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폭군
(185/203)
185화 폭군
(185/203)
185화 폭군
2022.04.04.
“물러서라, 장군.”
“왕자님!”
이드릴은 바닥에 쓰러진 채 숨을 헐떡이며 제라드를 돌아보았다.
“자네의 힘으로 어찌해 볼 상대가 아니라고 누차 얘기했는데, 왜 이런 독단 행동을 벌였지? 그렇게나 내 말이 우습게 들렸나?”
제라드의 말에 이드릴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스테치 아텔리어를 혼자 힘으로 잡을 수만 있다면, 지난번의 실패와 함께 모든 것이 용서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자만의 결과는 최악의 형태로 그녀에게 되돌아왔다.
이드릴은 스테치의 정신이 다른 데에 팔린 틈을 타 그림자 안으로 녹아들더니, 제라드의 앞에 부복한 채로 나타났다.
“죄,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를…….”
“됐다.”
이드릴의 머리에 흉측하게 생긴 오른손을 얹은 제라드. 스테치는 그제야 제라드의 팔 한 짝이 의수로 교체되어 있음을 눈치챘다.
거대한 몬스터의 척추라도 떼어다 붙인 것처럼, 수많은 뼈마디로 구성된 오른팔. 스테치는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으윽……. 꺄아아아아악!”
갑자기 이드릴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에 맞춰서, 이드릴의 머리 위에 얹은 제라드의 의수가 어느새 위아래로 꿈틀대고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생기를 잃고, 찰랑거리던 머리카락은 색이 빠져 하얗게 변했다.
스테치의 눈에는 그것은 흡사 그의 팔이 이드릴을 ‘잡아먹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쯧.”
보다 못한 스테치는 《라이트닝 스피드》로 신체에 가속을 걸었다.
카앙!
육안으로 포착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스피드로 돌진한 스테치는, 할로우 블레이드를 휘두른 자세 그대로 제라드를 노려보았다. 이드릴을 붙잡고 있던 제라드의 의수는 스테치의 검에 밀려나 있었다.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난 이드릴의 몸이 땅에 떨어졌다.
털썩.
“꺼으윽-, 콜록! 콜록!”
조금만 늦었더라면 아예 숨이 끊어졌으리라.
이드릴은 고통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왕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자신과 마주 보는 제라드의 시선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이드릴은 거의 기다시피 움직여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왜……?”
그녀는 스테치와 제라드를 번갈아 보더니 중얼거렸다. 왕자가 굳이 자신을 죽이려 한 이유도 이유였지만, 이제 와서 스테치가 나서서 구해 준 이유도 궁금했다.
그러자 스테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드릴의 의문에 답해 주었다.
“난 그냥 이 새끼가 하는 일이면 뭐든 다 아니꼬워서 훼방 놓는 것뿐이야. 살고 싶으면 조용히 꺼져.”
이미 그녀의 몸은 도저히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스테치의 말에 이드릴은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서더니, 보기만 해도 위태로움이 느껴질 정도로 불안정한 발걸음과 함께 그랜드 홀을 빠져나갔다.
이드릴이 완전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을 확인한 스테치는 제라드에게 말했다.
“이야, 너 성깔 쥑인다? 어떻게 그렇게 X 같은 행동만 골라서 하냐?”
카가각-.
제라드의 의수와 맞대고 있는 스테치의 손이 덜덜 떨려 왔다. 장식용으로 단 물건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오른팔을 통해 발휘되는 제라드의 힘은 스테치를 천천히 압도하고 있었다.
“너…….”
스테치를 응시하던 제라드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시종일관 냉정함을 유지하던 그에게 처음으로 분노의 기색이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감히 내 부하에게 그딴 짓을 해 놓고, 뻔질나게 내 앞에서 나타나서 주둥이를 놀려?”
그가 말하는 부하란 다름 아닌 죽은 그의 부관, 발스톡을 말하는 것이었다. 스테치는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방금 네가 죽이려고 한 사람도 소중한 부하 아니었냐?”
