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은혜
(178/203)
178화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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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화 은혜
2022.03.28.
카델트 대사막의 마력풍이 소멸한 덕분에 북부와 자유로운 통신이 가능해진 스테치는, 수정구를 써서 카시아와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오래간만의 회포를 풀기엔 한시가 급한 상황.
스테치는 카시아에게 간단한 사정 설명을 해 준 뒤, 통신구를 가지고 케일럼 왕국의 시무스 의장을 만나 달라는 부탁을 전했다. 메시지 마법을 쓰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그녀의 협력은 필수였다.
다짜고짜 일국의 지도자와 대면하라니 황당하기 짝이 없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카시아는 북부 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상인 가문의 후계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군말 없이 선선히 스테치의 말을 따라 케일럼까지 가는 긴 여정에 올랐다.
그로부터 2주 뒤.
책상 위에 먼지가 쌓이기 시작한 수정구가 밝게 빛나자, 스테치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카시아?”
[지금 시무스 의장님하고 미팅 중이에요.]
카시아의 목소리가 수정구를 너머에서 들려왔다.
“벌써? 꽤 빠르네?”
[며칠 전에 드워프들이 만들어 낸 기계식 탑승물을 사용해 봤거든요. 확실히 돈값은 하더군요.]
어쩐지 ‘돈’이라는 부분에서 강세가 들어간 것 같았지만, 스테치는 애써 무시했다.
[통신구를 넘겨 드릴게요. 이걸 통해서 말씀하시면 될 겁니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가 스테치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오래간만이네, 스테치.]
시무스 의장이었다.
“의장님! 어떻게 지내셨나요?”
[좋지. 신자들이나 던전에 의한 피해 복구는 완벽하게 끝났거든. 이거 본의 아니게 돈을 떼먹은 꼴이 되어 버려서 미안하구만.]
“돈은 신경 안 씁니다.”
스테치가 말했다.
[그런가? 여하튼, 정말이지 깜짝 놀랐어. 갑자기 하덴브록 가문의 사람이 일대일 대면 신청을 해 왔길래. 자네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더라면 미팅까지 1주일은 더 걸렸을걸?]
시무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나와 연락을 취할 정도면 뭔가 긴히 할 말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이거 다 말하려면 엄청나게 오래 걸릴 겁니다. 주변에 카시아 이외에는 아무도 없죠?”
스테치는 벌써부터 지끈거리려는 머리를 살살 문질러 가며, 자신이 지금껏 겪은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남부로 넘어간 직후 엘프들의 마을에서 유물 목걸이를 건네받은 일, 그리고 우연찮은 계기로 데스트라의 코어를 찾아낸 일 등등. 미리 공언했던 대로 아주 긴 이야기였지만, 시무스는 중간에 말을 끊는 일 없이 끈기있게 들어 주었다.
“……이렇게 된 겁니다.”
한참 뒤, 스테치가 상황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의장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남부 연합국들은 죄다 한통속이라 저희를 도와줄 세력이 전무합니다. 사막을 건너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건 알겠지만…….”
말을 이어 나가던 스테치는, 문득 시무스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음을 눈치챘다.
“의장님…… 의장님?”
고장 났나 싶어 손목의 옷깃으로 수정구를 뽀득뽀득 닦아 보는 스테치. 그러자 때마침 시무스의 대답이 나왔다.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믿기 어렵군.]
희미하게 느껴지는 불신감.
[옛 신이…… 그것도 엘프들의 여신이 다시 되살아나셨다니. 그분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나, 스테치? 만약 자네 말이 거짓이라면…….]
“제가 고작 거짓말하려고 이 고생을 다 해 가면서 연락을 취했겠습니까? 게다가 방금 말씀드린 내용 대부분은, 여신님 본인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사실들투성이잖아요?”
황당하다는 듯 대꾸하는 스테치. 하지만 그 역시 시무스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신화 속에서나 전해져 내려오던 신이, 다시 눈을 뜨고 부활했다는 말은 누가 들어도 허무맹랑한 소리다. 덥석 믿어 주길 기대하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물론 나도 믿고 싶네. 정말로. 하지만 케일럼의 병력을 움직이려면 말만으로는 부족해. 눈에 보이는 증거라도 있다면…….]
‘음…….’
주변을 둘러보던 스테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그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엘레나와 눈이 마주쳤다.
“엘레나, 적당히 상대를 납득시킬 만한 방법 뭐 없을까?”
“……잠시만요.”
잠시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점점 파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데스트라의 의식이 신체의 주도권을 잡아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엘레나가 아닌 데스트라의 목소리였다.
“『증거라. 하긴 나 스스로조차 지금 내가 눈을 뜨고 있는 이 상황을 믿기 어려울 지경인데, 저들보고 믿으라고 하면 무리가 있겠지?』”
“좋은 아이디어라도 있으세요?”
“『지금 연락 중인 곳이 북부란 말이지? ……세계수가 있는?』”
데스트라의 뜬금없는 질문.
