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집결
(179/203)
179화 집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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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화 집결
2022.03.29.
“대단하네.”
팔짱을 낀 채 지도를 들여다보던 가렛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를 단 하루 만에 처리해 버리다니. 굉장한 성과야.”
그러자 스테치의 옆에 서 있던 엘레나가 얼굴을 수줍게 웃으면서 말했다.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여신님이 다 알아서 해결해 주셨죠.”
‘신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시무스가 내세운 그 구호 아래, 케일럼 왕국의 엘프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왕국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 병력만을 남기고, 사실상 북부 대륙에 있는 모든 엘프들이 이번 싸움에 참여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케일럼의 갑작스런 움직임에, 인접하고 있던 두 국가도 그에 대한 반응을 내비쳤다. 크로마토스 제국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다는 심산인지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카시아는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하여 사일라스의 드워프들을 설득, 엘프들이 사막을 손쉽게 건너갈 수 있도록 드워프식 기계식 탑승물들을 여러 대 지원받았다.
덕분에 못 해도 2개월 이상 걸릴 예정이었던 계획이 엄청나게 앞당겨졌다.
“돈이 최고야.”
스테치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럼, 지원군은 결정됐네. 다음은 뭘 해야 하지?”
가렛은 둘둘 말린 채 통에 꽂혀 있던 커다란 종이 뭉치 하나를 뽑아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고, 스테치와 엘레나, 스카이가 가까이 모여들었다.
“뭐야, 이건?”
그것은 다름 아닌 베네지아의 수도, 알렌테의 지도였다. 하수 시스템은 물론이고, 경비의 배치와 스케줄부터 골목길 하나하나까지 모두 표시된 정밀 지도.
스카이가 휘파람을 불었다.
“이거 구하느라 제법 힘 좀 썼겠네?”
“사실, 지도는 한참 전부터 준비해 놓은 거야. 애초에 쓸 일이 없길 바랐지. 이 지도를 만들던 당시의 나는 왕가가 스스로 각성하길 바라는, 로맨티스트 그 자체였거든. 근데 나라가 돌아가는 꼴을 보니 그럴 날은 평생 안 오겠더라.”
가렛이 우울한 말투로 말했다.
“결국 왕이 대가리 맞아 뒈지지 않는 한, 베네지아는 구제될 길이 없다는 사실만 증명된 셈이지. 어찌 됐건, 이제 계산을 좀 해 보자고.”
그는 펜을 집어 들고선 지도 여기저기에 표시를 했다.
“부하들이랑 수도 근처를 기웃거려 봤는데, 지금 베네지아에 주둔 중인 병사들의 수는 어림잡아서 10만 가까이 돼.”
“10만!”
세 사람은 기겁했다. 둘째 왕자인 알프레드가 레지아 계곡으로 끌고 왔던 그 병사들조차도 1만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그런데 10만이라니?
스테치는 까마득하게 차이 나는 숫자에 끙- 하고 신음했다.
“나도 알아. 웃기지. 그만한 병사들을 먹여 살릴 식량은 어디서 나오나 싶었는데, 다른 남부 연합국이 지원으로 보낸 거의 대부분의 식량과 인력이 수도 쪽에 집중되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지금 이 순간에도 병사들의 수가 차곡차곡 늘어나고 있으니까, 더 힘들어지기 전에 손을 써야만 해.”
그는 지도 위쪽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바로 그래서 북부 엘프들의 역할이 중요한 거야. 수도에서 병사가 많이 빠져나갈수록, 우리가 진입하기 쉬워질 테니까. 어디…… 넉넉잡아서 수도에는 수비 병력이 대충 3~4만쯤 남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고.”
가렛이 말을 이어 나갔다.
“수도는 사면이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남과 북으로 2개뿐이야. 북부 엘프들이 제때 나타나 준다면 수도의 병사들은 북문 쪽 방어를 강화하겠지? 우리 의적단은 그 틈을 타 남문을 공략한다.”
“거듭 말하지만 난 너네랑 산적놀이는 안 한다고 얘기했다. 이쪽 수가 몇 명인데?”
스카이와 가렛이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한 2500쯤 되나? 것보다 우리 산적 아니다.”
일개 산적 집단치고는 저것도 엄청나게 많은 머릿수다. 하지만 3만이나 되는 병사들을 상대로 싸우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자 가렛이 덧붙여 말했다.
“최대한 많은 병사들을 왕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도록 유인하는 게 목표라니까. 되도록이면 직접적인 교전은 피할 테니까, 이 정도 쪽수 차이는 문제 없다고. 우리 부대 측 지휘는 스카이랑 아가씨가 맡아 줬으면 좋겠어.”
“넌 어쩌게?”
스카이의 질문에 가렛은 동쪽과 서쪽의 성벽을 가로지르는 화살표를 각각 하나씩 그려 넣었다.
“그사이 나는 동쪽이나 서쪽, 둘 중 하나를 골라서 스테치와 함께 성벽 너머로 도약할 거야. 잘만 먹히면 왕성까지 최단 루트로 깔끔하게 직행할 수 있을걸?”
그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아티팩트, 타른카페를 펄럭여 보였다. 그러자 엘레나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만약 병사들이 눈치채고 왕성으로 돌아오거나 하면 어쩌죠?”
“그러니까 그전에 끝내야지, 아가씨. 잊지 마. 우리들의 목표는 결국 왕과 왕자야. 스테치가 성안으로 들어가서 모가지를 따 버리면 게임 끝이라고.”
“이거…… 굉장히 빡센 스케줄인데? 까딱 잘못하면 쪽도 못 쓰고 당하겠어.”
병력의 숫자가 아니라 부대를 지휘하는 스카이와 엘레나의 개인적인 무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언밸런스하고 비상식적인 전략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 우리가 가진 전력으로는 이게 최선이고……. 게다가 시간적 여유도 없단 말야.”
