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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화 신 (191/203)


191화 신
2022.04.10.


자신의 탄생을 자각한 순간, 어두컴컴한 숲속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던 그는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었다. 일어나서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발견한 것은 오로지 허름한 옷을 걸친 자기 자신의 몸뚱이와, 검은 아티팩트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단 두 가지였다.

하나는 몸의 원래 주인이었던 자가 가지고 있던 기억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의 주인인 ‘아치발’을 부활시키고 말겠노라는 강렬한 욕구.

본능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은 그는 검은 아티팩트를 주워 숲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그는 오래 지나지 않아 자신과 똑같은 존재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이 스스로를 ‘아치발의 신자’라 자칭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최초의 신자들이 세상을 거닐기 시작했다.

아치발을 부활시키는 방법은 간단했다.

세뇌 능력을 사용하여 세 종족간의 분쟁을 조장하고, 발생되는 사기를 모으는 것. 처음에는 세 신들의 방해 때문에 순탄치 않았지만, 신들이 소멸한 이후부턴 본격적으로 계획에 탄력이 붙었다.

그러나 세 신들이 안배해 둔 대적자가 등장하면서, 모든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대적자의 존재는 신자들에게 있어 천적 그 자체였다. 세 신들과 달리 대적자는 몬스터나 아티팩트를 에너지원으로 삼아 반영구적으로 활동할 수 있으며, 그 힘은 신자들을 멸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었다.

제대로 된 신자 하나를 새로 만들기 위해선 까다롭고 오랜 준비 과정이 필요했다. 반면, 대적자는 간단한 조건 몇 가지를 달성하는 정도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여 신자들을 도륙 내는 것이 가능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신자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최초의 신자들 중 하나였던 ‘그’는 기존의 방침과 전략이 가진 효율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이름을 신체루스라고 새로이 명명하고, 그동안 회수했던 검은 아티팩트의 절반 이상을 품은 채 남부로 떠났다. 자신을 회유하려 드는 신자들을 모조리 뿌리치며, 그는 남부에 자신만의 거대한 왕국을 건설했다.

그것이 ‘베네지아’의 탄생이었다.

때로는 모두의 위에 군림하는 왕으로, 때로는 충직한 신하로 모습을 바꾸어 가며, 신체루스는 베네지아를 강성한 왕국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신자들이 태어난 장소를 기폭 장치로 사용하여 카델트 대사막을 발생, 그와 동시에 카인이 봉인한 검은 아티팩트를 강탈하기 위한 인종 청소 전쟁을 일으켰다.

모든 것은 절대신 아치발을 깨우기 위해서.

* * *

대폭발.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서조차 간신히 그 골조를 유지하던 캐슬 브랜든은, 단 한 순간의 거대한 폭발에 의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레지아 계곡에서 사용했던 스카이의 특제 폭발물을 100개 정도 모아다가 한꺼번에 터뜨린 것 같은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폭발의 후폭풍으로 왕성 외곽을 두르고 서 있던 성벽은 깡그리 박살 나 버렸다. 당연히 성을 지키기 위해 제 위치를 고수하고 있던 병사들은 피할 틈조차 없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폭심지 주변을 뒤덮고 있던 거대한 먼지구름이 살짝 옅어질 때쯤, 스테치가 천천히 눈을 떴다.

“……으극.”

가슴을 짓누르는 석조 구조물의 압박감, 거기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흙먼지까지 더해지니 숨이 막혀 올 지경이다. 힘이 빠진 스테치가 낑낑거리며 좀처럼 몸을 일으키지 못하자, 반지에서 빠져나온 프레야가 그를 도와주었다.

“자자, 일어나.”

그 정도 폭발을 누구보다도 가까운 곳에서 맞은 스테치였지만, 몸에는 커스드 아머 덕분에 자잘한 생채기만 남아 있었다.

