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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화 제물 (4) (190/203)


190화 제물 (4)
2022.04.09.


“으와아아아…….”

땅바닥에 주저앉은 가렛은 멍한 표정으로 왕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병사들 입장에선 이보다 그를 잡기에 좋은 타이밍이 없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 모두 상태가 가렛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미친.”

“우린 이제 다 끝장이야!”

개중에는 무릎까지 꿇고, 어디의 누군지도 모를 신에게 싹싹 비는 사람도 있었다.

건국 이래로 단 한 번도 침공당한 적 없는 수도 알렌테가 적에게 돌파당한 것도 모자라, 절대 무적 베네지아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왕성이 무너져 내리기 일보 직전에 이르렀으니 병사들이 절망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콰르륵-!

왕성의 한쪽 벽면을 비스듬히 뚫고 나온 화염의 광검이, 마치 케이크를 자르는 것처럼 왕성을 양분했다. 사실상 저 꼴을 당하고서도 성이 폭삭 내려앉지 않는다는 게 기적일 지경이었다.

“폐하, 폐하는?”

병사 하나가 멍청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그제야 나머지 이들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왕성이 엉망진창이 된 것도 쇼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생존 여부였다.

그리고 왕을 옆에서 지키고 있어야 할 서방 장군 이드릴 헨리에타나, 셋째 왕자 제라드는?

“…….”

조용히 병사들의 눈치를 살피던 가렛은, 타른카페를 몸에 두르고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나타난 장소는 다름 아닌 왕성 내부였다. 성의 골조가 미묘하게 틀어진 덕분에, 외부에서 성의 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당분간은 내가 직접 신경 쓰지 않아도 문이 알아서 병사들을 막아 주겠지. 이제…….’

가렛은 성안의 깊숙한 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깔끔한 포석이 깔려 있었을 바닥은 균열이 일어나 쩍쩍 갈라져 있었고, 천장에서는 조그마한 먼지나 파편 따위가 떨어져 내리는 중이었다.

그는 왕성 내벽의 처참한 파괴의 흔적들을 눈으로 훑는 한편,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스테치와 제라드, 두 사람이 몸을 날려 가며 싸울 때 발생한 전투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즐비했다.

‘젠장, 대체 어디서부터 뒤져 봐야 하는 거지?’

바닥에 쓰러진 석제 기둥을 훌쩍 넘어가며 왕성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가렛. 몇 번째인지 모를 또 다른 널찍한 공간에 들어서게 된 그는 치를 떨었다.

‘누구는 자기 몸 하나 뉘어 놓을 집이 없어서 고생하는데, 왕족이라는 놈들은 대가리 수는 얼마 되지도 않는 주제에 쓰잘데기없이 넓은 곳에 사네. 하여간 이 새끼들 진짜…….’

가렛은 입 안으로 무어라 투덜거리며 문을 열어젖혔다. 지금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은 물론 스테치 아텔리어였다. 아주 왕성 전체가 요동칠 정도로 한바탕 벌인 걸 보아하니, 상대가 아주 터프 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싸움에서 이긴 편은 어느 쪽일까?

스테치? 아니면 제라드?

만의 하나라도 그럴 확률은 없겠지만, 만약 스테치가 패배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를 구해 낼 수 있는 사람은 가렛뿐이었다. 아니. 설령 스테치가 이겼다고 하더라도, 가렛은 그 결과를 본인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이런 역사적인 순간을 그냥 넋 빼놓고 놓칠 수는 없지!’

가렛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 *

“…….”

무너져 내린 천장 아래로 햇살이 내리쬈다.
두르고 있던 화염이 사그라들자, 제라드의 어깨 깊숙이 박혀 들어간 할로우 블레이드의 칼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즈르륵-

끈적한 피를 윤활유 삼아 검이 미끄러져 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테치는 제라드에게서 할로우 블레이드를 뽑아낸 뒤, 무릎을 꿇은 그에게 한마디 툭 내뱉었다.

“질긴 놈.”

머리를 시작으로 아예 몸 전체를 두 동강 낼 생각이었는데, 제라드가 몸을 비트는 바람에 아주 살짝 빗나가 버렸다. 그때, 머리에 뒤집어 씌워져 있던 투구가 뒤로 젖혀지면서 제라드의 얼굴이 드러났다.

