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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화 제물 (2) (188/203)


188화 제물 (2)
2022.04.07.


“이놈이 어딜…… 악!”

“놓치지 마! 저쪽으로 사라졌다!”

베네지아의 왕성, 캐슬 브랜든을 수비하기 위해 배치된 병사들이 자그마치 1만.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인력의 절반 이상은 고통으로 신음하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나마 멀쩡하게 서 있는 소수의 병사들은, 신출귀몰하게 성 내부를 휘젓고 다니는 침입자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빠악!

프레야의 주먹질 한 방에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나가떨어지는 병사 무리. 가냘픈 몸매에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괴력에 병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렛마저 기겁했다.

“괴, 괴물 같은 년……!”

“이 자식들이 못하는 말이 없어.”

프레야가 두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피융!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온 화살이 프레야의 머리에 꽂히는 순간, 병사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곧 경악했다. 뼈를 부수고 들어가기는커녕, 화살은 마치 바위라도 맞힌 것처럼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심지어 촉에는 피 한 방울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할 거 다 했냐?”

“…….”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내며 다가오는 프레야와, 그녀를 피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병사들. 수 미터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가렛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과연 신이 만들어 낸 작품답다고 해야 하나……. 인간의 쇠붙이 정도로는 전혀 상대가 안 되는구먼.”

가렛은 병사가 휘두른 할버드를 타른카페의 능력으로 회피한 뒤,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우당탕!

“으아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 난간 아래로 뚝 떨어지는 병사. 아마 최소한 몇 시간은 푹 잠들어 있을 것이다.

퍽!

쓰러뜨린 병사에게 마무리로 깔끔하게 엘보 드롭까지 먹이는 프레야. 물론 아군의 입장에서나 좋아 보이지, 적인 베네지아 병사 입장에서는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다음은 누구냐?”

그녀의 도발 섞인 손짓에 응하여, 이번엔 병사들 사이에서도 유달리 덩치가 큰 녀석 하나가 걸어 나왔다. 일반인이라면 보기만 해도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것만 같은 위협적인 사이즈의 워해머가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우옷!”

바람을 가르며 프레야에게 휘둘러지는 워해머. 그러나 프레야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워해머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팅!

워해머의 궤도가 옆으로 휙- 하고 꺾여 버렸다. 무슨 어린애랑 놀아 주는 듯한 가벼운 동작. 그녀에게 무턱대고 덤벼들던 병사들도 슬슬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다들 혀를 내둘렀다.

“넌 이제 가 봐!”

가렛은 프레야에게 말했다. 그녀는 어느새 양손에 병사 하나씩의 다리를 붙잡고 프레일처럼 빙빙 돌려대고 있었다. 무게감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경쾌한 손놀림이었다.

“그…… 여긴 내가 알아서 해 볼 테니까, 가서 스테치를 도와줘!”

“걔는 나 없어도 혼자 알아서 잘할 텐데. 뭐 굳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툭!

“으헉!”

땅에 떨어진 병사들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프레야는 가렛의 등짝을 힘 있게 두들겨 준 뒤, 왕성의 깊숙한 안쪽으로 가 버렸다. 가렛이 뒤를 돌아보자, 혈안이 되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가렛은 단검 자루를 단단히 움켜쥐며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와 봐랏!”

……라고 말한 지 30분 뒤.

“으아아, 빡세다 빡세!”

가렛은 막 날아온 화살들을 차원 도약으로 회피하며 중얼거렸다. 프레야의 도움으로 대부분의 병사들을 제압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제법 많은 수의 경비병들이 여전히 그의 목을 노리는 중이었다.

‘잘 되고 있을까?’

스테치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에 맞서는 왕자가 어느 정도까지 힘을 키워 왔을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콰광!!

“이런 X발, 맙소사!”

아니나 다를까,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왕성의 윗부분을 뚫고 굵직한 광선이 튀어나왔다. 왕성을 부순 것도 모자라 하늘을 가를 기세로 날아가는 빛줄기에, 꽁무니 빠져라 도망치던 가렛은 물론이고 그를 쫓아오던 병사들마저 넋을 잃고 제자리에 멈췄다.

“저, 저게 뭐야?”

“왕성에서 대체 무슨 일이?”

병사들이 한눈파는 사이, 그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가렛은 슬며시 양손에 브레스 너클을 끼우고선 휘둘렀다.

“지금이다!”

빡!

“커헉!”

잠시나마 무방비 상태였던 그들은 가렛의 기습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가렛은 저릿거리는 두 손을 탈탈 털어 대며 왕성을 올려다보았다.

‘아, 미치겠네 이거. 나라도 들어가 봐야 하나?’

안에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방도가 없으니 불안감은 커져만 간다. 하물며 방금 그런 광경까지 봤으니……. 가렛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대로 다 때려치우고 가서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야 할까?

‘……관두자.’

어차피 그는 전투 전문이 아니다. 기껏해야 공격을 회피하고 도주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을 뿐. 도와준답시고 스테치에게 가 봤자 호수에 물 한 컵 더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으리라.

쿠르릉-.

이번엔 지축을 뒤흔드는 땅울림. 진동이 왕성 내부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여파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가렛은 식은땀을 흘렸다.

“저기 있다!”

갑작스런 외침에 가렛이 뒤를 돌아보니, 아까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병사들이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썅…….”

가렛은 두 주먹을 들어 올리며 병사들을 쭉 훑어보았다. 스테치한테는 그냥 내가 가 본다고 말할 걸 그랬나? 어딘지 모르게 살짝 후회되는 가렛이었다.

