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희생
(192/203)
192화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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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화 희생
2022.04.11.
챙강!
가렛은 망토의 안감 쪽에 덧대어 놓았던 걸쇠와 단검들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항상 팔을 감싸듯이 두르고 있던 그의 아티팩트 타른카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뭐야?”
가렛이 문득 위를 올려다보자, 아치발에게 달려들었다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되돌아오는 스테치의 모습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도저히 받아 줄 수 있는 속도가 아니라고 판단한 가렛은 기겁하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콰광!
지면과 충돌한 직후에도 물수제비처럼 튕겨 나간 스테치는, 바닥을 수차례 이상 굴러간 뒤에서야 간신히 멈췄다.
“크학……!”
온몸의 뼈가 산산 조각난 고통으로 스테치는 헛숨을 토해 냈지만, 그에게는 느긋하게 쓰러져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반지에서 나온 프레야가 대신 스테치의 상반신을 일으켜 세워 주며, 눈앞의 상대를 노려보았다.
등 뒤로 길게 늘어진 장발과, 몇 달은 굶주린 듯한 비쩍 마른 몸뚱이. 제라드의 흔적은 더 이상 그의 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아치발은 퀭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데스트라를 부활시켰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
“신이시어. 당신의 충실한 종이 여기 있나이다.”
금방이라도 꺼져 버릴 것처럼 흔들거리는, 촛불 같은 몸을 이끌고 아치발에게 다가간 신체루스는 이내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생각해 보던 아치발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 몸은……?”
“신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 쓰기 위해, 검은 아티팩트를 베이스로 만들어 낸 육체들 중에서도 최상의 것을 준비했습니다. 이론상 전성기 때의 힘을 발현시키셔도 최소 1분은 버틸 수 있죠.”
신체루스의 말에 아치발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재차 달려든 스테치와 프레야가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아치발은 간단한 손동작으로 두 사람을 다시 날려 보냈다.
“크악!”
“그 정도면 충분하다.”
아치발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여기저기에서 날아들어 온 마력 입자들이 그의 몸으로 스며들 때마다, 말라 비틀어져 있던 육신이 점점 부풀어 오르며 생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한편, 멀찍이에 쓰러져 있던 스테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프레야에게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주변에 있는 아티팩트들을 모조리 흡수하고 있어. 저것 봐.”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아치발에게로 흘러 들어가는 푸른 입자들을 가리켰다.
“저거 하나하나가 아티팩트들이야. 던전 하나를 구성하고 유지시킬 정도로 많은 마력 덩어리인데, 그걸 죄다 빨아들이고 있는 거라고.”
그 말을 들은 스테치의 표정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신체루스가 했던 발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최초의 던전은 아치발의 마력으로부터 시작됐어. 거기에서 태어난 몬스터들이 사람을 죽이면서, 또다시 새로운 던전을 만들어 낸 거고.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현존하는 거의 모든 던전에 녀석의 마력이 미량이나마 섞여들어 있는 셈이지. 그러니까 놈이 지금 하고 있는 행위는 그저 단순히 여기저기에 퍼져 있는 자기 마력을 회수하고 있을 뿐이야. 그것도 대륙 스케일로.”
간단히 말해, 그는 최초의 검은 아티팩트를 만드는 과정을 거의 완벽히 재현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반적이라면 그런 짓을 하기도 전에 육체가 먼저 능력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할 것이다.
하지만 아치발의 몸은 신체루스가 준비한 특제품. 망가지는 속도보다도, 마력을 흡수하여 강화되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너는 어때? 따지고 보면 널 만들었다는 세 신의 마력도 저놈한테서 나온 거잖아.”
가렛이 물었다.
“아치발은 자신과 다른 사고를 하는, 완벽하게 독립된 개체들을 만들고 싶어 했어. 그러니까 세 신의 정신과 마력은…… 그러니까 나는, 아치발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아.”
프레야가 단언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힘을 되찾아 가는 아치발을 대체 무슨 수로 막아 낸단 말인가?
“프레야.”
스테치가 말을 걸었다.
