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1화 8년 뒤 (1) (201/203)


201화 8년 뒤 (1)
2022.04.20.


“그래서 너네 아빠가 ‘프레야~’ 하고 부르니까 내가 휙! 하고 튀어 나가서는…….”

“…이모.”

“오냐.”

“재미없어.”

땡-.

소녀의 뾰로통한 한마디에, 마룻바닥에 앉아 한창 신나게 떠들어 대던 프레야가 옆으로 쓰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녀는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 나갔다.

“그 이야기 벌써 몇 번째인지 알아?”

“어……. 아니, 모르겠는데.”

그야 딱 스테치와 함께하던 시절밖에 남아 있는 기억이 없으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의 레퍼토리가 한정되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닌가. 그러나 프레야가 뭐라 항변하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하도 많이 들어서 재미도 없는 데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잖아.”

“컥.”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꼬맹이, 어린 주제에 꽤나 말솜씨가 좋다. 보통 저 나이대 아이들 입에서 허무맹랑이라는 단어가 나오나? 어쩌면 엄마 쪽을 닮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프레야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소녀에게 물었다.

“알레시아…… 꿀 넣고 차 끓여 줄까?”

“또 말 돌리는 거 봐.”

알레시아의 말에 프레야는 식은땀을 흘렸다. 아마 이 패턴대로라면 차나 쿠키에 이어 장난감 놀이까지 제안해도 거절당할 것이 분명하다.

“나 나갈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알레시아가 나가 버리자, 방 안에는 프레야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알레시아? 알레시아! 야! 거기서랏!”

한참이 지난 뒤에야 정신을 차린 프레야는, 소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알레시아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집 앞을 지나가던 엘프들의 당황스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프레야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오, 애 보는 거 진짜 귀찮아! 확 다 때려치워 버릴라!”

애 돌보기 경력 8년 차의 한탄이었다.

‘다 나빠!’

한편, 알레시아는 애꿎은 돌멩이들만 뻥뻥 걷어차며 숲속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품 안에는 가는 길에 마주친 이웃들이 건네준 과자나 음료 따위가 잔뜩 들려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 아름이나 되는 간식조차 그녀의 기분을 달래 주진 못했다.

맛은 있었지만.

‘엄마도 아빠도 맨날 허허 웃어넘기기만 하고, 이모는 항상 거짓말만 하고. 어른들은 전부 이상해.’

숲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던 도중, 누군가의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한마디가 모든 일의 발단이 되었다.

‘알레시아네 부모님 말야,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거야?’

항상 부모님에 대한 온갖 이야기들을 듣고 자란 알레시아였기에, 질문 자체에 대답하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증거는 있어?’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엄마와 이모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지만, 알레시아에게 돌아온 것은 구체적인 증거가 아닌 쓴웃음과 변명과도 같은 대답들이었다.

알레시아는 어쩌면, 자신이 지금까지 들어온 이야기가 모두 허구 속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된다. 어렸을 때는 뭘 모르니까 재미있게 들었지, 이제는 진위 여부부터가 의심될 지경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떡하지?’

외할아버지나 외증조할머니 댁에 놀러 갈까 하는 생각을 해 봤지만, 그래서는 결국 제자리걸음이다. 자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을 확실히 어른들에게 각인시켜 줘야만 한다.

평소 부모님의 기대대로 말 잘 듣고 착한 아이 노릇을 해 왔으니, 딱 한 번의 일탈쯤이야 괜찮지 않겠는가?

‘오늘만큼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할 거야. 아무도 날 못 막아!’

알레시아 인생 최고의 반란이 막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놓쳐 버렸다.”

머리 숙이고 싹싹 비는 프레야의 모습에 스테치는, 손바닥으로 안면을 쓸어내리며 낮게 신음했다.

어둠의 숲 바깥에서 일을 보고 막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가, 그의 얼굴은 며칠전에 비해 상당히 초췌해져 있었다. 턱과 뺨에는 정돈하지 못하여 삐죽삐죽 튀어나온 수염으로 가득했다.

“어쩌겠냐. 딸 옆에 못 있어 주는 내 잘못이지 뭐.”

휴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두 사람.

“엘레나는?”

스테치의 물음에 프레야가 말했다.

“자기 아빠랑 같이 마을의 부족 회의 나갔어. 요 며칠 바쁘더라.”

“스트라이더들한테 찾아봐 달라고 말은 해 봤어?”

“아직. 지금부터 가려던 참이야.”

“……엘레나한테는 비밀로 해 달라고 말하는 거 잊지 마.”

평소엔 누구한테나 친절하지만, 화가 나면 정말 무서운 사람이 바로 엘레나다. 만약 알레시아를 찾기 전에 애 잃어버렸다는 소식이 먼저 그녀의 귀에 들어갔다간…… 프레야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한테 뭘 비밀로 해 달라고요?”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것만 같다. 스테치와 프레야가 고개를 돌리자, 깔끔한 정복을 걸친 엘레나가 두 사람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전에 스테치가 회수했던 데스트라의 코어가, 지금은 엘레나의 이마 한가운데에 박혀 푸른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프레야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괜한 변명 하려고 들었다간 오히려 상황이 더 개판이 될 수도 있었다.

