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200/203)


200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2022.04.19.


“아텔리어 님, 일어나세요.”

“…….”

“……일어나라고!”

우당탕!

쩌렁쩌렁 울리는 호통 소리와 함께, 침대 위에 엎어져 있던 스테치는 그대로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고통으로 신음하며 천천히 눈을 떠 보니, 유령불 랜턴을 든 스트라이더 에이다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잠들어 있던 곳은 어둠의 숲의 엘프 마을. 스테치는 술에 취했다가 깬 사람처럼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대더니, 당황스러운 얼굴로 에이다에게 물었다.

“뭐, 뭐야?”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오늘 일정을 소화하시려면 지금 일어나셔야 합니다.”

마치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듯, 곧장 사과의 말을 건네는 에이다. 그가 이뤄 낸 업적 탓인지, 그녀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엘프들은 스테치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깍듯이 대하고 있었다.

“오늘 일정이라니……. 잠깐, 설마 벌써 아침이라고? 나 잠든 지 얼마 안 됐는데?”

스테치가 졸린 눈을 비벼 가며 창밖을 내다보자, 사방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고 어둠이 지천에 깔려 있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당장 일어나십시오. 엘레나 님은 이미 일어나셨습니다.”

에이다의 말에 스테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알았어……. 거 되게 쪼아 대네.”

* * *

“스테치.”

몸에서 아주 풀과 꽃 냄새가 나도록 씻어 댄 스테치가 흠뻑 젖은 머리를 쥐어짜며 욕탕에서 나올 무렵, 그루터기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스카이와 가렛이 그에게 손짓했다.

“왔냐?”

스테치가 자연스럽게 두 사람과 악수를 하자,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베네지아 호위병들이 뜨악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왕이 된 소감이 어때?”

“구려. 나라 운영하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야. 내가 그래서 안 한다고 했잖아.”

스카이는 투덜거리면서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번쩍번쩍한 예장용 갑옷, 거기에 등 너머로 늘어진 붉은 망토까지. 스테치가 피식거리며 비웃는 가운데, 가렛이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잖아.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서, 그나마 그 자리를 맡을 정당성을 가진 사람은 너뿐이었으니까.”

아치발을 쓰러뜨린 지도 벌써 4개월이 지났다.

수도를 함락하고 애당초의 목적을 달성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를 지켜보던 각 지역의 영주들과 살아남은 수도의 귀족들은 이를 평민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간주하고 병사들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때, 스카이를 베네지아의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자고 제안했던 사람이 바로 스테치였다.

스카이는 베네지아에서도 상당히 명망 높은 크로스포드 공작가의 사생아. 그를 내세우면 복잡한 혈통이나 신분 문제는 물론, 전투에서의 명분 또한 함께 챙길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결국 수많은 조각으로 분해되려던 베네지아는, 새롭게 왕좌를 차지한 스카이 걸킨을 중심으로 다시 하나가 되어 태어났다.

“다시 생각만 해도 어이가 없군. 그 엿 같은 핏줄이 그런 타이밍에 그렇게 쓰일 줄 누가 알았겠냐고.”

어머니의 원수인 크로스포드 가문에 강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던 스카이는 미친 듯이 반발했지만, 그냥 놔두면 베네지아가 풍비박산 날 지경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자 고심 끝에 이를 수락했다.

“너는 요즘 어때?”

“그냥…… 잘 지내. 생각보다 이 일이 제법 잘 맞는 것 같아.”

가렛은 스카이의 손과 발이 되어 나라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이전까지는 사람을 아끼지 않고 수탈을 일삼는 지방 귀족들이 판을 쳤었지만, 가렛이 직접 정당한 권한을 손에 쥐고 감사를 돌면서 이러한 문제가 크게 줄어들었다.

“너무 좋아하지 마라. 적당히 하다가 다시 성으로 돌아오게 만들 거니까. 설마 언제까지고 그렇게 편히 놀고 마시면서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한 건 아니겠지?”

“……이거 미운털이 아주 단단히 박혔는데.”