“엉?”
“남은 두 어빌리티는 언제 해금되는 거야?”
“……지금 준비중이야.”
메멘토 모템은 기본적으로 던전과 아치발의 신자들을 박살 내기 위해 만들어진 병기. 물론 문제의 당사자인 아치발과의 싸움을 상정하고 탑재된 어빌리티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안전장치와 리미터를 해제하고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는 대신, 지금까지 축적된 모든 에너지를 전부 소모시키는 양날의 검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치발이 부활을 감지했더라도, 반지 내부에서는 신중하면서도 조심스러운 해금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저 괴물한테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단 말야? 정말로?”
가렛이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탄생시킨 신이요, 괴물이다.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자연재해가 아닌가.
“있어. 하지만 시간을 끌어야 돼.”
프레야가 말했다.
“아치발의 부활을 막고 어쩌고 하는 단계는 한참 전에 지났어. 지금 막무가내로 달려들어 봤자 녀석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그러니까…… 나대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
스테치가 무언가 더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그와 프레야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스테치!”
가렛이 어떻게든 붙잡아 보려 했지만,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구속당한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 아치발의 앞에 도달했다.
그는 마치 실험용 쥐를 살펴보는 것처럼 그들을 훑어보더니, 바로 옆에 부복하고 있던 신체루스에게 물었다.
“이자들은 누구지?”
“……직접 보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신체루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기운은…… 낯설지가 않아. 대체…….”
아치발의 시선이 스테치, 메멘토 모템, 그리고 프레야에게 순서대로 향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손을 프레야에게로 뻗었다.
“으극!”
무슨 짓을 할 생각인지는 몰라도, 결코 좋을 리가 없었다. 스테치는 아치발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몸을 비틀어 댔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
그것이 아치발의 관심을 끌었는지, 그는 마침내 스테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치발이 손가락을 까딱하는 순간, 스테치는 마치 압착기에 넣고 찌그러뜨린 것처럼 전신이 으스러졌다.
스테치 아텔리어는 죽었다.
하지만 아치발이 눈을 한번 깜빡이고 나니, 스테치는 언제 그랬냐는듯 멀쩡한 상태로 여전히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나 있었다. 분명히 죽였는데? 아치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죽음, 그리고 부활.
그 이후로도 스테치는 수차례가 넘는 죽음을 연달아 겪어야만 했다.
압축되어 죽고, 목이 베여 죽고, 터져 죽고, 전신의 피가 모공으로 빠져나오면서 죽고. 온갖 창의적인 방식으로 죽어 나갔지만, 그 때마다 스테치는 다시 부활했다.
15번 정도 같은 짓을 반복하던 아치발은, 그제야 입을 열어 스테치에게 말을 걸었다.
“희한하군. 너는 인간이 아닌가?”
“인간 맞거든……. 그렇게 네 좆대로 굴면 기분 째지냐? 이 개씨발 새끼야…….”
스테치가 헐떡이면서 대꾸했다. 죽는 것은 신체적으로도 썩 유쾌한 일이 아닐뿐더러,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수반한다. 까딱 잘못했다간 이성의 끈을 놓고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만 했다. 최소한 프레야가 자기 할 일을 끝마치기 전까지는…….
그가 프레야를 흘끗 쳐다보자, 그녀는 고개를 슬며시 가로저었다.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이제 고작 3분 지났을 뿐이지만, 체감상으로는 무슨 한 시간은 지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치발이 말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만둘 수 없지.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대체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진화했길래 이런 기묘한 재주를 부리는지 궁금해졌거든.”
뚜둑.
살이 붙고 근육이 붙은 아치발이 오른손을 위협적으로 우두둑거렸다. 스테치를 쳐다보는 그의 눈은 심연처럼 깊고 어두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오와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너는 앞으로 몇 번 더 죽을까?”
스테치가 다가올 죽음에 대비하여 이를 악무는 순간, 아치발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아치발의 움직임을 멈추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그리운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 엘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비록 그 생김새가 아치발의 기억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틀림없는…….
“데스트라!”
