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1화 (1/56)

<-- 포토벨로 거리의 초록색 간판 골동품점 -->

#1.

세상엔 두 종류의 작가가 있다.

계속해서 글을 써내는 작가와,

...평생 단 하나의 작품밖에 쓰지 못하는 작가.

앤 셀린은 분명 후자였다.

20여 년 전 앤 셀린이 쓴 첫 작품 〈공주와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야기는 단순했다. 등장인물도 단 두 명뿐이다.

타는 듯이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아름다운 공주,

그리고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금발의 기사.

기사는 아름다운 공주에게 첫 눈에 반해 청혼한다. 공주는 기사에게 이렇게 답한다.

“내 방 발코니 밑에서 100일 밤낮을 기다려준다면, 당신의 사랑을 믿고 결혼해드리지요.”

기사는 바로 그날부터 공주의 성 앞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공주를 기다린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자리를 뜨지 않고.

그리고 99일째가 되는 날 밤, 단 하룻밤을 남기고 기사는 공주의 성 앞을 떠나버린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다. 이렇게나 허무한 끝.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에 더 불타올랐다. 결론을 두고 여러가지 토론이 일어났다.

기사는 왜 하루를 남겨두고 공주를 떠났을까?

공주도 기사를 사랑했을까?

두 사람은 다시 만났을까?

속편을 바라는 독자들의 편지가 출판사에 쇄도했다. 그러나 어떤 물음에도 작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났다. 얼굴 없는 작가, ‘앤 셀린’의 이름은 그렇게 잊히는 듯했다.

그런데 20년 만에 앤 셀린이 차기작을 썼다. 그냥 차기작도 아니고 〈공주와 기사〉의 다음 이야기를. 그 원고가 갓 대학을 졸업한 신입 편집자, 코델리아 그레이의 앞으로 들어온 것은 기적이었다.

자신의 이름 앞으로 온 첫 원고, 그것도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유명 작품의 후속작이라니. 코델리아가 처음 원고를 붙잡았을 땐 이 믿지 못할 행운에 손이 덜덜 떨려올 정도였다.

어떤 마음으로 글을 읽고 제안서를 썼는지는 코델리아 자신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인물 설정집과 동봉된 짧은 원고 초반을 코델리아는 다만 닳도록 읽고 또 읽었을 뿐이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금 이 자리에 와 있었다.

그래 지금 이 자리.

지금 코델리아는 편집장 메리앤에게 원고와 제안서를 넘기고 편집장실 앞에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한 시간쯤을 문 앞에서 서성였을까, 조용하던 편집장실에서 드디어 무언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그리고 퍽.

블룸즈벨 출판사의 직원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소리다.

편집자 메리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원고를 구겨 던져버리는 소리.

- * *

"졸작이야."

“전작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는데요?”

“그림 탓이었지. 삽화가 괜찮잖아.”

“글도 괜찮아요.”

“20년 전의 관점에선 그럴 수도 있지.”

“20년 동안 쭉 팔렸어요. 작년에 이 작품이 몇 부나 팔린 줄 아세요?”

코델리아가 준비한 서류를 내밀었지만 메리앤은 보지도 않고 코웃음을 쳤다.

“그게 팔렸다고 차기작까지 잘 팔리란 법은 없어.”

“편집장님, 아직도 사람들은 이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해요.”

“계속 궁금해하라지. 코델리아 그레이, 너 왜 이 쓰레기 같은 소설이 20년째 불티나게 팔리는 줄 알아?”

“...재밌으니까요?”

“아니, 물음표로 끝나서야. 기사가 왜 떠났을까? 하필 단 하루를 남기고. 둘은 다시 만났을까? 궁금하잖아.”

“그렇죠, 궁금하죠. 그러니까 다음 이야기가 필요한 것 아닐까요?”

“필요하지 않아. 이런 건 안 내느니만 못해. 이걸 내면, 전작의 판매량이 뚝 떨어질걸?”

실제로 차기작이 전작의 매출액마저 떨어뜨리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코델리아가 뭐라 대답할지 궁리하는 사이, 메리앤이 얼른 말을 이었다.

“아무도 공주가 기사를 찾아가는 뒷이야기같은 걸 읽고 싶어하지 않아.”

“저는 궁금했는걸요. 저처럼 뒷 이야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분명 좋아할거예요.”

