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메테리얼라이즈
(193/203)
193화 메테리얼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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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화 메테리얼라이즈
2022.04.12.
콰장창!
유리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아치발의 구속을 강제로 깨부수고 나온 스테치는 전신의 힘을 쥐어짜 지면을 박차고 아치발에게 달려들었다.
“흐아아아-!”
이성을 잃은, 흡사 짐승에 가까운 절규. 아치발은 스테치가 구속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평소 그래 왔던 것처럼 스테치를 옆으로 치워 내기 위해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음?”
어리둥절해 하는 아치발의 면상에 스테치의 주먹이 꽂히는 순간, 터져 나온 충격파가 온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가렛과 신체루스가 나가떨어졌다.
당사자인 아치발은 한참을 날아가는가 싶더니, 지면으로 손끝을 박아 넣어 브레이크를 걸었다.
콰아아-.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수십 미터를 밀려 나가고 나서야 간신히 멈춰 선 아치발. 그는 생각지도 못한 묵직한 한 방에 놀랐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얻어맞은 안면이 쿡쿡 쑤셔 왔다.
아픔?
아치발은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린 뒤, 고개를 들어 스테치를 쳐다보았다. 인간의 몸으로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남겨 놓는 게 가능하다니, 직접 겪어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아치발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힘없이 걸어가던 스테치는 어느 한 지점에 도착하고 나서야 털썩 주저앉았다.
철벅!
물웅덩이처럼 잔뜩 고여 있던 피가 튀었다.
쓰러져 있는 엘레나의 몸.
굳이 《애니멀 인스팅트》를 쓰지 않더라도 그녀의 심장이 멎어 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품 안에 있던 회복 물약의 내용물을 엘레나의 상처로 들이부어 봤지만, 이미 때는 늦어도 한참 늦은 상황이었다.
“…….”
데스트라는 항상 몸의 원래 주인인 엘레나의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 즉, 아치발의 앞에 굳이 모습을 드러내고 시간을 끌어 준 것은 비단 데스트라만의 독단이 아닌, 양자합의에 의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그녀가 나서 주지 않았더라면, 아치발은 메멘토 모템의 진정한 능력이 발현되기 전에 그 위험성을 눈치채고 손을 썼을 가능성이 컸다. 그 상황을 지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데스트라뿐이었으니, 그녀의 판단은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요……!”
쾅!
그는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스테치에게 있어 엘레나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는 데스트라가, 제 발로 그녀를 위험에 빠트려 죽게 만들다니? 머리로는 그 이유를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차라리 말려 줬으면 좋았을 것을…….”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옆에서 나타난 프레야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도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차마 믿기 어려웠는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각성까지의 시간을 벌어 주지 않았더라면, 대륙에서 저놈을 막을 유일한 수단이 사라질 참이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X발, 자꾸 그따위로 말-”
벌떡 일어서서 프레야의 멱살을 비틀어 쥔 스테치는 곧,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는 그녀의 얼굴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프레야의 말은 스테치가 아닌, 그녀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해 꺼낸 말임을 깨달았다.
“이익!”
상황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스테치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할 뻔했다.
“연인이었나?”
아치발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진.
스테치와 프레야는 고개를 돌렸다. 아치발은 스테치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엘레나의 시체를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족과도 같은 연인을 잃어버린 기분이 어떻지? 과거의 내가 겪었던 것과 똑같은 고통을 느껴 본 지금의 너라면, 내 행동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꿈틀.
그 한마디를 들은 순간, 스테치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졌다.
이해하라고?
스테치는 프레야에게서 손을 떼며 아치발을 쳐다보았다.
“몸뚱이의 주인이나, 그걸 빼앗고 들어앉은 놈이나…….”
분노를 넘어, 거의 증오에 가까운 감정이 치밀어오를 지경이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가장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을지에 대해 수천 번이 넘도록 시뮬레이팅 하며, 스테치는 양손의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다 똑같아…… 자기 멋대로 남의 인생을 조져 놓은 주제에, 그 결과로 다가올 업보에 대해선 요만큼도 생각하질 않아…….”
전신에서 황금빛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한 스테치. 그 힘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력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아치발에게, 반지는 마치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과도 같았다.
오싹오싹했다.
절대신인 그가 지금껏 겪어 본 적 없는 기묘한 감각.
난생처음으로 드는 위기감에, 아치발은 자기도 모르게 먼저 스테치에게로 몸을 날렸다. 불안 요소를 한시라도 빨리 배제하기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
“죽어서 엘레나에게 사죄해라.”
조용히 읊조린 스테치는, 한쪽 손을 뻗었다.
메멘토 모템을 최초로 소유한 자부터 스테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소유주가 봤거나 흡수해 왔던 수많은 아티팩트. 메멘토 모템에 축적된 그 모든 정보가, 지금 스테치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스테치가 그중 하나를 떠올리자, 메멘토 모템의 어빌리티 '메테리얼라이즈'가 발동되었다.
우우웅!
반지로부터 청록색 빛무리가 흘러나오더니, 복잡한 구조의 선과 면이 얽히면서 어떠한 물체를 형성해 나갔다. 그리고 몇 초 뒤, 스테치의 손에는 자신의 키만큼이나 거대한 사이즈의 방패가 들려져 있었다.
동방장군 마르크 맥도웰의 아티팩트, 레오니다스.
