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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화 제물 (3) (189/203)


189화 제물 (3)
2022.04.08.


분명히 어디선가 이거랑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전신의 모공으로 피가 흘러나오고, 산채로 뼈가 분리되는 듯한 감각에 헐떡이는 와중에도 스테치는 문득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 그리고 곧 스스로 그 답을 찾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바로 자신이 메멘토 모템을 얻으면서 겪었던 죽음. 다만 이번엔 그동안 모아 둔 마력들까지 줄줄 뽑혀 나가고 있었으니 그때보단 질이 훨씬 나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땡그랑!

스테치가 오른손을 쥐락펴락하자, 너클에 남아 있던 빈 탄피가 땅에 떨어지며 맑은 금속음을 냈다. 품 안에 손을 집어넣은 스테치는 살라맨더 더스트가 가미된 특제 탄을 삽탄한 뒤, 손목을 젖혀 장전했다.

“끄으으응!”

어거지로 몸을 비틀어 목덜미에 박힌 침을 뽑아낸 스테치는, 타이런트로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제라드를 올려다보았다. 눈알이 박혀 있어야 할 구멍에는 오직 안개처럼 일렁이는 심연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너클을 낀 오른손을 강하게 주먹 쥔 스테치는, 있는 힘껏 제라드의 턱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꺼져!”

투쾅-!

넘실거리는 푸른 화염이 제라드의 머리통을 덮치고 올라가 천장까지 닿았다. 주위의 모든 마력을 흡수하는 제라드조차 이 타격으로 아주 잠깐이나마 기세가 꺾이는 듯했다.

목 부근을 조이고 있던 타이런트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리자, 스테치는 단숨에 구속을 풀어내고 일어나 할로우 블레이드를 단단히 고쳐 쥐었다.

“으아아아아아-!”

할로우 블레이드의 검신에 아로새겨진 문양을 따라,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벼락을 두른 1톤짜리의 검이 그대로 제라드를 내려 벴다.

써컹!

‘됐나?!’

분명히 손끝으로 무언가가 썰리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 증거로, 무슨 짓을 해도 제대로 된 흠집 하나 나지 않던 제라드의 갑옷 위에는 큼지막한 균열이 남아 있었다.

“조아쓰!”

『좋아하긴 너무 이른 거 같다.』

프레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옷에 난 균열이 빠른 속도로 복구되었다. 당황한 스테치가 두 번째 공격을 날리기 위해 검을 치켜들자, 프레야가 그를 말렸다.

『안 돼, 물러서!』

제라드를 중심으로 전개된 반구형의 영역은, 마치 블랙홀처럼 스테치를 포함한 주위의 마력을 강제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더 머무르고 있다간 남아 있는 마력과 생명 에너지까지 전부 뽑아 먹힐 지경이었다.

스테치는 하는 수 없이 뒤로 빠졌다.

‘직접 타격을 먹여야 하는데, 가까이 가면 저기에 빨려들어 가고……. 젠장.’

잠시 고민하던 스테치가 할로우 블레이드를 크게 휘두르자, 날 전체를 뱀처럼 휘감고 있던 푸른 번개가 뻗어져 나가 제라드를 강타했다. 아니, 그랬어야만 했다.

“-!”

제라드가 뒤집어쓰고 있는 헬멧의 아랫부분이 입처럼 쩍 벌어지더니, 목구멍 너머에서부터 밀려 나온 검은 기운이 의미불명의 괴성과 함께 터져 나왔다. 푸른 번개를 일격에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지워 버린 제라드는, 스테치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원거리에서의 공격은 안 먹히는가 봐. 야단났네, 이거. 어떡하지?』

처음 봤을 때는 앙상한 뼈로 구성되어 있던 타이런트가, 지금은 제라드의 몸과 핏줄로 엉겨 붙은 흉측한 꼴로 변해 있었다.

게다가 변한 것은 단순히 외견뿐만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듯, 그것이 발하는 능력 또한 눈에 띄게 강력해져 있었다.

