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화 그리고 두 사람은 (199/203)


199화 그리고 두 사람은
2022.04.18.


쏴아아아-.

폭우가 내리는 어느 늦은 밤.

영업시간을 종료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온 손님을 받은 달튼은 가게 문을 걸어 잠갔다. 아마 이 시간대에 묵을 곳을 찾는 사람은 몇 없겠지.

“이제 더 올 손님은 없는 건가?”

“손님이 더 온다면 어차피 문을 열어야겠지만, 뭐, 그래.”

클라이드의 질문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달튼은, 클라이드가 든 술병을 보더니 어처구니없어하며 물었다.

“주인한텐 말도 없이 술부터 까네?”

“……우리 술 파티 하는 거 아니었어?”

멍청한 표정으로 되묻는 클라이드의 모습에 달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그는 찬장 제일 위쪽, 그러니까 정확히는 클라이드의 손길이 절대 닿지 않을 법한 곳에서 술병 하나를 새로 꺼냈다.

비록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탓에 라벨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눈썰미 좋은 클라이드는 병의 모양으로 안의 내용물이 무엇인지를 금방 알아보았다.

“……67년산이야.”

달튼의 말에 클라이드가 기겁했다.

“제미니아 67년산! 왕들이나 마신다는 술을 대체 네가 어떻게!?”

“블랙 마켓 관리직에서 한참 뛰다 보면 가끔씩 이런 기회도 생기는 법이지. 오늘 같은 날에 싸구려를 마셔서야 쓰나.”

달튼은 그렇게 말하며 병의 마개를 딴 뒤, 글래스에 따랐다. 불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는 포도주의 색에 클라이드는 침만 삼켜 댔다. 상대가 의자에 앉을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린 클라이드는, 자신의 앞에 놓인 글래스와 병을 번갈아 보며 달튼에게 물었다.

“이봐, 나 슬슬 불안해지려고 하거든. 대체 오늘이 무슨 날이길래 저런 보물까지 꺼내는 건데?”

“이거.”

달튼은 품 안에서 편지 봉투 하나를 꺼내서 클라이드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클라이드는 봉투에 한번 개봉된 흔적이 남아 있음을 눈치챘다.

“뭐야?”

“나한테 묻지 말고 직접 읽어 봐.”

클라이드는 미심쩍은 듯 달튼을 한번 흘겨보더니, 편지를 꺼내 유려한 필체로 적힌 글귀를 읽어 보았다.

“어디 보자…….”

한참을 읽어 내려가던 클라이드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하는 것을 즐기며, 달튼은 짐짓 태연한 척 포도주를 홀짝였다.

그리고 잠시 후.

편지의 마지막 부분까지 꼼꼼하게 읽은 클라이드는, 경악 어린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리며 달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피식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려는 달튼에게, 클라이드가 물었다.

“청첩장?”

“어.”

“스테치가?”

“어.”

“엘프랑?”

더 대답하기도 귀찮다. 달튼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클라이드는 멍한 표정으로 포도주가 담긴 글래스에 손을 뻗었다.

“……건배.”

“그래.”

귀하다면서 애지중지할 것처럼 보이던 포도주를 맹물 마시듯 입 안으로 털어 넣는 클라이드의 모습에, 달튼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클라이드의 머릿속에서 술맛에 대한 감상은 깡그리 날아갔을 테니까.

* * *

“편지가 왔습니다, 발타자르 씨.”

“음.”

동쪽의 광산 도시, 센티그마의 어느 한 주점.

평소처럼 일을 보던 발타자르는 블랙 마켓 직통 라인을 통해 전달된 편지를 받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블랙 마켓의 관리인으로서 온갖 편지들을 쓰고 보내는 일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받는 것만큼은 영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특히 지금처럼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 가지 않을 때는 더더욱.

'뭐지?'

보통 이럴 때는 딱히 좋은 소식인 경우가 없던데. 그러다 보니 괜히 신경 쓰인다.

발타자르는 담뱃대를 한번 강하게 빨아들인 뒤, 봉투를 뜯어 글귀를 읽어 보았다. 그리고선 입에 머금었던 담배 연기를 콜록거리며 뿜어냈다.

“어이쿠, 콜록! 콜록!”

영 익숙지 않은 핑크빛 내용만 한가득하다. 설마 살면서 이런 편지까지 받아 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호흡 곤란으로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가슴을 두들기는 발타자르였지만, 그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편지를 전달해 준 배달부가 당황하여 물었다. 그는 블랙 마켓을 통해 전달되는 자잘한 메시지와 물건들을 전달하는 전문 배달꾼. 그러나 이 일을 시작한 이래로 발타자르가 저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뭐야, 너 아직도 안 갔냐?”

다시 험악한 인상으로 되돌아가려는 발타자르의 모습에 배달부는 바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문을 나서기 직전,

“야. 이거 받아.”

툭.

배달부는 날아오는 조그마한 주머니를 하나 받았다. 짤그랑거리는 소리에 안을 들여다보니, 반짝이는 금화가 열 닢 넘게 들어 있었다.

“수고비다. 가져가.”