가렛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쨌든, 두 사람 다 바쁜 와중에 와 줘서 고맙다. 식전까지는 아직 꽤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이 근처에서 대충…… 느긋하게 기다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차로 돌아가려던 바로 그때, 저 멀리에서부터 다가온 시무스가 외쳤다.

“이봐!”

“의장님.”

스카이가 먼저 시무스와 악수를 하고, 그 뒤에 스테치와 가렛이 가볍게 묵례했다. 시무스도 반갑다는 듯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들겨 준 뒤, 스카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초대해 줘서 고마웠네, 스카이. 덕분에 국경을 편하게 넘어왔어.”

스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에서의 싸움은 대륙을 위기에서부터 구해 내기 위한 필사의 전투였지만, 베네지아 내에서 그 실상을 아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공식적으로는 반란이 일어났다고만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절대신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들을 백날 해 봤자, 일반인들은 그저 허무맹랑한 헛소리로 치부해 버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현실성 없어 보이는 변명을 내세울 바에야, 차라리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소리를 들려주는 편이 훨씬 나았다.

문제는 스테치 일행을 도와준 북부 엘프들이었다.

그들은 스테치를 도와 아치발을 쓰러뜨리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해 주었지만, 진실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있어 그들은 남부를 위협하는 적대 세력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일이 사람들이 내비치는 반응에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시무스 의장님.”

스카이가 말했다. 스테치는 누군가를 높여 부르는 스카이의 모습이나 말투가 영 이상했는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북부에서 뭐가 왔는지 어쨌는지조차 모릅니다. 아마 대부분은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겁니다.”

스카이의 말대로, 북부 엘프들에 대해 악담을 퍼붓고 다니는 사람들은 원래부터 소식통이 빠삭한 보수적인 귀족들이나 수도 전투에서의 생존자들뿐. 사람들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채기도 전에, 왕권 교체가 매끄럽게 이루어진 덕분이었다.

“지금부터는 베네지아가 남부를 선도해서 인종차별적인 정책이나 관습, 가치관들을 전부 뿌리 뽑을 겁니다. 의장님은 편하실 대로 행동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이번 결혼식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엘프와 인간이 하나로 맺어지게 되는 이 역사적 순간이, 향후 정책들에 있어 귀중한 초석이 되어 줄 테니까요.”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테치는 벙찐 얼굴로 스카이에게 물었다.

“너 왜 이렇게 입에 기름칠한 것처럼 말이 술술 잘 나오냐? 내가 아는 그놈 맞아?”

“난 원래부터 이랬어, 새꺄.”

기껏 차린 예의를 내던지고 바로 험악한 말투가 되어 쏘아붙이는 스카이. 그러자 턱 끝을 매만지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시무스는, 곧 스테치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까…… 자네는 정말 귀중한 존재로군.”

“네?”

“믿거나 말거나, 북부에서도 엘프와 인간이 결혼까지 한 사례는 없었어. 북부가 남부에 비해 차별이 훨씬 적긴 해도, 아직도 대부분의 엘프들에게는 인간들에 대한 묘한 거부감이 남아 있거든.”

그의 말에 스테치와 스카이, 그리고 가렛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신체루스는 인간들을 선동하여 엘프들에게 잊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겨 놓았다. 기본적으로 인간과 잘 지내는 북부 엘프들조차도 저런데, 남부 엘프들은 오죽했을까.

“물론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예외가 일어났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그렇다고 알고 있네. 그러니까 스테치 자네는 인간과 엘프가 이어진 가장 첫 번째 실례(實例)가 되는 거야.”

거기까지 말한 시무스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마 두 종족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는 수명 문제를 들 수 있겠지. 엘프들은 장수하지만, 인간들은 단명하니까. 자네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각오하고 있나?”

그러자 스테치는 긴장감 하나 없는 얼굴로 말했다.

“글쎄요……. 저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요.”

“음?”

스테치가 말을 이어 나갔다.

“필멸자의 몸으로 신의 힘을 오랫동안 두르고 있어서 그런지, 신체에 알 수 없는 변화가 생겼다더군요. 아마 일반인에 비해서는 좀…… 아니 훨씬 더 오래 살 겁니다.”

