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폭풍전야
(180/203)
180화 폭풍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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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화 폭풍전야
2022.03.30.
양팔을 좌우로 길게 펼치고, 어둑한 방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남성. 병사들은 그런 그를 둘러싸고, 들고 있던 갑옷 조각들을 입혀 주기 시작했다.
끈을 조이고, 조임쇠를 고정시키고.
복잡한 일련의 작업이 끝난 뒤, 병사들은 흘러내리는 구슬땀을 훔쳐 내며 공손히 뒤로 물러섰다.
“다 됐습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
묵묵부답.
병사들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했다.
“왕께서 찾으십니다. 이쪽으로.”
철커덕- 철커덕-
방을 나선 남성은 왕성 내부의 어둑어둑한 복도를 걸어갔다. 성안을 돌아다니던 시종들은 남성의 얼굴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결같은 발걸음을 이어 가던 남성은, 이윽고 호위병들이 지키고 있는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슬며시 남성과의 시선을 피하며 호위병들이 문을 두들기자, 그 너머에서 신체루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라 해라.”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입구에서 호위병 둘이 문손잡이를 붙잡았다.
끼이익-.
알현실로 들어서는 남성. 바닥에 깔린 빨간 융단을 밟고 천천히 걸어가던 그는 왕의 앞에 부복했다.
잠시 후, 신체루스가 물었다.
“……속은 좀 풀렸느냐.”
남성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림자로 가려져 있던 얼굴이 횃불의 빛을 받아 드러났다.
그는 다름 아닌 제라드 메서였다.
“그날 이후로 3주째인가? 제법 좋은 얼굴을 하게 됐군.”
좋은 얼굴이라고?
제라드는 신체루스의 말에 속으로 코웃음 칠 수밖에 없었다.
정돈되지 않아 까슬까슬하게 돋아난 수염. 거기에 핏발 선 두 눈은 그동안 제라드가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에 휩싸인 채 지내 왔는지를 똑똑히 알려 주고 있었다.
가족보다도 소중한 부관과, 형제의 썩어 문드러져 가는 머리통을 직접 받아 든 제라드. 그날 이후로 그는 스테치 아텔리어를 죽이겠다는 일념하에, 피눈물을 흘리며 복수의 칼날을 갈아 왔다.
칠흑같이 어둡고 묵직한 그의 갑옷이야말로, 스스로가 얼마만큼의 결심과 각오를 다졌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미래시가 보였다.”
“…….”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사흘 뒤, 북부의 엘프들이 떼거리로 몰려올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카델트 대사막이 소멸한 직후, 신체루스는 북쪽으로 사람을 상호 불가침 할 것을 요구했다. 북부 국가들도 이를 받아들였을 터. 그런데 엘프들은 왜 굳이 이 약속을 깨면서까지 남하하려 드는 걸까?
신체루스가 말했다. 그리고 제라드는 그가 하는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다. 어쩌면 스테치 아텔리어……. 그 녀석이 이 모든 사태의 배후에 있을지도 모른다.”
신체루스와 제라드의 시선이 교차했다.
너의 때가 왔노라고.
왕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조용히 묻어 두었던 분노가 다시금 스멀스멀 피어오르면서, 제라드의 오른팔을 대신하고 있던 아티팩트 ‘타이런트’가 검은 아우라를 발산했다. 가시화돼서 눈에 보일 정도로 흉흉하게 뿜어내는 그 기세에, 옆에 서 있던 이들이 기겁했다.
철그럭-.
“갑옷이 제법 몸에 맞나?”
신체루스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 녀석은 네 주문에 맞춰서 제작된 특수 갑옷이다. 네가 임하려는 싸움에서 필시 큰 도움이 되겠지.”
“……고맙습니다.”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온 순간이었다. 쇠로 쇠를 긁어 내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에 다른 대신들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제라드의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건틀릿이 끼워진 손을 쥐락펴락하자, 이두근과 전완근을 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손가락의 말단부까지 퍼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언제부터였지?’