머리카락은 땀에 푹 젖은 데다 두 눈은 실핏줄이 터졌는지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검은 아티팩트의 영향으로 잠깐이나마 괴물이 되었던 조금 전에 비하면 훨씬 정상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커흑.”

갑옷이 없었더라면 아예 상반신이 절반으로 쪼개졌으리라. 그래도 치명상인 건 분명해 보였다. 제라드는 입으로 검붉은 핏덩이를 토해 내고선 스테치를 올려다보았다.

“너하고, 나의 차이가…… 대체 뭐냐.”

한참을 헐떡이던 제라드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반지는…… 스스로 주인을 선택한다고……. 콜록! ……단순히 네 손에 들어갔다고 해서, 나는 자격이 안 되는 건가?”

슈오오-.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제라드의 앞으로 마력의 육신을 만들어 낸 프레야가 나타났다. 그녀는 제라드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설령 반지가 네 손가락에 끼워졌어도, 내가 널 파트너로 인정하는 일은 없었을 거야.”

파트너라는 프레야의 말에 제라드는 그녀의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했는지,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째서지?”

“내 마음에 안 드는 새끼니까.”

프레야는 가차없는 독설을 쏟아 냈다.

“물론 사람의 생각, 혹은 그에 대한 판단이라는 게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는 경우도 있지. 그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스테치의 눈을 통해서 지켜봐 온 너는, 밥맛없는 새끼 그 자체였어.”

성격적으로 제라드가 얼마나 흠 많은 인물인지 꼬집어 내라면 정말 한도 끝도 없이 따지고 들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프레야는 지금 이 순간조차 반지만 손에 넣으면 모든 일이 잘 돌아갔을 거라고 변명하는 제라드의 안이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그거 이외에도 조건이라면 차고 넘치지만, 어차피 네가 그걸 충족시키진 못했을 거 같다.”

프레야의 말을 듣고 있던 제라드는 목에 힘이 풀렸는지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프레야가 문득 시선을 돌리자, 미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스테치와 눈이 마주쳤다.

“왜?”

“아니, 그럼 나는 왜 선택된 건가 싶어서.”

“이제 와서 그걸 묻는다고?”

“궁금하긴 궁금하니까.”

프레야가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슬슬 끝장을 내 버려.”

그녀의 말에 스테치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눈 딱 감고 그어 버리기만 하면, 이 지긋지긋한 복수극도 끝에 달하게 되는 것이다.

스테치가 말했다.

“만나서 좆 같았고, 다시는 보지 말자.”

그러나 할로우 블레이드를 치켜든 스테치가 제라드의 머리를 완전히 쪼개 버리기 일보 직전, 검은 빛의 장막이 검날을 가로막았다.

콰가각-!

금속성의 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었다. 당황한 스테치가 몇 번인가 더 검을 휘둘러 보았지만, 번번이 튀어나온 장막에 의해 막혀 버리고 말았다.

급기야 짜증이 치밀기 시작한 스테치가 전신의 힘을 끌어 올리려는 순간, 등 너머로 들려온 희미한 소리가 그를 멈추게 만들었다.

뚜벅- 뚜벅-

멈칫거리는 스테치를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프레야도 이내 그것을 눈치챘는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주위에 세 사람 이외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인지, 발소리는 유달리 크게 들렸다.

“아직 끝을 보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마르크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위압감을 자아내는 풍채. 희끗희끗하게 색이 바래 가는 수염과 머리카락. 실용성이 있기나 한 건지 의심될 정도로 화려한 복장과 망토.

비록 실제로 마주 본 적은 없었지만, 스테치는 가렛이 제공한 기록을 통해 눈앞의 상대가 누군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번개처럼 달려나가 상대의 목을 베어 버렸다.

팟!

그러나 검 끝으로 아무런 감각도 전해져 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스테치가 확인해 보니, 할로우 블레이드는 핏자국 하나 없이 말끔했다.

“이건…….”

스테치는 시선을 옮겨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베네지아의 늙은 왕, 신체루스 메서.

“국왕 폐하까지 납시셨네. 자기 아들이랑 저승으로 동반 여행하고 싶어서 찾아왔나?”