“미안.”

“뭐가 미안하죠?”

“알레시아가 사라졌어.”

엘레나의 얼굴이 귀신처럼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옆에서 보고 있던 스테치와 말을 꺼낸 당사자인 프레야가 ‘으악’ 하는 작은 비명과 함께 몸을 움츠러뜨렸다.

“어디로 갔죠?”

“글쎄, 잘 모르겠는네. 일단 마을을 한 바퀴 돌았는데 못 찾았어. 다른 사람들 도움을 구하려고 다시 돌아왔는데 마침 스테치랑 막 마주친 참이었고…… 그런데 왜?”

뭔가 이상하다.

당장에 버럭 화부터 낼 줄 알았던 엘레나는 어찌나 당황했는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그녀의 표정에 불안함을 느꼈는지, 스테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보, 왜 그래?”

그러자 그녀는 스테치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찾아내라고 스트라이더들한테 지시하세요. 빨리!”

후다닥!

무언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스테치가 헐레벌떡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두 사람만 남은 자리에서,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던 엘레나가 입을 열었다.

“급하니까 가면서 이야기하죠. 따라오세요.”

프레야는 엘레나의 뒤를 따라 마을의 거리로 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지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순찰을 돌던 스트라이더들에게서, 몬스터들의 집단 움직임이 감지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여기까지만 들었는데도 벌써 등골이 싸해지는 기분이다. 프레야가 눈썹을 꿈틀거리자, 엘레나가 말을 이어 나갔다.

“어둠의 숲에서는 아주 가끔 있는 일이에요. 대량 발생한 몬스터들이 다른 땅을 찾아서 이동하는 현상인데, 문제는 그 이동 루트가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거죠.”

발생한 개체 수에 비해 근처의 먹잇감이 현저하게 부족할 경우, 몬스터들은 집단 이주를 시작한다.

물론 엘프들도 그만한 수의 몬스터들이 순순히 숲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구경만 하고 있진 않는다. 다만 놈들이 마을 근처를 지나갈 때 섣불리 자극했다간 이동 경로가 꼬여 큰 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되도록이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무리를 유도한 다음 사살하는 편이었다.

“오늘 회의도 그에 대한 대응 방침을 논의하려고 한 거예요. 최대한 빨리 통보를 내리고 집에 돌아온 건데 설마 이런 일이 터졌을 줄은…….”

프레야는 그제야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파악했다. 만약 알레시아가 비상이 떨어져 경계가 강화되기 직전에 마을 밖으로 나갔다면 큰일이다.

“아, 알레시아!!”

패닉에 빠진 프레야의 입에서 소녀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자신이 알레시아를 제대로 데리고 있지 못해서 이 사단이 난 거다. 프레야는 숨통을 죄어 오는 듯한 죄책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진정해요.”

“내 잘못이야! 만약 그 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러자 엘레나는 프레야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으며 말했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하나부터 해 나갑시다. 추적은 제가 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엘레나의 목소리도 살짝 떨리고 있었다. 프레야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숲속을 한참 동안 거닐던 알레시아는,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하고 나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가 자란 자리나 바위가 놓인 위치 등, 모든 것이 낯설었다.

“…….”

조용하다.

알레시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로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았다. 어둠의 숲이 원래부터 벌레나 새소리조차 듣기 힘든 장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건 지나치게 조용했다.

‘……어디지?’

이런 세상에. 길을 잃어버렸다.

알레시아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왔던 길을 되짚어 보려 했지만, 애초부터 길도 없었던 숲이었던지라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조금 늦은 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녀는 처음으로 겁을 집어 먹었다.

두두두-.

그때, 지축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숲이 워낙 조용해서 그런가 그 소리 하나만큼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깜짝 놀란 알레시아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

어둠 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얼굴을 찡그리던 알레시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바로 옆에 놓인 바위 근처로 숨었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쿠쿠쿠-!

그녀가 있던 자리를 짓밟으며, 수많은 그레이트 울프들이 달려 나갔다. 지면에서 피어오른 먼지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질 만큼,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어둠을 뚫고 흉흉하게 빛나는 몬스터들의 안광에, 알레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모, 몬스터다……!’

그녀가 지금까지 봐 온 몬스터들이라곤 죽은 사체들뿐. 실물이 발하는 압박감은 도저히 사체에 비할 바가 못 됐다. 공포가 마음속 깊은 밑바닥으로부터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엄마 아빠는 물론이고, 다른 어른들조차 자기가 여기에 있는 줄 아무도 모른다. 구하러 와 줄 사람이 있을 턱이 없다. 그냥 엄마 아빠 말이나 듣고 얌전히 집에 있을걸.

‘이모……!’

자기가 못 나가도록 막으려던 프레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왜 야멸차게 대했을까. 알레시아는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크르르.

그런 그녀가 숨어 있는 돌덩이 뒤에서, 무리 행렬을 이탈한 그레이트 울프 하나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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