일개 배달부에게 주는 수고비치고는 엄청나게 많은 금액이었다. 깜짝 놀란 배달부는 감사의 인사 비슷한 무언가를 웅얼거리더니, 후다닥 주점 밖으로 튀어나갔다.

* * *

“[누나! 편지야, 편지!]”

베네지아 북서쪽의 작은 마을, 카일덴트의 숲속. 주변을 돌아보고 오겠다던 시드는 잔뜩 흥분된 표정으로 돌아와서 외쳤다.

“[편지라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화살의 촉을 날카롭게 갈고 있던 미리아드는 기다란 귀를 쫑긋거렸다. 메시지 마법을 받기 위한 태그도 없고, 이곳의 위치는 그 어떤 인간도 모른다. 그런데도 누가 편지를 보내왔다고?

“[너 바보냐? 어떻게 우리한테 편지가 와?]”

“[아냐! 어둠의 숲에서 온 엘프가 직접 내 앞에 나타나서 전달해 줬다고.]”

“[갑자기 왜?]”

미리아드는 동생이 건네준 편지를 받았다. 어둠의 숲에 마지막으로 방문한 지가 벌써 수년이 넘었는데, 왜 이제 와서 편지를 보낸 걸까? 좀처럼 편지를 열어 볼 생각이 없어 보이는 미리아드가 답답해 보였는지, 시드는 편지를 낚아챘다.

“[내가 읽어 볼게.]”

“[줘.]”

“[네.]”

막 주먹을 들어 올리려는 미리아드에게 냉큼 넘겨진 편지. 미리아드는 화살촉을 쑤셔 넣어 봉인을 뜯어낸 뒤, 편지를 꺼냈다. 편지지에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면서도 싱그러운 향기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흠…….]”

첫 문구의 필체를 본 순간, 미리아드는 편지를 쓴 당사자가 누구인지 짐작했다. 그때부터는 그녀도 즐거운 마음으로 글귀들을 읽어 나갈 수 있었다.

“[뭐야? 뭔데?]”

어딘지 모르게 기분 좋아 보이는 누나의 모습에, 시드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어 댔다. 그러자 미리아드는 그를 휙 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

“[가끔 보면 넌 진짜 너무 애 같이 굴어. 좀 가만히 좀 있어 봐.]”

문장에 담겨진 감정을 곱씹어 가며 하나하나 차분히 읽어 내린 미리아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시드가 물었다.

“[왜, 왜 그래?]”

“[짐 챙겨라, 동생아. 야, 너희들도 전부 따라와.]”

뜬금없이 호출된 다른 엘프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어둠의 숲으로 가야지.]”

* * *

“선장님! 선장니이이임!!”

1등 항해사 조던이 문을 두들기자, 한참 동안 응답이 없던 선장실 안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냐!”

쾅!

문을 박차고 튀어나온 클라우디아는 우아한 폼으로 갑판을 한 바퀴 구르더니, 검을 뽑아 들고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말고 푸른 데다, 파도는 잔잔하고 조용했다.

밀수업을 하는 사람에게 방심은 일절 금물. 평소 조심스러운 성격인 클라우디아로선 당연한 행동이었다. 늘상 있는 일이라 이 정도는 익숙하다는 듯, 미리 문 옆으로 피해 있던 조던이 그녀에게 편지를 한 장 건네주었다.

“편지 왔어요.”

“……고맙다.”

검을 안에다 집어넣은 클라우디아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그것을 받았다. 일단 봉투에는 발신인이 따로 적혀 있지 않았지만, 봉인으로 쓰인 문장은 무슨 왕이나 귀족이 쓸 법한 고급스러움을 띄고 있었다.

‘처음 보는 문장인데.’

내가 이런 걸 받아 볼 만한 짓을 한 적이 있던가? 클라우디아는 기억을 더듬느라 눈살을 찌푸리는 한편, 봉투를 뜯고 편지를 읽었다.

“오.”

생각지도 못한 내용을 보게 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옆에서 뻣뻣하게 정자세로 서 있던 조던이 조용히 그녀에게 물었다.

“러브레터입니까?”

터프하기로 소문난 클라우디아는 남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아주 가끔이지만 편지까지 쓰는 이들마저 있을 정도였는데, 이번에도 혹시 그런 건 아닌가 하고 물은 것이었다.

“시끄러워.”

클라우디아는 조던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쥐어박은 뒤,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일 좀 쉴까, 우리?”

“무슨 일이시죠?”

“아니, 좀……. 육지에 들러 봐야 할 곳이 생겨서.”

그러자 조던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선 물었다.

“선장님 육지 멀미가 심하잖습니까?”

클라우디아는 육지에 오래 머무를수록 멀미가 더더욱 심해지는 타입이었다. 그래서인지 남들이 다 항구에 가서 놀고 있을 때, 홀로 배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걸 참고서라도 가 봐야지, 뭐 어쩌겠어.”

클라우디아는 투덜거리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멀미약이 충분하려나?

* * *

“아씨.”

말콤은 손에 쥔 편지를 펄럭이며 카시아에게 말을 걸었다.

“편지가 왔습니다.”

