조건은 사용자가 적극적으로 던전의 파괴와 몬스터 척살을 노리도록 유도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해. 네가 새 어빌리티를 해금하면서 소모했다고 생각한 마력은, 사실 전부 메멘토 모템의 내부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어.』”

스테치는 깜짝 놀랐다.

“뭘 위해서죠?”

“『아버지가 부활에 성공했을 때를 대비한, 최종 안전장치.』”

데스트라의 말을 듣는 순간, 스테치는 그녀가 왜 이토록 말을 꺼내기 힘들어했는지 깨달았다. 그녀에게 있어 아버지가 부활하는 일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적절한 때가 오면 자동으로 해금될 테지. 하지만 절대 그 순간이 오지 않기를 빌거라.』”

그녀는 거듭 강조했다.

“아, 알겠습니다.”

결국, 두 어빌리티가 정확히 무엇인지 말해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스테치는 하는 수 없이 아지트로 돌아갔다. 그러자, 입구 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렛과 스카이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나눈 거야?”

“꼭 숨겨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건가?”

스테치는 말없이 데스트라를 돌아보았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들에게 진실을 말해 줄지 말지는 스테치의 판단에 맡기겠단 의미였다.

“들으면 골 아파지는 소리일 텐데.”

스테치는 은근슬쩍 스카이를 곁눈질했다. 그는 지독한 무신론자였던 탓에 지금도 데스트라를 못 미더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감춰져 있던 역사 일면을 알게 되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결국 스테치는 아무도 듣지 못하는 창고 구석탱이로 가서, 두 사람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들었던 내용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처음엔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진실에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럭저럭 납득하는 눈치였다.

무작정 아니라고 부정하기엔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많았다.

“그럴 줄 알았어!”

가렛은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베네지아의 왕은 타고난 악마였던 거야. 자기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이유도 이걸로 설명이 되는구먼. 이건 운명이야. 나라로부터 백성들을 구제하라는 신의 사명이라고.”

그러더니 그는 뜬금없이 데스트라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머리까지 조아리며 말했다.

“여신이시어! 저, 가렛 실버아이는 기꺼이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네 성이 실버아이였어?”

“신경 쓰인다는 게 고작 그거야?”

멍하니 묻는 스테치를 한심하다는 듯 흘겨보는 가렛. 한편, 스카이는 턱끝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위는 신경 안 써. 어차피 나한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진 않았으니까.”

데스트라에게 버릇없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예상과 달리, 그는 스테치가 들려준 이야기에 대해 딱히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너무 스케일이 큰 이야기라 그런지, 아예 철저하게 무시해 버리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그것보다도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거야.”

그가 말했다.

“왕자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저번과 같은 실수를 저지를 리가 없지. 패 죽인다고 해도 자기 발로는 성 바깥으로 안 나올걸.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가는 수밖에는 없는데…….”

스카이는 말끝을 살짝 흐렸다.

“일단은 수도에 주둔 중인 병력을 분산시킬 획기적인 방법이 필요해. 이쪽은 거기에 비하면 쪽수도, 힘도 부족하니까 말이야.”

스테치의 활약으로 카델트 대사막이 사라진 직후, 베네지아는 북부 전선을 유지시키기 위해 필요한 병력 대부분을 수도로 불러모았다. ‘더 이상 북부 전선을 유지시킬 이유가 없어졌으니까-’라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즉, 지금 수도에 몰린 방어 병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아진 상황. 아무리 메멘토 모템이라는 강력한 전력이 있어도 한정된 마력만으로 몇십만이 넘는 병력을 돌파한다는 건 무리다.

설령 가능하다더라도, 제라드를 상대할 힘이 빠지고 만다.

“계획을 세워 보자.”

* * *

며칠 후.

조용하던 베네지아의 왕성에서는 때아닌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지금 막 돌아왔다고 들었습니다!”

“장소는?”

“연병장에 긴급 의료동이 세워졌다고 들었습니다.”

왕가 직속의 경비대장이 전해 준 갑작스러운 소식. 북부 전선에서 물러선 이후로 하릴없이 책만 읽던 제라드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연병장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병장에는 새하얀 천막들이 여럿, 그리고 고통으로 신음하는 병사들로 가득했다.

“뭐……?!”

연병장은 상처가 감염되어 썩어들어 가거나, 곪아 터지는 부상자들로 수두룩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둘째 왕자 알프레드와 함께 동쪽의 레지아 계곡으로 나섰던 병사들이었다.

“이, 이봐!”

제라드의 외침에 소수의 병사들만이 빛을 잃는 눈동자를 그에게 향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말하는 제라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지휘관은…… 지휘관은 어디 있느냐?”

잠시 후, 붕대를 머리에 두른 누군가가 병사들 사이에서 절뚝거리며 걸어 나왔다.

“너는?”

“제1 보병 대대의 지휘관, 트로이 베커라고 합니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이름이다. 제라드가 황망한 시선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트로이는 옆에 서 있던 다른 이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는 무언가가 들어 있는 목함을 건네받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털썩!

“왕자님…….”

트로이가 제라드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대꾸도 하지 않고 목함 앞에 무릎을 꿇었다.

두렵다.

목함의 내용물로 무엇이 있을지는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지만, 제라드는 쉽사리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자 보다 못한 트로이가 대신 목함의 뚜껑을 열어 주었다.

그 순간, 구역질 나는 냄새가 확 밀려 올라왔다.

“…….”

둘째 왕자.

그리고 제라드의 부관, 발스톡의 목.

누구의 짓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으으아아아악!!”

비명에 가까운 절규가 왕성 전체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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