아치발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나 옆에서 이를 보고 있던 스테치와 프레야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아버지가 딸에게 지어 보일 법한 표정이었겠지만, 스테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치발은 자식들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거지?
'이 썅놈이 대체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 거야……. 젠장!'
굳이 아치발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걸로 보아하니, 데스트라는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프레야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스테치가 미친 듯이 버둥거렸지만, 이미 아치발의 정신은 데스트라에게 팔려 있었다.
신체루스는 데스트라를 보고선 어처구니없어했다. 비록 자기만큼 완벽하진 않았지만, 스테치 일행이 자기와 똑같은 방식으로 신들 중 하나를 부활시켰다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터벅-. 터벅-.
데스트라에게 다가간 아치발은 손을 들어 그녀의, 아니, 정확히는 엘레나의 뺨을 어루만졌다.
“모습이…… 많이 변했구나. 그건 그러니까…….”
“『예. 한번 눈을 감고 일어나니,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더군요.』”
아치발은 눈을 감았고, 데스트라는 말을 이어 나갔다.
“『아버지. 이제부터 무얼 하실 생각이신가요?』”
“뻔하지 않느냐?”
아치발은 양팔을 넓게 벌리더니, 보란 듯이 말했다.
“긴 시간이 흘러, 드디어 마력을 회수하기에 완벽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마력을 되찾고 나면, 다시 검은 조각을 만들어 낼 거야. 그럼 너도…… 아니, 카인이랑 엑스턴도 모두 함께, 이전처럼 살 수 있어!”
데스트라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당장 울음을 터뜨리려는 걸 꾹꾹 참는 모양새였지만, 아치발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넷이서 다 같이 말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생명을 낳고,』”
데스트라는 아치발이 열띤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끊었다.
“『그것을 가꿔 나가는 것의 즐거움을 알려 주신 것은 아버지였잖아요. 그런 아버지가 왜 저희가 만든 피조물들의 생사를 마음대로 결정하시는 거죠?』”
“다 필요 없어!”
아치발이 빽 소리를 질렀다.
“너희가 없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시종일관 무미건조하던 그의 감정이 처음으로 분노의 색을 내비쳤다.
아치발에게 있어 인간, 엘프, 드워프는 처음부터 암세포나 종양과도 같은 존재였다.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과정에서 세 신들은 대량의 마력을 소모했고, 그것은 안 그래도 유한한 그들의 수명을 깎아 먹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세 종족은 그저 눈엣가시에 불과했을 것이다.
“날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가족은 오직 너희뿐이었다. 너희가 없으면, 난 다시 억겁의 세월 동안 이 세상을 홀로 살아가야만 해. 그걸 잃고 싶지 않아서 다시 너희를 되살리려는 게 뭐가 나쁘다는 거지?”
아치발이 말했다.
“생명을 뿌렸으니, 다시 거둬 갈 뿐이다!”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누구나 다 언젠가는 죽어요, 아버지.』”
데스트라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를 보는 아치발의 눈빛도 점차 싸늘해졌다.
“……알겠다.”
한참 동안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던 아치발이 말했다.
푹!
그 순간, 데스트라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프레야와 가렛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크흡.』”
데스트라의 입에서 흘러나온 피는 그대로 옷깃을 적시고 내려와, 이내 메마른 땅바닥으로 스며들어 갔다.
그녀의 복부를 관통하고 있는 아치발의 수도(手刀)가 뽑혀 나오자, 기우뚱하던 그녀의 몸이 그대로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아치발이 몸을 기울여 이마에 박혀 있던 코어를 뽑아내자, 파랗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원래의 색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바닥에는 오직, 차갑게 식어 가는 엘레나의 몸만 남아 있었다.
“더러운 피조물의 몸이 네 정신을 오염시켰구나. 내가 금방 너를 원래대로 되돌려 주마.”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손바닥 위의 코어를 내려다보는 아치발. 이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있던 스테치의 머릿속에,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빌리티 “메테리얼라이즈”가 해금되었습니다.》
울분에 찬 괴성이 그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