“예? 예.”
“『그렇다면…….』”
그녀는 스테치가 들고 있던 통신구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더니,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스테치나 프레야, 심지어는 시무스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원시적인 마법의 언어였다.
수정구에서 들려오는 언령에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시무스. 그때, 거대한 진동이 회의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종이나 다른 물건들이 굴러떨어졌다.
쿠르르르-.
“!”
의자 옆으로 쓰러질 뻔한 카시아를 붙잡고, 당황한 시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회의실 밖으로 물려 두었던 셸로어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는지,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닫아 두었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의장님! 지진입니다! 빨리 바깥으로 나오십시오!”
시무스는 셸로어들의 손에 이끌리면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냐……. 이건 지진이 아니라…….”
카시아와 함께 회의실을 떠나고, 복잡하게 얽힌 통로와 계단들을 지나 완전히 바깥으로 나온 시무스 일행은 세계수를 돌아보았다.
아치발의 신자들에 의해 한번 큰 손상을 입은 세계수는, 몇 개월이나 지난 지금도 이전만큼의 생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껍질은 갈라지고, 잎은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앞에 마법 같은 변화가 펼쳐지고 있었다.
“세계수가 흔들리고 있다!”
케일럼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계수의 내부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갈라진 껍질 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 생명의 기운이 나무 기둥을 타고 올라가면서 가지 끝까지 퍼지고, 세계수는 점점 푸른 초목의 기운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대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시무스와 케일럼의 모든 엘프들. 폭발적인 속도로 생장을 가속시키던 세계수가 급기야 곳곳에서 새하얀 꽃을 피워 올리자, 그들은 큰 충격을 받고 입을 쩍 벌렸다.
꽃?
세계수가 심어진 이래로는 처음 있는, 그야말로 전례가 없는 사태였다.
“『잘 된 건가? 그 정도로 충분한 답이 되었으면 좋겠군.』”
소란이 진정된 직후, 내내 수정구에서 전해져 오는 소리를 듣고 있던 데스트라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넋을 잃은 시무스는 처음 듣는 낯선 이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데스트라는 피식 웃었다.
“『너희들이 세계수라 부르고 있는 그 나무는 내 정수를 떼어내서 만들어 낸 창조물이지. 말하자면 내 일부나 다름없어. 노폐물을 털어 내고 생장 과정을 조금 빠르게 만들어 봤는데, 잘 먹혀든 것 같아서 다행이군.』”
시무스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수정구와 꽃이 만연한 세계수를 번걸아 쳐다보았다.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고작 말 몇 마디 한 정도로 가능하다고? 그런 그의 의문을 알아챘는지, 데스트라가 말했다.
“『원래부터 나의 일부였으니, 그 정도는 손가락이나 발끝을 움직이는 정도에 불과해. 따로 마력을 동원할 필요도 없지.』”
스테치 아텔리어는 데스트라가 완전히 힘을 되찾은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이 정도 행위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태연하게 벌이다니, 신이 아니면 또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세계수로부터 걸러져 나온 깨끗한 마력의 바람이 엘프들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짙은 초목의 향기다.
“『잘 들어라.』”
압도적인 신의 힘을 목격하고 전율하던 시무스는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수정구를 들여다보았다.
“『카인과 엑스턴, 그리고 나는 우리들의 문제를 자손들인 너희들에게까지 떠넘기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 그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지. 너희들이 나를 꼴사납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부탁한다. 지금 너희들의 도움이 없으면, 대륙 전체가 전란에 휩싸이고 만다. 신으로서가 아닌, 너희들을 낳은 어머니로서 부탁한다.』”
데스트라는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수정구를 사용해서 시무스에게 전달하는 말은, 시무스의 마법에 의해 케일럼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건…… 누가 하는 말이지?”
“어머니? 설마…….”
군중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말대로다!”
수정구를 한 손에 쥔 채, 시무스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에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었을 테니까.
“모두들 잘 들었겠지! 다시 부활하신 엘프의 여신께서,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셨다!”
당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확실히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기적, 그리고 케일럼 전체로 퍼져 나가는 낯선 이와 시무스의 발언.
들려오는 소리에 멍하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신.
“여신 데스트라 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모두 무기를 들고 싸울 준비를 하라! 신이 우리를 부르신다!”
* * *
“『……그래서?』”
[북부에 사는 모든 엘프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도록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남부로 따라나서겠다는 지원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시무스는 그녀에게 보고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이 순간, 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운 듯했다.
“『미안하다.』”
[사과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지금까지 여신님께 큰 빚을 졌습니다.]
그녀를 포함한 세 신들이 역사의 뒤에서 인류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해 왔는지, 시무스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케일럼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세계수는 그녀가 엘프들에게 베푼 은총이었다.
“『남부 왕국과의 직접적인 전투는 되도록이면 삼가도록 해라. 아치발의 신자는 사람의 죽음에서 발생하는 사기를 노리고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준비가 끝나면, 여신님이 바라시는 길로 나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