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4화 사면초가 (3) (184/203)


184화 사면초가 (3)
2022.04.03.


“사람들이 안 보이는데?”

골목 깊숙한 곳에서 벗어나 큰길로 빠져나온 스테치는, 기이할 정도로 인적이 드문 거리를 보고선 중얼거렸다. 그러자 가렛이 말했다.

“도망갈 곳이 없으니까, 집에라도 틀어박혀서 벌벌 떨고 있는 것 아닐까.”

수도 알렌테는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수도를 빠져나갈 유일한 출구인 북문과 남문이 전투로 인해 막혀 있으니,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그저 전투의 여파가 자신들에게까지 미치지 않기를 빌며 집 안에 숨어 있는 수밖에 없었으리라.

“덕분에 우리는 편해졌으니 좋지, 뭐.”

왕자가 성에 틀어박혀 있다는 사실은 첩보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이제는 확실히 알겠어. 녀석의 기척이 느껴진다.’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스테치는 본능적으로 제라드가 성안에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으로 돌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애들은 잘하고 있겠지?”

한창 왕성을 향해 내달리던 스테치의 질문에 가렛이 답했다.

“그쪽 걱정은 하지 마. 다들 자기 목숨 정도는 충분히 챙길 수 있는 친구들이니까. 넌 그냥 네 일에만 집중해.”

본래대로라면 가렛도 곧장 남문이나 북문의 일행들에게로 되돌아가 합류할 생각이었지만, 마르크 맥도웰이라는 상정 외 전력이 추가되면서 스테치를 따라갈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났다.

“다 왔다!”

멀리에서 흐릿하게 보이던 왕성이 선명해질 무렵. 굳게 닫힌 왕성의 입구가 스테치의 눈에 들어왔다.

‘진짜 어마무시하게 크네.’

옛날에도 수도에 와 본 적은 몇 번인가 있었지만, 왕성을 가까이에서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크기는 스테치가 봐 온 어느 요새나 성보다도 거대했다.

캐슬 브랜든은 그야말로 베네지아가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축적해 온 부의 상징, 그 자체였다.

입구 근처에 한발 먼저 도착한 가렛이 손을 내밀자, 스테치는 그것을 붙잡았다.

파앗!

짤막한 섬광과 함께 사라지는 두 사람. 그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장소는 다름 아닌 왕성 내부였다.

“어, 어?!”

“왔다! 왔다고!”

벌벌 떨며 캐슬 브랜든의 수비를 맡고 있던 병사들은, 본성의 내벽을 단번에 뚫고 들어온 스테치와 가렛의 모습을 보고 크게 당황하여 외쳤다. 스테치가 헛구역질을 하느라 바닥에 주저앉은 동안, 근처에 있던 병사 하나가 할버드를 휘둘러 대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

그러자 허공에서 튀어나온 프레야의 발길질이 병사의 머리통에 적중했다.

콰기긱-!

머리에 씌워진 투구가 종잇장처럼 우그러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력. 발뒤꿈치에 힘을 주어 상대를 쳐 날려 버린 프레야는, 바닥을 나뒹구는 병사를 향해 코웃음을 날리며 바닥에 착지했다.

“너네가 간덩이가 부었구나. 뭘 믿고 앞에 나서는 건데?”

“타이밍 좋고!”

스테치를 부축해서 일으킨 가렛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파바박!

머리 위로 빗발치듯 쏟아지는 화살들. 그러나 그 자리에 이미 스테치는 없었다. 몇 미터쯤 떨어진 위치에 가렛과 함께 다시 나타난 스테치는, 위액을 게워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웨에엑!”

“조무래기는 나랑 저 아가씨가 맡을 테니까 넌 먼저 가!”

등을 떠미는 가렛에게 간신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스테치는 왕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문을 부수거나 병사들을 상대하느라 쓸데없이 마력을 소모했을 것이다.

왕성 내부로 들어온 스테치. 등 뒤의 입구가 닫히고, 그 너머로부터 병사들과 치고받는 두 사람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터벅, 터벅.

이상할 만치 어두운 통로, 그리고 생소하기 짝이 없는 왕성의 내부 구조. 그러나 스테치는 《패스파인딩》 스킬의 도움 없이 능숙하게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갔다. 앞서 느꼈던 제라드의 기척은 왕성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선명해져 가고 있었다.

잠시 후, 성의 그랜드 홀에 다다른 스테치.

그는 막 발을 내디딘 자세 그대로 멈칫하더니, 반지를 내밀어 불을 밝혔다. 캐슬 브랜든의 그랜드 홀은 그 큰 공간이 무색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스테치는 자신의 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

제라드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 기척은 누구의 것이지? 스테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홀 한가운데까지 걸어가자마자, 지면에 짙게 깔린 그림자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읏!”

콱!

백스텝으로 빠짐과 동시에, 바닥에서 거대한 그림자의 턱이 솟아올라 스테치가 있던 자리를 덮쳤다. 잇따라 사방에서 찌르고 들어오는 그림자 스파이크들. 스테치는 몸을 날려 그것들을 피하는 한편,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를 공격하고 있는 이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림자를 조작하는 능력……. 상대는 서방 장군인가?’

서방 장군, 이드릴 헨리에타. 직접 마주 보고 겨뤄 본 적은 없지만, 그녀의 능력에 대해서는 스카이와 가렛에게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분명히 주변이 어두울수록 강해지는 능력이라고 했던가.

‘과연, 그래서 주변이 이렇게 어두웠었구나.’