“말이 돼야 좋아하지. 공주가 무슨 특공대야? 왜 혈혈단신 혼자 기사를 찾아가? 맨발로 숲을 헤치고 가? 호수를 열흘을 헤엄쳐? 말도 안 되잖아.”

“그건 어, 시적 허용… 은 아니고 소설적 허용인가 뭐, 아무튼 동화에는 그런 게 있는 거잖아요.”

“어이구, 관대하셔라. 왜 그렇게까지 이 작품을 어필하려고 하는데? 진짜 네가 쓴 거라도 돼?”

“좋은 작품이잖아요.”

“어디가 좋은데? 난 20년 전에도 이 이야기가 싫었어. 전체적으로 개연성이 없는 이야기야. 설명되지 않은 구석도 많고. 그리고….”

“...그리고 낭만적이죠? 그러니까 성공한 거고요.”

그 말은 메리앤도 부정하지 않않다. 대신 혀끝을 차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낭만적인 죽은 작가지.”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

'죽은 작가’

출판사에서는 이렇게 한 작품을 성공시키고 사라진 작가들을 그렇게 불렀다. 그런 죽은 작가에게 온 연락이 출간으로 이어지고, 성공까지 하는 것은 보기 드문 경우라는 것을 편집장 메리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숱한 면박에도 아랑곳않고 코델리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죽은 작가가 차기작으로 재기한 케이스가 몇 없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지 않을 거예요.”

“뭐 때문에 그렇게 자신하는 건데?”

“편집자님 말씀대로 개연성이 없는 부분도 있고 너무 고전적이라 요즘 독자들에게는 식상할 전개도 눈에 띄어요. 그렇지만 그런 부분을 다 없앨만한 매력이 있어요. 이 책은 ‘진짜’예요.”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웠어? 이 책은 ‘진짜’라니...”

“책으로 발간하는 것이 좀 그러시면 일단 웹진에 실으면 어때요? 인터넷 지면이니까 부담도 덜하고, 반응이 좋으면 단행본으로 발간하고요. 네?”

코델리아의 커다란 녹색 눈 안엔 1년차 편집자들만 가질 수 있는 열정이 가득 보였다. 메리앤이 고개를 저었다.

“알았어.”

“네? 알았다고 말씀하심은 그러니까…….”

“진행해봐. 대신 기존에 하던 업무는 그대로 다 해야 해. 뭐, 본전이야 뽑겠지.”

“기존 업무에 연장 근무까지 할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됐어. 그리고 이거 아니어도 연장 근무는 해야 했어.”

“네, 그럼요, 그럼요.”

목이 떨어지라고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만 해도 앤 셀린이란 작가가 이렇게 저를 성가시게 굴 줄은 알지 못했다.

첫 투고가 메일이 아니라 우편으로 왔을 때 예상했어야 했는데 이 작가의 사전에는 메일로 업무를 한다는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는 말에도 전화번호를 적어달라는 말에도 앤 셀린은 우체국의 인이 찍힌 노란 봉투 안, 하얀 종이로 답장을 전해왔다.

[전 전화번호가 없어요. 이메일 주소도 없습니다.]

진심으로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이메일 주소 같은 것은 내 사전에 없다’라는 말을 돌려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컴퓨터가… 없어?”

코델리아가 그렇게 투덜거리자 옆자리에 앉은 가렛이 손사래를 쳤다.

“노작가 중엔 아직 손으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많아.”

“요즘 같은 시대에도?”

“20년 전에 마지막 출간작을 낸 작가라면서? 그 시대 사람에게 글은 연필로 쓰는 거였지. 직접 출판사로 들고 오라고 해. 아니면 코델리아 네가 가던가.”

“그래도 그렇지, 이메일도 전화번호도 없는 건 좀 특이한 거 아니야?”

“전화 공포증인가 보지. 이메일도 없고, 전화도 없고, 면대면으로 진행하는 수밖에 없네. 뭐 아직 출간 일정이 잡힌 것도 아니고 급한 일은 아니니까. 근데 이 작가 혹시 집도 없다고 하는 건 아니야?”

“설마.”

그리고 그 설마가 코델리아를 잡았다. 일주일 후, 블룸즈벨 출판사의 코델리아 앞으로 다시 고풍스러운 봉투가 하나 도착했다. 거기엔 역시나 타자기 글씨체로 이렇게 쓰여있었다.

[전 집 주소가 없어요.]

존재하기는 하시나요, 작가님?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코델리어는 다음 줄을 읽었다.