감비니 요새에서의 재회가 감정을 마구 터뜨리는 활화산 상태였다면, 지금은 언제 터질지 모르게 조용히 끓고 있는 휴화산과도 같았다.
콰캉!
몸 전체를 비틀어 휘두른 스테치의 검과 제라드의 의수가 재차 격돌했다. 흡사 금속끼리 부딪치는 듯한 충돌음이 나면서, 제라드와 스테치는 상대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그리고 너.”
스테치가 입을 열었다.
“대체 몸뚱이에 무슨 짓거리를 한 거야?”
우우웅-.
스테치의 손에 들린 검이 미세한 진동과 함께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아치발의 신자나 검은 아티팩트 때처럼, 할로우 블레이드는 제라드를 상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네가 알 바 아니다.”
제라드는 그렇게 대꾸하더니 말했다.
“새삼스럽지만 칭찬해 주지. 이렇게나 내 골머리를 썩인 놈은 네가 처음이다. 일개 모험가가 달성할 수 있는 업적 중에서도 아주 정점을 찍으셨군그래, 스테치 아텔리어.”
그의 말에는 비아냥과 진심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왕자인 그의 입장에서는 그저 쓰고 버리기에 적당한 인물을 골랐을 뿐이었는데, 설마 그 선택이 치명적인 독이 되어 그의 인생 전체를 망가뜨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내 업적은 널 조지기 전까진 안 끝나.”
스테치는 그렇게 말하며 검극을 제라드에게로 겨눴다.
“《아이스 웨이브》!”
새하얀 냉기가 바닥을 얼려 가며 앞으로 나아가더니, 제라드의 발을 얼려 버렸다. 그와 동시에 스테치는 홀 한가운데로 높이 도약했다.
“흐아아앗-!”
폰두스의 힘으로 증량된 검을 휘두르며 수직으로 낙하하는 스테치. 그러나 할로우 블레이드의 날이 채 제라드의 머리를 쪼개기 전에, 의수형 아티팩트 ‘타이런트’가 이를 가로막았다.
“짜식, 보기보다 꽤 단단하네.”
카가각-.
그 순간, 타이런트는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늘어나더니 순식간에 공중에 떠 있던 스테치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스테치는 당황하지 않고 너클 낀 오른손 주먹을 제라드의 의수 뒤꿈치 쪽에 때려 박았다.
투쾅!
플라즈마 제트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ㄱ’자로 꺾이는 타이런트. 바닥에 착지한 스테치가 《싱크로》를 시전하는 사이, 제라드는 의수의 관절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네 힘이 고작 그 정도는 아니겠지. 전력을 다해 봐라!”
“그 말, 후회 안 할 자신 있냐?”
스테치가 손바닥을 횡으로 휘두르자, 그의 주변으로 수많은 《테슬라》의 오브와 《써멀 비트》가 떠올랐다. 어둑어둑하던 그랜드 홀이 금세 밝은 빛으로 차올랐다.
파지직!
수십 갈래로 뻗어져 나온 스파크와 초고온의 열광선들이 제라드에게로 꽂히고, 그가 걸친 갑옷은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전신을 타고 도는 열기와 전기 쇼크에 제라드가 몸을 떨어 댔다.
“크아아악!”
제라드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스테치는 그런 그에게 달려들어 안면을 붙잡은 뒤, 그대로 그랜드 홀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꽂아 버렸다.
“커스 디바우러!”
반지에서 뿜어져 나온 사기로 근력을 배가시킨 스테치. 그는 그랜드 홀 바닥에 처박아 놓은 제라드의 머리를 무시무시한 힘으로 잡아끌며 달려 나갔다.
콰드드-!
제라드의 뒤통수를 걸레 삼아 지면을 닦아 낸 스테치는, 그를 있는 힘껏 그랜드 홀 저편으로 던져 버렸다.
물수제비처럼 튕기며 날아간 제라드가 개구리같이 벽에 충돌하기가 무섭게, 온 힘을 다해 가속한 스테치가 할로우 블레이드를 찔러 넣으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익!”