갑옷을 입은 그때부터? 아니다.
본격적인 변화가 시작된 시점은 첫째 왕자가 실종되고, 둘째 왕자가 사망했을 때쯤.
단순히 분노나 복수심 때문에 느끼는 착각이 아니었다. 자신의 형제가 죽거나 사라질 때마다, 그의 몸은 점점 더 강해져 가고 있었다.
‘……뭐, 이제 와서 그런 걸 궁금해하는 것도 웃기지만.’
제라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스테치 아텔리어.
설마 단 한 번의 잘못된 인연으로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까지 꼬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제라드는 서서히 끓어오르려는 속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그놈의 이름, 얼굴, 목소리. 떠올릴 때마다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힘은, 분명 스테치를 박살 내라고 주어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걸 따를 뿐이었다.
“본래대로라면 북방 장군인 네가 북쪽으로 나가 봐야겠지만,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다고 들을 것 같지는 않구나. 북쪽의 엘프들에 대한 견제는 병사들에게 맡길 테니, 너와 서방 장군은 수도를 방어해라.”
제라드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나 알현실을 떠났다.
아버지는 지금 어떤 생각을 품고 나를 쳐다보고 있을까?
왕을 등진 제라드의 얼굴에는 목석처럼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비록 자신의 부관과 형제를 죽인 사람은 스테치 아텔리어지만, 두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은 이는 사실상 아버지인 신체루스였다.
그리고 제라드는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기대하시죠, 아버지. 내가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당신을 가장 먼저 찢어 죽일 테니까.’
* * *
“《서지》!”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전류의 파도가 던전 거인형 키퍼의 전신을 휘감았다. 키퍼가 경련을 일으키느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스테치는 검을 뽑아 들고 《싱크로》를 시전했다.
푸욱-!
공중으로 높이 뛰어오른 스테치는, 역수로 쥔 할로우 블레이드를 키퍼의 쇄골 틈새에 쑤셔 넣었다.
“《코어 블라스트》!”
거품이나 풍선처럼 큼지막하게 부풀어 오르던 키퍼의 상반신이 폭발하면서, 깊숙이에 숨겨져 있던 핵이 드러났다. 심장처럼 두근거리는 핵을 비틀어 쥔 스테치는, 그것을 단숨에 뽑아 버렸다.
푸확!
비틀거리던 키퍼는 살짝 몸이 기우는가 싶더니,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끝까지 검을 붙잡고 있던 스테치는, 안면으로 쏟아져 내린 뜨끈한 피를 팔뚝으로 훔쳐 내며 검을 뽑았다.
“커스 이팅.”
피와 시체가 푸른 빛의 마력으로 녹아내려 반지로 빨려들어 갔다. 스테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터덜터덜 던전의 최심층부로 들어갔다.
『이제 이 정도 던전은 누워서 떡 먹기인가 보네.』
프레야가 중얼거렸다. 실제로 스테치가 던전을 클리어하는 데 걸린 시간은 5분 안팎. 심지어 그 과정에서 생채기 하나조차 나지 않았다.
파앗!
아티팩트를 회수한 스테치가 던전 바깥으로 무사히 빠져나오자 프레야가 물었다.
『이제 2~3일 뒤면 작전 결행 일인데, 왜 벌써부터 힘을 빼는 거야? 마력은 이미 다 채웠잖아.』
“마력이 아니라, 다른 마법을 익힐 수 있나 싶어서 도는 거야.”
새로 획득한 아티팩트의 성능이 시답잖은 것을 확인한 스테치는 그대로 커스 이팅을 사용해 반지로 흡수시켰다. 머릿속으로 새로운 종류의 마법에 대한 정보가 흘러들어 오자, 스테치는 손가락을 튕겼다.
“봤지?”
북부 엘프들의 부대가 도착 예정까지 사흘 남았다고 통보를 해 온 어느 날.