[다행히 원고를 맡길 곳은 있습니다. 포토벨로 거리 끄트머리에 초록색 간판을 한 골동품 상점이 있어요. 이번 주 수요일 저녁 일곱 시에 그곳에 가세요. 다른 요일, 다른 시간은 안돼요. 꼭 그때 가셔야 해요. 그곳에 제법 근사한 남자 직원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가 주는 원고를 받으세요.]

“동화 속에서 사는 사람이군.”

옆자리에서 칸막이 넘어로 편지를 훔쳐보던 가렛이 다시 킥킥거렸다.

점심시간에도 컴퓨터도 전화도 집도 없다는 작가에 대한 뒷말과 농담이 이어졌다. 편집장 메리앤이 거보라는 듯이 혀를 찼고 가렛은 다시 놀리듯이 코델리아에게 격려를 해주었다.

“그래도 제법 근사한 남자 직원이 있을 거라고 했다면서? 그 작가, 사람 마음 꼬시는 법은 아네.”

“그러게.”

“같이 가줘? 우리 코델리아 양께서 혼자 멋진 남자를 만나게 둘 순 없지.”

“됐어. 퇴근 후 시간이기도 하고, 원고만 가져오면 되는 일인데. 뭐.”

“단단히 걸렸어. 코델리아 그레이. 아주 귀찮게 됐네.”

“사실 뭐 이쯤 되니까 귀찮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 메일이나 전화를 쓰는 대신 단골 상점의 근사한 직원에게 원고를 맡겨두겠다니, 좀 낭만적이지 않아?”

“와, 낭만? 네가 아직 덜 썩었구나! 새내기 편집자라는 것이 이렇게 유니콘 같은 존재였어? 웬디, 스티브, 메리앤 편집장님 지금 코델리아가 뭐라고 했는지 들으셨어요?”

“아, 뭐 또 다 불러. 그냥 하는 얘기야, 그냥. 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나도 귀찮지. 귀찮은데….”

저보다 고작 두달 일찍 들어온 주제에 별의 별 것에 다 아는 척, 선배인 척을 하는 가렛이 또 건수를 잡았다. 그의 호들갑에 코델리아는 얼른 말을 바꾸어 얼버무렸다. 하지만 ‘좀 낭만적이다’라는 말은 위안 삼아 하는 말도 농담도 아니었다.

골동품 상점에다 맡겨놓은 원고라니, 보물찾기 같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또 잔뜩 놀림거리가 될 터였다.

마침 수요일이었고, 퇴근 후엔 곧 초록 간판 골동품점에서의 보물찾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코델리아가 할 수 있는 건 풍선처럼 부푼 마음을 얌전히 숨겨두고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 * *

블룸즈벨 출판사에서 포토벨로 마켓으로 가려면 플라타너스가 양쪽으로 늘어진 커다란 길가를 지나야 한다. 바람이 좋은 날이면 연초록색 여름 잎사귀들이 살랑살랑 소리를 내며 맞이해주는 정다운 거리다.

코델리아는 이것을 “플라타너스의 인사” 라고 불렀다. 물론 사람들 다 있는 데서 말고 혼자서 말이다. 코델리아는 그 정도로 맛이 가진 않았다.

플라타너스의 인사를 받으며 버스가 골목으로 들어서자, 모퉁이에 있는 이름 모를 나무가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났다. 코델리아는 전화기를 들어 그 나무의 이름을 찾아보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복잡하고 딱딱한 학명을 찾아보며 감흥을 깨는 대신 코델리아는 이 거리를 ‘은빛 나무 길’이라고 부르리라 결심했다.

이런 소리 역시 입 밖에 내면 네가 빨간머리 앤이냐 소리나 들을 이야기지만, 뭐 어떤가. 혼자서만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길은 오늘따라 막힘 하나 없었고, 코델리아는 생각보다 훨씬 일찍 초록 간판의 가게를 찾았다. 이 거리에는 어쭙잖은 가짜 물건 몇 개를 빅토리아 시대 물건인 양 위장해 파는 가짜 골동품점도 꽤 있었지만 여긴 생각보다 본격적인 곳인 듯했다. 하지만 이윽고 가게 문을 열었을 때 코델리아의 표정이 밝아진 것은 가게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기엔 정말이지 겁나게 잘생긴 직원이 있었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읽고 선추코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한편 더 들고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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