* * *

제라드의 타이런트가 총탄처럼 빠르게 쇄도해 왔다. 그러나 상대가 아무리 빨라도, 《라이트닝 스피드》를 발동 중인 스테치를 따라잡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스테치는 어렵지 않게 스텝 몇 번만으로 제라드와 거리를 벌렸다.

휘오오-.

검은 사기의 아우라에 휘감긴 제라드. 그것은 스테치가 커스 아우라를 처음 발동했을 때와 흡사해 보였다.

“……어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스테치가 고개를 돌리자, 몸을 뒤로 빼려고 애쓰는 듯한 프레야가 보였다.

그때.

파스스.

프레야의 몸에서 푸른 빛으로 반짝이는 입자가 흩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가락이나 뺨, 그리고 허벅지나 복부. 마치 굳건히 서 있던 바위가 세월의 풍파를 맞아 바스러져 가듯, 프레야의 신체를 구성하는 마력이 먼지처럼 분해되어 제라드에게 빨려들어 갔다.

“뭐, 뭐야?! 야!”

스테치는 황급히 프레야에게 손을 뻗어 어빌리티 아바타를 중단시켰다. 그의 재빠른 판단으로 대부분의 마력은 메멘토 모템으로 빨려들어 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제라드가 흡수해 버렸다.

“…….”

철컥!

등 뒤로 넘어가 있던 제라드의 투구가 자동으로 그의 머리에 씌워졌다. 가로로 길게 뚫린 슬릿 틈새에서 제라드가 발하는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아까 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괜찮아?’

『와 시발, 나 진짜로 죽는 거 아닌가 했어.』

안전한 반지 안으로 되돌아왔는데도, 프레야는 잔뜩 긴장했는지 헐떡이고 있었다.

제라드가 한 행동은 단순히 그녀의 마력을 강탈해 간 것이 아니었다. 메멘토 모템을 매개체로 깃들어 있는 프레야 자신의 영혼마저 그대로 빨려 들어갈 뻔한 것이었다.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낀, 진정한 죽음의 공포.

『젠장. 이 상태라면 내가 직접 나가서 널 도와주진 못하겠는데.』

‘넌 충분히 할 만큼 해 줬어.’

스테치가 말했다.

『저쯤 되니까 이제 부정할 수가 없군. 방법은 모르겠지만, 녀석이 쓰고 있는 의수와 갑옷은 검은 아티팩트가 틀림없어.』

제라드를 중심으로 주변 바닥에 희끗희끗한 서리가 끼는 것을 본 스테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처음엔 그냥 검은 아티팩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마도구…… 그것도 아니면 그냥 아티팩트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검은 아티팩트 그 자체일 줄은 몰랐지.』

검은 아티팩트가 물리적인 형상을 변화하여 제라드의 의수로서 쓰이고 있다니. 스테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저 팔이랑 갑옷을 준 사람은 베네지아의 왕일 거 아냐? 메멘토 모템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놈이, 왜 굳이 검은 아티팩트들을 자기 아들한테 쥐여서 보내 준 걸까?’

이상한 일이었다. 제라드가 스테치와 싸우는 과정에서 검은 아티팩트들을 몽땅 잃어버린다면, 그걸 베이스로 아치발을 부활시키려는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는 게 아니었나? 스스로 저런 리스크를 부여하는 이유가 뭐지?

『어쨌거나 조심해!』

프레야가 경고했다.

『놈의 아티팩트가 주변에 있는 마력을 전부 빨아들이고 있어. 어쩌면 마법 공격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지도 몰라.』

‘시험해 볼까?’

스테치는 반지 낀 왼손을 내밀어 냅다 《에어 불렛》을 날렸다. 그러나 바람의 탄환은 목표물인 제라드에게 적중하기도 전에,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진짜네. 젠장.’

스테치는 사방으로 미친 듯이 빛을 발하고 있는 할로우 블레이드를 뽑아 제라드에게 겨눴다. 검은 기운과 대조적으로 환한 빛을 밝히고 있는 게, 마치 성검 같았다.

“흐읍!”

스테치는 지그재그로 스탭을 밟아 가며 제라드에게 접근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배후를 잡은 스테치는, 그대로 검을 횡으로 휘둘러 제라드의 갑옷을 후려쳤다.

쿠웅!

500kg이 넘는 무게를 받아낸 제라드의 발끝이 지면에 박히면서, 작은 크레이터가 생겼다. 그러나 제라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른팔의 타이런트를 스테치에게 뻗쳤다. 멈춰 선 몸과 대조적으로 뱀처럼 꿀렁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마치 별개의 생물체처럼 느껴졌다.

“?!”

공중으로 뛰어오른 스테치가 차례대로 천장과 벽을 박차고 입체 기동을 벌였지만, 제라드의 오른팔은 멈추는 일 없이 끈질기게 스테치의 뒤를 쫓았다.

“《팬텀 바디》!”

스테치를 에워싸며 등장한 4체의 분신들이 주위로 흩어졌다. 하지만……,

덥석!

타이런트는 허상들을 깡그리 무시하고선 곧장 스테치의 목덜미를 붙잡아 냈다. 그 상태에서 번쩍 들린 스테치는,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꽂혔다.

“커억!”

부스트를 건 힘으로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 힘이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마치……!’

스테치는 몸을 비틀며 이를 악물었다.

꿀럭, 꿀럭…….

목덜미에 박힌 조그마한 침을 통해, 푸른 기운이 스테치의 몸으로부터 제라드의 타이런트로 흘러 들어갔다. 피부 위로 툭 불거진 혈관은 목에서부터 메멘토 모템을 낀 왼손가락까지 이어져 있었다.

강제로 빨려 나가는 힘.

제라드가 스테치와 메멘토 모템으로부터 빨아 올린 힘을 게걸스레 집어삼켰다.

“으아아아!”

『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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