시무스는 다행이라는듯 싱긋 웃더니 말했다.

“……그런가. 그거 정말 잘됐군.”

그러나 그 웃음은 곧 짖굳은 표정으로 뒤바뀌었다.

“당연하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나올 아이들도 어떤 의미로는 최초가 되겠지? 흐흐. 이거 아주 기대되는구먼.”

스테치는 갑작스러운 시무스의 발언에 크게 당황하여 할 말을 잃었다. 그 반응이 나름 만족스러웠던 시무스는 크게 웃으며 스카이에게 말했다.

“그럼 난 다른 곳에 가서 따로 일 좀 보겠네. 어둠의 숲 지도자들과는 한 번쯤 제대로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거든. 조금 이따 다시 보게나.”

시무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마을 안쪽으로 훌쩍 떠나 버렸다. 시무스가 시야에서 점이 될 정도로 멀어지자, 가렛은 스테치에게 물었다.

“듣고 보니 나도 궁금하네. 너랑 그 아가씨 사이에서 나온 자식은 어떻게 생겼을까? 엘프와 인간의 혼혈이라니, 상상도 안되네.”

“상상한다니, 그런 말 꺼내지도 마라. 징그러우니까.”

스테치가 으르렁거리자, 스카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가렛의 옷깃을 잡아서 질질 끌어당겼다.

* * *

“예뻐요, 언니.”

카시아는 엘프 전용의 혼례복을 걸친 엘레나를 보며 감탄했다. 흰색을 베이스로 하여 갈색 줄무늬와 연두색의 포인트가 들어간 깔끔한 색상. 인간들의 결혼식 복장에 비해서 상당히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이었다.

“그, 그래? 이거 입고 걸어갈 때는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엘레나는 어딘가 영 불편한지 몸을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체형에 딱 맞게 제작되어서 그런지 라인이 부곽되는 건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덕분에 이걸 입고 뛴다든지 하는 건 꿈도 못 꿀 정도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잠깐만 입으면 되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진행 중입니다. 지금 나와 주시면 돼요.”

신호를 들은 엘레나는 카시아와 함께 문 밖으로 나섰다.

* * *

꽃잎이 눈발처럼 흩날리고 있는 가운데, 참석 중인 인원들 한가운데로 길이 하나 나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스테치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피식 웃어 버렸고, 엘레나는 천천히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하객들 모두가 숨죽이고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가운데, 나무 윗쪽에서 연신 꽃잎을 뿌려 대는 엘프들의 환호를 받으며 나아간 엘레나는 곧 스테치의 옆에 서게 되었다.

“긴장돼서 잠시도 잠을 못 잤어.”

스테치가 두 눈을 끔뻑거리며 속닥거렸다.

“누구는 안 그런 줄 알아요?”

엘레나가 대꾸했다. 두 사람이 주변을 둘러보자, 수많은 하객들의 시선이 집중된 것이 보였다.

“괜히 돌아봤네.”

“……그러게요.”

앞을 쳐다보자, 주례를 서는 시무스와 스카이의 모습이 보였다.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지만, 둘 다 너무 긴장한 탓에 귀에 들어오는 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그럼, 반지를.”

시무스의 말에, 스테치는 왼손에 낀 메멘토 모템을 보여 주면서 장난스레 물었다.

“원한다면 이거 뽑아서 줄 수도 있는데.”

“야 이 자식아. 그걸 뽑아 버리면 너도 나도 죽잖아.”

케인과 함께 반지가 든 함을 들고 있던 프레야가 핀잔을 주었다. 그 장면을 본 몇몇 하객들 사이에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케인만큼은 이 경사스러운 순간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는지, 어울리지 않게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되어 프레야와 함께 엘레나에게 걸어왔다.

“……행복해야 된다.”

“네.”

미리 준비해 둔 반지를 함에서 집어 올려 서로에게 끼워 주고, 스테치와 엘레나는 서로를 응시했다.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스테치는 스스로가 말하고도 쪽팔린듯,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을 알아들은 엘레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행복해요.”

하객들의 환호성 속에서,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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