게다가 처음엔 마력과 체력만 흡수하던 제라드의 영역은,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그 범위를 넓히면서 토네이도처럼 주변에 닿는 모든 것들을 쓸어버리는 중이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싸워야지.’

베네지아의 왕인 신체루스가 뭘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제라드가 그의 계획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물며 제라드가 주위에 끼치는 피해 정도도 시시각각 커지고 있는 상황.

일견 무모해 보일지언정, 최대한 빨리 제라드를 처리하는 편이 그나마 현재 내릴 수 있는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문제는 제대로 된 유효타를 먹이려면, 일단 제라드의 범위 안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점.

『그렇다면…….』

별다른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던 프레야는, 결국 스테치의 몸 위에 두꺼운 사기의 갑옷을 씌워 주었다. 그러자 갑옷으로부터 발산되는 아우라가 제라드의 기운과 충돌하며 밀어내기 시작했다.

『커스드 아머를 견고하게 재생성했어. 이번엔 내가 함께 있으니까 쉽게 뚫리진 않을 거야.』

“간다!”

스테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너클에 새 탄을 장전해 넣은 뒤, 제라드에게 뛰어들었다.

영역 안으로 뛰어드는 순간, 스테치를 보호하던 사기의 아우라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스테치는 앞으로 내딛는 발가락 끝에 더더욱 힘을 실었다.

『계속 가!』

“흐아앗!”

콰칵!

내리친 검이 타이런트에 막히자, 스테치는 곧장 오른손 주먹으로 리버 블로우를 먹였다. 그러자 이번엔 제라드가 남는 왼손을 휘둘러 그것을 쳐 냈고, 간장(肝腸)으로 날리려던 너클 블라스팅이 엉뚱한 방향으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스테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무릎을 들어 올려 제라드의 흉판을 찍어 올렸다.

“크르륵!”

짐승 같은 신음 소리를 흘리며 주춤거리는 제라드. 그 순간, 주변에 펼쳐진 검은 아티팩트의 영역이 한층 더 거세게 소용돌이쳤다. 에너지 흡수를 막아 주고 있던 커스드 아머의 표층이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깎여 나갔다.

쩌적-.

투구의 입 부분이 벌어지더니 징그럽게 말라비틀어진 이빨과 피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침까지 흘려 대는 그 모습은 이미 사람이 아닌, 끝없이 마력과 생명 에너지를 갈구하는 한 마리 짐승이었다.

“거머리 같은 새끼가아아!”

콰지끈!

하지만 스테치는 거기에 겁을 먹거나 하는 일 없이 제라드의 주둥이에 너클을 쑤셔 넣었다.

“크깃!”

피와 이빨을 흩뿌리며 날아가는 제라드.

“X발……!”

커스드 아머의 아우라와 제라드의 기운이 뒤엉키면서 주변은 진작부터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환히 빛나는 할로우 블레이드를 이정표 삼아, 스테치는 검극을 제라드에게 겨눈 뒤 달려들었다.

『스테치, 물러서!』

몇 번의 접전이 이어진 후, 프레야의 경고를 들은 스테치는 얼른 제라드의 영역 범위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꺼져 가는 촛불처럼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커스드 아머가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자, 스테치는 식은땀을 흘렸다.

‘젠장, 이건 너무 빡세잖아.’

스테치가 욕설을 퍼부었다. 커스드 아머를 한계까지 전개시켜 봤자, 저 검은 아티팩트의 영역 안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분이 한계다.

심지어 제라드의 반응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진 탓에 이제는 제대로 된 타격을 먹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저것 봐. 공격이 확실히 먹히고 있어.』

금강석보다도 단단하게 느껴졌던 제라드의 갑옷 표면 위에 희미한 금이 나 있었다.

『영역을 유지하느라 갑옷을 재생시킬 힘이 역으로 부족해진 모양이야. 저 금이 간 부분에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한다면……!』

그 말을 들은 스테치는 자신의 몸에 마지막 남은 단 한 번의 커스 디바우러를 걸었다. 지금 밀어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아!”

콰직!