프레야의 부축을 받은 그가 일어서 보니, 처참하기 그지없는 주변의 모습이 더더욱 선명하게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성을 지지하던 기둥 일부와, 몇몇 커다란 파편을 제외한 모든 것이 소멸해 있었다. 폭발이 좁은 공간인 지하에서 일어나 그 파괴력이 더더욱 커진 모양이었다.

“자살이라도 한 건가……?”

폭발을 일으킨 당사자가 신체루스일 거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대체 왜?

“스테치!”

목청 찢어지도록 이름을 크게 부르짖으며 달려오는 한 남성.

가렛이었다.

“어? 뭐야, 이 자식! 살아 있었구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널 돕는답시고 개고생하던 사람인데, 최소한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정도는 신경 좀 써 주라…….”

스테치의 반응에 가렛이 툴툴거렸다. 폭발이 일어난 순간, 가렛은 타른카페를 써서 몸을 숨겼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몸 전체가 손쓸 틈도 없이 타 버렸을 것이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손바닥에 절로 땀이 맺혔다.

“뭐, 공격한 입장에서 이런 말 하기도 뭣하지만……. 그래도 이 지경까지 되길 바랐던 건 아니었는데 말야.”

가렛의 말에 스테치가 대꾸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건 너나 내 잘못이 아냐. 신체루스가 무슨 짓을 벌여서 이 폭발이 일어난 거라고.”

쿠르륵-.

갑작스럽게 땅 밑에서부터 울려오는 진동. 그 탓에 봉긋이 쌓여 있던 잿더미와 파편 덩어리의 산이 무너져 내렸다. 대화를 나누던 스테치와 가렛은 물론, 옆에 서 있던 프레야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이제껏 느껴 본 적 없는 기묘한 감각이 스테치와 프레야의 등골을 타고 전해져 왔다. 솜털 하나하나가 곤두서는 듯한 소름 끼치는 기운. 스테치는 격한 싸움으로 전신에서 땀을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든 오한 때문에 몸을 떨었다.

“뭐지?”

그리고, 성이 있던 자리의 흙모래 더미 아래에 잠겨 있던 물체가 솟아올랐다. 한번 혀를 찬 스테치는 재빨리 땅에 떨어져 있던 검을 집어 들었다.

“……제라드?”

갑옷을 걸치고, 재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공중으로 서서히 떠오르는 누군가.

오른팔이 사라진 데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이목구비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갑옷의 생김새나 더티 블론드의 머리카락은 영락없는 제라드 메서였다. 그런데…….

후두둑.

여기저기 금이 가고, 기운이 다해 바스러져 가던 갑옷이 분해되면서 갑옷판 아래에 감춰져 있던 몸뚱이가 드러났다. 마치 일평생 햇빛이라곤 받아 본 적 없는 듯한, 창백하고 비쩍 마른 몸뚱이었다.

마치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것 같은 이질감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짧았던 제라드의 머리카락 또한 하얗게 물들어 갔다. 거기에 더불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 모발의 길이는 이윽고 제라드의 발끝에 닿을 만큼 자라나서야 성장을 멈췄다.

“놈이 아냐.”

프레야의 말에 스테치는 잔뜩 긴장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겉모습은 제라드의 외견을 띄고 있었지만, 스테치의 본능은 상대가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인외의 존재임을 알아챘다.

“하하…….”

모두가 침묵을 유지하던 그때, 별안간 스테치의 등 뒤에서 나타난 피투성이의 신체루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일반인이라면 진작 쇼크사 해도 이상하지 않을 대출혈이었지만,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몰두하느라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신체루스!”

“이 새끼, 또 무슨 짓거리를 하려는 거야!”

스테치와 프레야가 험악한 말투로 동시에 말했다. 그러자 신체루스는 실성한 사람처럼 힘없이 킬킬대며 중얼거렸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게 아니라, 이미 다 끝났다……. 멍청한 새끼들아. 킥킥…….”

다 끝났나고?