하소연하듯 대꾸하는 가렛. 그런 그에게 스테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알고 있는데.”
“뭐? 누구?”
그러자 스테치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런데 너희들은 이 친구를 별로 안 좋아할 수도 있어.”
지목받은 가렛과 스카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손이 부족한데 그 정도쯤이야. 그럼 그쪽은 너한테 맡길게.”
지도를 도로 말고 구석탱이에 던져 놓은 가렛은 아지트 입구 쪽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잠깐 나가 볼게. 며칠 걸릴 거야.”
“볼일 다 끝났으면 난 가 본다.”
스카이가 주섬주섬 보호 장비를 걸치고 작업실로 되돌아가려 하자, 스테치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뭐?”
“뭘 만들든지 간에, 적당히 해라.”
그러자 스카이는 스테치를 비웃어 대며 말했다.
“지X. 난 내가 만들고 싶은 것만 만들어.”
* * *
“남아 있는 스트라이더 부대가 모두 집결했습니다.”
어둠의 숲.
평소 한산하던 마을은 단단히 무장을 한 스트라이더들로 바글바글했다. 베네지아 왕국의 공격을 겪고 난 이후로, 엘프들의 경계는 극에 달해 있었다.
“인원수는 충분하니 4교대로 외곽 경계를 서 주게. 무슨 일이 생기거든 즉시 연락하고.”
마르크의 지시를 들은 엘프가 묵례를 올리더니, 훌쩍 뛰어올라 수풀 너머로 사라졌다.
이드릴과 그녀의 기습 부대를 성공적으로 격퇴시킨 마르크. 그의 명성과 활약상은 숲의 다른 마을까지도 전해졌다. 그 때문에 모든 엘프들이 인간인 그의 지시를 거부감 없이 따르게 되었다.
“일은 잘돼 가나?”
한창 다른 볼일을 보던 케인이 나타나 그에게 물었다. 마르크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장로님.”
“다른 마을에서 지원도 왔겠다, 이제 조금은 쉬엄쉬엄해도 될 텐데.”
그의 말을 들은 마르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북부의 셸로어가 마법의 대가라면, 남부의 스트라이더는 신체 능력을 극한까지 단련시킨 전투 요원들이다. 케인이 저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르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베네지아는 집요합니다. 단 한 번의 국지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서 결코 방심해선 안 됩니다. 적어도 지금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마르크도 내심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숲을 태워 버리면서까지 어둠의 숲 엘프들을 공격해 왔던 그 베네지아가, 단 한 번의 패배로 완전히 물러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원래 마을에는 없던 방책까지 마련해 놓고 24시간 내내 철통같은 보안 태세를 유지 중이었는데, 이런 대비가 무색하도록 베네지아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베네지아의 국왕은 대체 뭘 노리고 있는 거지…….’
그때, 하늘을 올려다보던 마르크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저건……?”
불꽃처럼 일렁거리는 푸른 마력이, 새의 형상을 띤 채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고 있었다. 공중에 O 자를 그리며 선회하던 새는, 마르크와 케인을 발견하자마자 수직으로 방향을 틀어 번개처럼 지면으로 내리꽂혔다.
콰악!
“저건…….”
“메시지 마법이군요.”
땅바닥 깊숙이 박혀 있는 화살에 원통형 케이스가 매달려 있었다. 끈을 풀고 통을 뒤집어 보니 편지 뭉치가 쏟아져 나왔고, 마르크는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을 더더욱 찌푸렸다.
적혀 있던 글귀를 절반도 채 읽지 못하고, 마르크는 케인에게 편지를 넘겨주어야만 했다.
“저는…… 뭐라 할 말이 없군요. 장로님이 먼저 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
케인은 종이 위에 적힌 딸의 글씨체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천천히 내용을 읽어 가던 그는, 곧 마르크가 왜 편지를 보고 곤란해했는지 깨달았다.
편지에는 도저히 한 번에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많은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그중에서도 케인의 눈길을 끈 부분은 물론, 유물 목걸이가 박살 났다는 부분이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심정이었다.
‘내가 그걸 준 이유는 무사히 가지고 되돌아오란 의미였지, 마음대로 뽀개 먹으란 소리가 아니었단다!’
소리 없는 절규를 토해 내는 케인.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문구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들어 있던 온갖 잡생각들이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뭐…….”
여신의 부활.
베네지아를 향한 대대적인 공격 계획.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부 엘프들의 참전.
엘레나가 스테치와 함께 뭔가 심상찮은 일을 벌이고 다닌다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엄청난 계획을 꾸미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여신?’
선뜻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여신을 일깨울 단서가 유물 목걸이에 담겨 있고, 자신이 그걸 타이밍 좋게 딸에게 넘겨줄 확률이 대체 몇이나 될까?
“……다 읽었네. 자네를 찾는군.”
마르크 맥도웰에게 전해 주라는 또 하나의 편지. 케인에게서 종이를 넘겨받은 마르크는, 그것을 펼쳐 보자마자 무슨 내용인지를 단숨에 알아보았다.
수도 알렌테를 공격하기 위한 대략적인 작전 개요와 지도.
“마침내.”
꼼꼼히 지도를 살펴보던 그는, 흉터로 가득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종이를 품 안에 욱여넣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 가 봐야겠습니다.”
“어딜?”
케인이 짐짓 모르는 척하며 묻자, 그가 말했다.
“저를 부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 가 봐야 한다면 어쩔 수 없지. 마을을 지켜 줘서 고마웠네.”
말없이 케인과 악수를 주고받는 마르크. 그는 옆에 챙겨 두었던 자기 짐을 등에 걸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 밖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