아치발의 몸이 방패와 격돌하자, 스테치가 딛고 있는 지면을 중심으로 거대한 크레이터가 움푹 파였다. 그러나 스테치는 제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으며 모든 데미지를 방패로 고스란히 흡수시켰다.
“으아아아아아-!!”
투쾅!
배로 증폭된 자신의 힘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은 아치발은, 날아왔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튕겨 나갔다.
‘이게…… 부활한 절대신을 상대하기 위해 신들이 준비한 힘이라고?’
절대신이 초월적인 권능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선, 똑같은 신의 기운을 몸에 두르는 방법밖에 없다.
메멘토 모템의 마지막 봉인까지 해제하여 신의 힘까지 손에 넣은 스테치는, 그야말로 신에 버금가는 힘을 마음껏 휘두르고 있었다.
절대신과의 맞대결을 가능케 할 정도로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은 신체, 거기다 온갖 아티팩트를 자유자재로 구현화시키는 능력까지. 저게 바로 신이 아니면 달리 무엇이겠는가? 신체루스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메멘토 모템을 구성하는 것은 세 신의 정수. 그것을 담고 있던 그릇을 깨트렸으니 단시간 동안은 엄청난 힘을 얻게 되겠지만, 내용물이 모두 빠져나가고 나면 남는 것은 바닥뿐이다.
‘결국은 시간 싸움인가. 여러모로 상황이 너무 안 좋게 돌아가는군.’
아치발이 부활하긴 했지만, 그 힘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만약 스테치가 아치발의 회복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데미지를 입힌다면 그의 승리겠지만, 그 반대라면 아치발의 승리.
‘이 싸움의 결과를 끝까지 지켜볼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인데.’
신자로서 사명을 다한 신체루스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안개처럼 일렁이던 그의 몸은 곧 반짝이는 입자로 흩어져 아치발에게로 날아갔다.
“우와악!”
한편, 충격의 여파로 주변에 널린 바위 파편에 속절없이 부닥치며 굴러가던 가렛.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바닥에 피떡이 되기 일보 직전, 별안간 나타난 프레야가 그를 붙잡아 주었다.
“괜찮냐?!”
“헉-, 헉-!”
가렛은 체면이고 뭐고 따질 틈도 없이 죽자 프레야에게 매달리며 헐떡였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이러다가 옆에 있는 자기가 먼저 죽게 생겼다. 그러자 프레야는 쓰러진 바위기둥 하나에 손가락을 꽂아 넣더니, 번쩍 들어 올려 지면 깊숙이 박아 놓았다.
“숨어 있어. 절대 튀어나오지 마. 나오는 순간 넌 죽어. 그리고…….”
그녀는 어깨 위에 걸치고 있던 엘레나의 몸을 조심스럽게 가렛의 옆에 내려놓았다. 눈을 감은 그녀의 표정은 마치 잠을 자듯 평온해 보였다.
“이 몸에, 더 이상 생채기 하나 나지 않도록 해.”
말을 마친 프레야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스테치는 반대쪽 손에 아티팩트 ‘스피라투스’를 만들어 내어 아치발에게 무차별 포격을 가해 댔다.
속절없이 얻어맞은 아치발이 뒤로 훌쩍 날아갔고, 스테치가 그 뒤를 바짝 추격했다. 그의 양팔에 아티팩트 ‘폰두스’ 가 덧씌워지고, 손에는 할로우 블레이드와 아티팩트 ‘골드메라’가 쥐어졌다.
상대가 날아가는 속도보다도 먼저 앞에 도착한 스테치는, 몸 전체를 비틀어 쥐어 짜낸 회전력을 검에 실어 아치발을 후려쳤다.
빠카아악!
상상을 초월한 중량이 아치발의 몸에 꽂혀 들어갔고, 무언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드넓은 창공을 날고 있었다.
“읏.”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데미지가, 심상찮은 기세로 누적되어 간다. 특히 방금의 일격은 꽤 강력해서, 아주 잠깐이지만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건 마치…….’
세 신과 싸우던 때와 비슷한 감각. 아치발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순간. 마력으로 화한 신체루스의 기운이 그의 몸으로 흡수되면서, 그가 가지고 있던 기억과 지식도 모두 함께 들어왔다.
‘……그랬던 거였구나.’
아치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데스트라의 모습을 보고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가 검은 아티팩트로 조각조각 나누어진 직후에 세 신도 수명이 다한 모양이었다.
‘그 셋이 저 반지를?’
흘끗 시선을 돌려 보니, 저 멀리에서 기다란 망토를 바람에 나부끼며 날아오는 스테치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인상이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했다.
‘너희는 그렇게까지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냐? 그래도 한때는 가족이었던 나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기 위해, 저런 물건을 만들어 둘 정도로?’
지독한 배신감에 아치발은 치를 떨었다.
‘……저놈을 죽여서, 너희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다.’
철저하게 쳐부숴 주겠다. 그렇게 마음먹은 아치발은 공중에서 제동을 걸어 멈춘 뒤, 전신을 타고 흐르던 마력을 단단하게 굳혔다. 상대도 신의 기운을 두른 이상, 어쭙잖은 수준의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똑같은 신을 상대한다는 생각으로 전력을 다할 뿐.
“으아아아!”
“와라-!”
일직선으로 돌진해 오는 스테치. 아치발은 오른 주먹으로 마력을 집중시켜, 있는 힘껏 스테치에게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