그 말을 들은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신체루스가 아무도 모르게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

신체루스는 스테치의 표정을 보더니 덧붙여 말했다.

“계획은…… 이미 오래전부터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도중에 알아채도 막아 낼 수는 없었을 테지. 콜록!”

신체루스의 몸은 기침 소리와 함께 실체 없는 안개처럼 희미해졌다. 마치 죽음이 임박한 사람처럼 숨이 넘어가려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소름 끼칠 정도로 기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스테치.”

스테치는 프레야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공중에 떠오른 제라드를 살펴보던 프레야는, 절망적인 얼굴로 스테치에게 말했다.

“우리가 했던 방식이랑 쏙 닮았어. 마치 데스트라의…….”

더 들어 볼 것도 없이, 스테치의 뇌리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검은 아티팩트와 코어.

그 본질적인 기능이 무엇인지를 떠올린 스테치는 충격과 경악으로 입을 벌렸다.

그렇다면 저자는 설마?

시시각각 변화하는 스테치의 표정, 그리고 프레야의 말을 들은 신체루스는 의외라는 반응과 함께 말을 이어 나갔다.

“……검은 아티팩트 내부의 마법 회로를 해석해 내는 데에 수백 년이 넘도록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네놈들은 고작 한번 본 정도로 알아챈단 말이지? 괜히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것이 아니었군.”

“지X!”

스테치는 그렇게 외치며 《싱크로》를 걸었다. 눈부신 황금빛 마력에 휩싸이며, 그의 몸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아직은 몸뚱이를 빌린 것에 지나지 않아. 지금 죽여 버리면 그만이야!’

자신은 무엇 때문에 초조해하고 있는가.

겁먹지 말자.

상대가 진짜 자신이 생각한 ‘그자’라면, 신체루스는 고작 정신을 일깨운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그 몸은 아직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없을 터. 죽이려면 지금뿐이었다.

탓!

공중으로 뛰어오른 스테치가 검에 번개를 휘감아 제라드의 몸으로 쏘아 보냈다. 푸른 벼락이 사방으로 잔가지를 치며 상대를 강타하려는 찰나, 그것이 발하던 빛도 소리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어?”

스테치는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에 인챈트를 걸어 주던 바라크도, 양팔에 끼우고 있던 폰두스도. 스테치의 손에서 먼지처럼 바스라졌다. 검신을 타고 번쩍이던 전기와, 검에 실려 오던 묵직한 감각 또한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갔다.

그리고.

제라드의 몸을 빌려 현신한 아치발이, 마침내 눈을 떴다.

* * *

“아…… 아아……!”

북문과 남문의 병사들과 지휘관. 그리고 집에 틀어박힌 채 덜덜 떨고 있던 알렌테의 사람들 모두가 그 광경을 보고 느낀 감정은, 그야말로 절망 그 자체였다.

수백 년이 넘도록 굳건하게 유지되어 오던 베네지아의 몰락과 최후를 설마 자신들이 목격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상상 못 했을 것이다.

콰광!

모두가 얼이 빠져서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진 바로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수도의 남문과 북문이 거의 동시에 박살 났다.

“X발!”

남문을 박살 내고 수도 안에 들어선 스카이가 대상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알아서 잘되어 가고 있으려니 싶어서 가만있었더니만, 난데없이 이게 웬 대폭발이란 말인가.

“스테치 이 새끼이이-! 실패하고 뒈졌으면 내가 직접 모가지를 따 버린다!”

“……그건 말이 안 되지 않나?”

“……시체의 목이라도 따 버린다!”

“…….”

앞뒤가 안 맞는 말을 마구 뱉어 댈 정도로 흥분한 스카이를 보며, 마르크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났다.

“음?!”

방패를 차고 있던 팔의 무게감이 없어지면서, 한창 왕성으로 내달리던 마르크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깜짝 놀란 그가 내려다보니, 방패 레오니다스가 반짝이는 입자로 화하여 공기 중에 흩어지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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