“안 봐도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

“네?”

말콤의 물음에 카시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인이 보낸 거거든. 말콤도 아는 사람이야.”

경호 업무를 수행하느라 카시아를 따라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면 누굴 뜻하는 것인지 도통 특정할 수가 없었다. 카시아는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말콤에게 넌지시 말했다.

“한번 직접 읽어 볼래? 괜찮으니까.”

갑작스런 지시에 잠시 머뭇거리던 말콤은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편지를 내려다보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잘됐군요!”

“응.”

호로록.

창가 밖에서 내리는 눈을 구경하며, 카시아는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하지만 마음속까지 따뜻해지는 것은 비단 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초대에 응하실 겁니까?”

“당연하잖아. 이제 사막도 없고 하니까.”

베네지아에 대한 공격이 감행된 지 벌써 수개월. 모래밖에 없던 카델트 대사막은 마력 폭풍이 사라진 뒤로 놀라운 성장을 거듭, 이제는 과거 사막이었다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식물들이 그곳을 채워 나가고 있었다.

마력 폭풍 때문에 대기 중에 항시 충만하던 마력이, 적정선의 농도를 유지하게 되면서 식물의 생장에 적합한 환경이 마련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 학자들의 예상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기후와 땅이 안정화 되어, 최근에는 사막을 횡단할 때 필요한 시설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가서 축하해 줘야지.”

* * *

“편지가 왔소, 멜키오르. 아마 당신에게 직접 보내면 상황이 애매해질 수 있으니 대신 내게 보낸 것이겠지.”

드워프들의 지하 도시, 아이젠.

그리고 그 안에서도 가장 한적한 구석에 위치한 어느 장소에서, 도리안은 손에 쥔 편지를 세워져 있는 비석 앞에 놓아두었다.

비석은 드워프들의 도시에 놓여졌다고 보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조촐하고 형편없었다. 비석 위에는 그저 멜키오르의 이름만이 대충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도리안이 투덜거렸다.

“웃기는 노릇이야. 윗대가리 놈들은 이제 와서 당신에 대한 공적을 기리겠다고 날뛰고 있거든. 아주 그냥 동상이라도 하나 지을 기세라니까. 아마 곧 있으면 이 무덤도 새롭게 다시 만들어 줄 거요.”

며칠 전.

도리안은 곱게 봉인된 편지와, 흰 천과 끈으로 단단히 둘러싸인 검 하나를 받게 되었다. 풀어 헤친 천 안에서 멜키오르의 마지막 작품인 할로우 블레이드가 굴러 나오는 것을 본 순간. 도리안은 편지를 보낸 발신인과, 검을 함께 보낸 그 의도를 파악했다.

안타깝게도 멜키오르는 이미 타계한 지 오래였다. 그래서 도리안은 발신인이 원하는 대로, 검을 드워프 기술자들의 연구회에 제출했다.

처음에는 드워프 대장장이들 모두 믿기 어려워했지만, 실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 할로우 블레이드가 뿜어내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과, 그 디자인은 모두 제작자가 멜키오르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결국 오랫동안 헛소리로 치부되어 온 무구와 아티팩트의 결합 이론이 사실로 드러나게 되면서, 멜키오르의 명성과 업적은 복구되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죽어서야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편지는 뜯지 않았소. 내게 온 것이 아닐 테니까.”

도리안은 함께 가져온 꽃다발을 비석 앞에 내려놓았다. 지금은 그저 그의 업적과 노력이, 헛수고로 남지 않게 되어 다행일 따름이었다.

“편히 쉬시오.”

* * *

“드디어!”

편지를 모두 읽은 시무스가 반색하며 외쳤다. 몇몇 셸로어들이 화들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지만, 시무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청첩장일세! 두 사람 모두 처음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고는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음음~ 하는 소리와 함께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시무스. 그의 모습에 셸로어들은 서로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고작 청첩장이 뭐길래 그렇게까지 좋아한단 말인가.

“저, 의장님.”

옆에서 그의 업무를 보조하던 보좌관이 물었다.

“실례지만 혹시 그 ‘행사’에 참석하실 생각이십니까? 업무가 꽤 많이 밀릴 텐데요…….”

“갈 건데?”

“…….”

“나 말리지 마라.”

“…….”

어린애처럼 어거지로 밀어붙이는 시무스의 표정을 본 보좌관은 내심 좌절했다. 이거 무슨 일이 있어도 일은 안 할 생각이로구나. 그는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알겠습니다. 일정을 조정해 보도록 하죠. 실례지만 장소가 어떻게 되나요?”

“베네지아의 어둠의 숲일세.”

“베, 베네지아…….”

보좌관은 물론, 옆에서 유심히 귀를 기울이던 셸로어들 모두가 당황했다. 단순히 거리가 멀다는 문제도 있었지만, 베네지아의 국민들 대부분은 일련의 사건 때문에 북부 엘프들에 대한 경계가 짙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소규모로 조용히 갔다 올 거야, 조용히. 하여간 자네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까. 그리고 설령 들켜도, 베네지아의 새 왕이 알아서 덮어 주겠지.”

시무스는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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