어차피 기습에 실패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드릴은 모습을 내보일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스테치는 하는 수 없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왜 저래?’

그림자 속에 녹아든 채 빗발 같은 공격을 퍼붓던 이드릴은, 스테치가 하는 행동을 보고선 의아해했다. 그러나 호기심이 깃들어 있던 그녀의 눈길은 곧 공포로 물들었다.

카앙!

고문 기구 아이언 메이든처럼, 날카로운 가시들을 형성하여 스테치를 감싼 그림자가 무언가에 튕겨 나가며 불똥을 튀겼다. 팔과 다리 주변에 떠오른 반투명한 기운이 이드릴의 그림자를 막아 내고 있었다.

당황한 이드릴의 등골을 타고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엄습해 왔다.

‘뭐야, 저건? 저것도 마법인가?’

그 어떤 방패나 마법사도 주문도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낸 적은 없었다. 하물며 지금 그녀의 능력은 그랜드 홀의 어둠으로 인해 배 이상으로 강해진 상태. 그런데 대체 어떻게?

이드릴이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는 사이, 《싱크로》를 시전한 스테치의 몸 전체에서 황금빛 마력이 터져 나왔다.

파앗!

스테치를 씹어먹을 기세로 옥죄던 그림자가 점점 밀려났다. 황금빛 마력을 손에 두른 스테치가 손을 번쩍 치켜들자, 그 모습을 본 이드릴의 머릿속에 적신호가 켜졌다.

‘……안 돼!’

무슨 짓을 할 심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가다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드릴은 품 안에 들어 있던 디스펠륨 폭탄을 꺼내 불을 붙인 뒤, 그림자 바깥으로 던졌다.

퍼엉-!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폭탄이 이내 폭발하고, 미세한 디스펠륨 입자를 공기 중에 퍼뜨렸다. 동방 장군 마르크의 보고서에 따르면, 마법을 봉인하는 전술이 스테치 아텔리어를 상대로 꽤나 잘 먹혀들어 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먹힐 터.

그러나 디스펠륨 입자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려 있는데도, 스테치가 발하는 황금빛 마력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딴 수에 또 당할 줄 알았냐?”

스테치가 비아냥거렸다. 어빌리티 싱크로는 반지와 신체의 결속력을 배가시키고, 마력을 강제로 순환시켜 고순도로 정련한다. 디스펠륨 조금 뿌린다고 해서 지워 버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이드릴이 채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스테치는 황금빛으로 물든 손을 치켜든 뒤 그대로 지면을 향해 내리꽂았다.

그림자가 그녀의 수족이 되어 움직이고 있다면, 스테치는 그걸 역이용해 줄 뿐이었다.

“《코어 블라스트》!”

그 순간, 그림자 속을 유영하던 이드릴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의 몸은 그림자 바깥으로 튀어나와 그랜드 홀의 차가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크학!”

검은 그림자와 뒤섞인 피를 입에서 토해 내며, 이드릴은 떨리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

혼란스러운 그녀의 귓전으로, 스테치가 걸어오면서 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이드릴 헨리에타냐?”

그랜드 홀 전체에 울려 퍼지는 스테치 아텔리어의 말. 주체할 수 없는 수준의 심한 경련을 일으키는 와중에도, 열심히 고개를 돌린 이드릴은 곧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스테치와 눈이 마주쳤다.

포식자의 눈.

그것을 마주한 이드릴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압도적인 공포를 느꼈다. 마치 그녀를 동등한 인간으로조차 보지 않겠다는 듯한,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시선이었다.

“어, 어떻게-.”

숨을 쉬기 위해 빨아들인 서늘한 공기가 그녀의 폐부를 가시처럼 따끔하게 찔렀다. 대체 어떤 요행을 썼길래 그림자 속에 안전하게 몸을 담그고 있던 그녀에게 직접 대미지를 입힌단 말인가.

“이유 따윈 몰라도 돼.”

스테치가 말했다.

콰직!

할로우 블레이드의 날이 이드릴의 관자놀이를 뚫고 바닥까지 파고들었다. 그러나 스테치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검이 그녀의 머리통을 관통하자마자 얼굴을 팍 찡그렸다.

‘쓰잘데기없는 잔재주…….’

그가 죽인 것은 이드릴이 사활을 걸고 내보낸 그림자 분신이었다. 본체를 대신하여 죽은 이드릴의 분신이 그림자가 되어 녹아내리자, 스테치는 말없이 재차 《코어 블라스트》를 사용했다.

투쾅!

“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이 이드릴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5미터.

아직 5미터밖에 벗어나지 못했건만, 스테치는 또다시 그녀를 붙잡는 데에 성공했다. 이드릴은 당장이라도 터져 오를 것만 같은 가슴을 움켜쥐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죽는다.

정말로 죽는다.

‘젠장…… 젠장!’

안면으로 땀과 눈물, 그리고 침으로 범벅된 액체를 흘려 대며 이드릴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능력이 먹히고 말고를 따질 순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드릴은 자신의 안이하기 짝이 없는 판단력을 저주했다.

둘째 왕자와 그의 병력이 스테치 아텔리어와의 싸움으로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이라면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은연중에 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결국 이거였다.

“그만.”

할로우 블레이드로 이드릴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는 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랜드 홀 저편에서 들려왔다. 스테치가 조용히 고개를 돌리자, 검은 갑옷의 사내가 어둠을 뚫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절그럭.

투구가 벗겨지고, 그 안에 있던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핏발 선 눈과 헝클어진 머리카락.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스테치.”

“제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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