타이런트의 손으로 할로우 블레이드를 막아 낸 제라드. 그런 그의 얼굴을 향해 스테치는 오른 주먹을 쑤셔 넣었다.
“뒤져라아아아-!”
콰쾅!
급기야 벽을 무너뜨리고 제라드와 함께 그랜드 홀 너머의 다른 방으로 넘어간 스테치. 한참 동안 쓰지 않았던 탓에 가구 위에 내려앉아 있던 먼지가 피어오르고, 주변에 안개처럼 자욱이 끼었다.
잠시 후, 먼지구름이 가라앉으면서 대치 중이던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누워 있는 제라드. 그리고 그의 목과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할로우 블레이드의 검극.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더니 제라드의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할로우 블레이드를 역수로 쥔 스테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검을 앞으로 1cm만 더 밀어 넣어도 확실히 제라드를 절명시킬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검신을 붙잡은 제라드의 의수가 이를 불허하는 중이었다.
“끄으윽……!”
검에는 폰두스의 능력으로 불어난 무게, 그리고 커스 디바우러로 증폭된 스테치의 근력이 모두 실려 있었다. 그러나 타이런트는 이와 맞먹는 힘으로 스테치의 검에 맞서고 있었다.
‘이 자식, 뭐 이렇게 세?’
스테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 오른팔, 처음엔 조금 튼튼한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기이할 정도로 강력했다.
“아프잖아.”
제라드가 입을 열었다. 너덜너덜해진 그의 머리가 천천히 회복되면서, 피와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던 그의 두 눈이 드러났다.
덜덜덜.
힘겨루기에서 점점 밀려나는 스테치. 시종일관 우울한 표정을 유지하던 제라드는 비로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젠 내 차례냐?”
뻐억!
“컥!”
복부에 꽂히는 제라드의 발. 《리액티브 스킨》으로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대미지였다. 스테치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는 동안 자리를 털고 일어난 제라드는, 의수의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 댔다.
그러자 의수 내부에 숨겨져 있던 리스트 블레이드(Wrist Blade)가 그의 손목 아래로 튀어나왔다.
“고작 이 정도로!”
촤악!
전갈의 꼬리처럼 길게 늘어난 제라드의 팔이 스테치의 팔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커스드 아머……!’
방어용 어빌리티를 전개하는 스테치. 그러나 타이런트는, 갑옷을 구성하고 있는 사기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더니 결국 그대로 관통해 버렸다.
푸욱-!
“아…… 아악!”
리스트 블레이드에 꿰인 팔을 붙잡으며 이를 악무는 스테치. 잠깐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이번엔 제라드가 스테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촤악! 푹!
마치 제라드의 의지와는 따로 노는 뱀같이, 타이런트는 신축을 반복하며 다양한 궤도로 스테치에게 날아들었다. 한번 찌르고 나올 때마다 스테치의 몸에서 피가 튀었다.
찔리고, 베이고, 찔리고, 베이고.
조금이라도 움직여서 거리를 벌리려고 하면 금세 상대 쪽에서 먼저 따라붙어 버린다.
‘《라이트닝 스피…….》’
덥석!
스테치가 회복 마법과 함께 가속을 걸려는 찰나, 길게 늘어난 제라드의 팔이 스테치의 한쪽 다리를 휘감았다. 공중으로 붕 떠오른 스테치의 몸은 그대로 낙하하여 바닥에 내리꽂혔다.
“카학…….”
상대의 힘이 너무 강하다. 거기다 설마 커스드 아머가 이토록 간단하게 뚫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제라드는 피를 토하는 스테치를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패대기치며 말했다.
“자신만만하게 입을 놀린 것치고는 별거 아니잖아! 더 해 봐! 더 해 보라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거의 악을 내지르는 수준이었다. 제라드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스테치에게 겨누었다. 발끝에 힘을 모은 제라드는, 지면을 박차고 뛰어들며 오른팔로 붙잡은 스테치를 잡아끌었다.
“죽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