새 커스드 아머를 펼친 스테치는 바닥에 깔린 타일이 부서지도록 힘껏 짓밟으며 튀어 나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제라드는 일순 시야 밖으로 사라진 스테치를 쫓느라 주변을 살펴야만 했다.

그사이 측면을 파고든 스테치가 제라드의 몸통을 검으로 후려치자, 갑옷에 난 균열이 한층 더 넓게 퍼졌다. 스테치는 여전히 두 다리로 멀쩡하게 우뚝 서 있는 제라드를 노려보더니, 반대쪽으로 크게 돌며 회전베기를 걸었다.

빠캉!

몇 개나 되는 벽을 뚫고 다시 한번 날아간 제라드는, 알현실에 위치한 신체루스의 왕좌에 부딪히고 나서야 간신히 멈춰 섰다. 그러나 그를 따라잡은 스테치는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 나갔다.

서로의 주먹과 발, 검을 주고받는 난타전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영역을 유지시키는 데에 몰두하던 제라드도 타이런트의 리스트 블레이드를 뽑아 가며 응수했지만, 아슬아슬한 차이로 스테치의 공격이 먼저 적중당하면서 번번이 반격에 실패했다.

“흥!”

균열이 난 갑옷 부위를 집요하게 노리는 스테치. 제라드는 타이런트를 뱀처럼 길게 늘여 자기 주변을 둥글게 휩쓸었고, 스테치는 잠시 물러선 뒤 그대로 오른 주먹을 꽂아 넣었다.

투쾅!

너클에서 뿜어져 나온 플라즈마 제트가 제라드의 갑옷에 난 틈새로 스며들었다. 그 충격으로 인해 스테치가 낀 너클과, 제라드의 갑옷 일부가 동시에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

“크르아아악!”

갑옷의 뚫린 부위로 검은 기운을 피처럼 쏟아 내는 제라드. 스테치가 그 구멍으로 검을 찔러 넣으려 들자, 제라드는 타이런트를 휘둘러 스테치의 턱을 쳐 날려 버렸다.

“으긱!”

턱뼈가 부러지고 뇌진탕이 왔지만, 스테치는 죽지 않았다. 알현실의 저 높은 천장까지 치솟은 그는, 허우적대는 몸을 간신히 다잡아 아래쪽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제라드를 확인했다. 방금 전의 일격으로 꽤 큰 대미지를 입었는지, 마력을 흡수하던 영역의 범위가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캬오오-!”

제라드는 자신의 영역을 잠시 없애는가 싶더니, 타이런트를 암 캐논 형태로 바꿔 스테치에게 겨눴다.

에너지 차징이 완료되자마자 발사되는 빔 포격. 코앞으로 굵직한 보랏빛 광선이 쇄도해 오자, 공중에서 회피할 길이 없었던 스테치가 크게 외쳤다.

“프레야-!”

허공에서 나타난 프레야는 스테치와 양 발바닥을 마주 붙이더니, 서로를 있는 힘껏 박차 밀어냈다.

그러자 스테치와 프레야의 사이를 관통하는 제라드의 빔. 생각지도 못한 회피 방식에 제라드가 뒤늦게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사이, 프레야를 반지로 거둬들인 스테치가 주문을 시전했다.

“《싱크로》!”

암 캐논을 사용하기 위해 영역의 크기와 위력이 줄어든 지금이 기회였다. 《싱크로》를 건 스테치의 몸이 황금빛으로 뒤덮였다.

그는 제라드의 머리 위에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리면서, 프레야와 함께 연달아 주문을 발동시켰다.

“《인페르노》-”

『《써멀 비트》-』

“《레바테인》!”

검신에 둘러진 시뻘건 불꽃과, 그 위로 감싸는 《써멀 비트》들의 초고열광선. 아치발의 신자들을 멸하는 빛이 거기에 힘을 실어 주면서, 할로우 블레이드는 그 길이만 수십 미터에 달하는 광검이 되었다.

“으으으아아아!!”

콰과광!

캐슬 브랜든의 바닥, 벽, 그리고 천장을 파괴해가며 휘둘러진 《레바테인》의 칼날이, 성 전체를 양분할 정도로 거대한 반월을 그리며 제라드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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