스테치가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신체루스는 참혹하리만치 끔찍하게 당한 제라드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만한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마치 아들이 아닌 생판 남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신들의 대리자라는 사람도 생각했던 것보단 수준이 낮군. 말도 거칠고, 교양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신체루스는 스테치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보아하니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정체에 대해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쫄아 가지고 허상이나 내보내는 주제에 잘난 척 주둥이 털긴. 당장 튀어나와. 사지를 전부 뽑아 줄 테니까!”

스테치가 으르렁거렸다. 그의 예상대로, 신체루스의 몸은 마치 아지랑이처럼 희미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아치발의 신자일 터인 신체루스를 앞에 두고 있는데도 할로우 블레이드가 반응하지 않는 것이나, 목을 베었는데도 멀쩡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럴 생각은 없네. 제 아무리 유구한 세월을 살아온 나라고 해도, 각성한 대적자에게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장담하기 힘들거든.”

그는 스테치를 무시하고 슥 지나치더니, 아슬아슬하게 의식의 끈을 부여잡고 있는 제라드의 앞에 우뚝 섰다.

“일어나라.”

신체루스의 목소리를 들은 제라드가 간신히 그에 반응했다. 그사이, 스테치는 다급한 말투로 프레야에게 물었다.

“저놈 어디 있는지 추적할 수 있겠어?”

“능구렁이 같은 새끼라 그런가, 찾기도 힘든 곳에 숨어 있나 봐. 기척이 안 느껴져.”

감각을 최대한도까지 집중시켜 봤지만, 진짜 신체루스가 숨어 있는 위치는 탐지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직접 성 전체를 돌아다녀 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계속 찾아봐!”

스테치는 그렇게 지시한 뒤 《싱크로》를 걸고 제라드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스테치가 검으로 내려치려는 찰나, 제라드와 신체루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뭣-”

“쫄보 새끼가!”

당황한 프레야와 달리 스테치는 버럭 화를 터뜨렸다. 제대로 덤벼든 스테치의 힘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 도망친 것이었다. 스테치가 프레야를 돌아보자, 그녀가 말했다.

“지하다! 제라드는 성 아래에 있어!”

“우오와아앗!”

계단을 타고 내려갈 시간도 아깝다. 스테치는 치켜들었던 검을 강하게 지면으로 내리꽂았다.

* * *

‘멍청한 북부 놈들.’

왕성 아래의 위치한 어두운 지하 공간. 신체루스는 지난날들을 떠올리며 피식 웃어 버렸다.

초창기 아치발의 신자들의 계획은 간단했다. 분쟁의 조장, 세뇌와 학살로 사기를 발생시켜 아치발의 부활을 촉진시키는 것.

하지만 아치발의 신자들 내에서도 이단아에 속하던 신체루스는 이의를 제기했다. 아치발이 부활할 정도의 사기를 만들어 내려면 어마어마한 시간이 필요한 데다, 무엇보다도 신의 대리자가 그 상황을 그저 방관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북부 일파와 찢어져, 아치발을 부활시키기 위한 또 다른 계획을 세웠다. 북부의 신자들은 신체루스를 회유하려 들었지만, 번번이 검은 아티팩트를 강탈당하자 결국 관계를 단절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신체루스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렇게 무려 천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 노력이, 오늘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된다.

쿠르릉-.

자그마한 진동이 벽면을 타고 전해져 왔다. 신체루스는 혀를 차더니 옆에 주저앉아 있던 제라드에게 다가갔다.

“아…… 버지.”

서로 얼굴조차 본 적 없을 터인 스테치와 신체루스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듯 대화를 나누다니? 게다가 신의 대리자는 또 무슨 소리지? 제라드의 머릿속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네 역할은 여기까지다. 수고했다.”

신체루스는 그렇게 말하며 제라드의 오른팔, 타이런트 위에 손을 얹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제라드에게 보여 주는, 자비롭고 인자한 아버지로서의 표정 그 자체였다.

“으, 으아아아-!”

제라드의 시야가 하얗게 명멸했다. 타이런트에서 뻗어져 나온 핏줄과 골격이 그를 덮쳐 갔다. 비명을 지르는 제라드의 입으로 들어간 핏줄이, 그의 몸 안팎을 채워 나갔다. 희미해져 가던 제라드의 정신이 뚝 끊겼다.

그리고, 왕성 전체가 새하얀 빛으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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