스테치는 레지아 계곡 여기저기에 널린 군소 던전들을 돌면서, 다가오는 싸움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오늘 파괴한 곳만 벌써 5개째. 덕분에 여러 유용한 마법들도 익히고, 마력을 더더욱 축적시켜 놓을 수 있었다.
“말 나온 김에 오늘은 이만 슬슬 돌아갈까? 안 그래도 살짝 지치는데.”
스테치는 발걸음을 돌려 가렛의 아지트로 돌아갔다.
잠시 후.
해가 지고 하늘에 노을이 낄 무렵이 되어서야 아지트로 도착한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계획이 막바지 단계에 접어든 탓인지, 아지트 내부에서는 근육질의 장정들이 정신없이 일하는 도중이었다.
그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끼어 있었다.
“부탁한 물건은 가져왔냐?”
아지트 구석탱이에 앉아 있던 스카이가 스테치의 모습을 보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스테치는 품 안에 들어 있던 작은 병과 주머니들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거면 충분하냐?”
“데일게라스의 기름, 거기에 마정화의 꽃잎……. 제대로 가져왔군.”
고맙다는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등을 휙 돌려 어디론가 향하는 스카이. 스테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자식, 대체 이번엔 또 뭘 만들려고 저런 재료들을 구해 달라 한 걸까.』
“……이제는 알고 싶은 생각조차 안 들어.”
비록 스테치나 가렛이나 완전무결한 불살주의를 신봉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대적이지 않은 일반인까지 마구 학살해 대는 미치광이는 아니었다.
스카이가 만들어 낸 물건들의 위력이 아무리 훌륭해도, 아군이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버리면 그건 그냥 애물단지에 불과하다. 그래서 너무 과한 짓은 하지 말라고 경고한 스테치였으나, 스카이는 그 말을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오늘은 저녁이나 먹고 일찍 자…… 음?”
스테치는 막 방에서 얼굴을 내밀고 주위를 둘러보는 엘레나를 발견했다.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니, 그녀는 작게 손짓하여 스테치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스테치가 들어오자,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던 엘레나가 옆자리를 탁탁 두들겼다.
“뭐야? 무슨 일인데?”
“그냥……. 이제 며칠 뒤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불안해서 혼자 있질 못하겠더라고요.”
“불안하다고?”
“아텔리어 씨는 안 그래요?”
엘레나는 물었다.
결국 베네지아의 왕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스테치는 신체루스가 파 놓은 함정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엘레나가 걱정스러워하는 것은 바로 그런 문제였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스테치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엘레나를 쳐다보았다.
불안했다.
어쩌면 그가 때아닌 던전 탐험에 그토록 몰두하는 이유도, 사실은 그런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한 무의식의 발현이었다.
스테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엘레나는 말없이 양팔을 벌렸다. 스테치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싶었으나, 결국 포기하고는 그대로 그녀의 품에 안겼다.
“잘되겠죠.”
“……그랬으면 좋겠다.”
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눈을 감고 있던 스테치는 엘레나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선 품에서 빠져나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
어째선지 시선을 피하고 있는 엘레나. 방 안이 어두워서 눈치채기 힘들었지만, 희미하게 상기되어 있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스테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엘레나는 그를 곁눈질해 댔다.
“……?”
뭐지?
어리둥절해하는 스테치. 엘레나는 그런 그를 슬쩍 끌어안고, 그대로 함께 침대 위에 쓰러져 버렸다.
* * *
“스테치, 어디 있냐?”
아지트 안을 돌아다니면서 스테치를 찾는 가렛. 아지트 내의 복도를 거닐던 그는 엘레나의 방문 옆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프레야를 발견했다.
손짓으로 대충 인사한 가렛이 엘레나의 방문을 두들기려 하자, 프레야는 그의 손목을 거의 부러뜨릴 정도로 강하게 비틀어 잡았다.
“아파아아-! 뭐 하는 짓이야, 이게?!”
“쉬잇-.”
프레야는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내며 윽박질렀다.
“지금 들어가면, 너는 내 손에 뒤질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