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코델리아 그레이.”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생글생글 웃는 꼴을 봤을 때, 코델리아는 바보 같아 보일 걸 알면서도 어버버 거릴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정말 잘생겨도 너무 잘생겼다.
“어, 그, 네? 제가 코델리아 그레이긴 한데, 음, 그러니까.”
“어떻게 알았냐고요? 빨간 머리에 예쁜 얼굴을 한 아가씨가 올 거라는 걸 들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방긋 웃었다. 요정처럼 오묘한 푸른색을 띤 눈동자가 휘어졌다.
와….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정말이지 골동품 상점에서 일하기엔 너무 싱그러운 외모였다.
“리암이에요.”
“리암, 리암이요. 아, 전 코델리아 그레이에요.”
“알아요.”
“어떻게요?”
“방금 말해주셨어요.”
아, 네,그러게 말입니다.
멍청한 말을 했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를 새도 없이 코델리아는 눈을 꽉 감아야 했다. 말끝마다 구둣점처럼 붙여대는 리암의 미소가 지닌 위력때문이었다. 그대로 눈을 뜨고 있다가는 안구에 치명적인 손상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이 부시는 미모였다.
그렇게 코델리아가 제 시력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동안에 리암은 계산기 뒤쪽으로 가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가만있자, 원고가 여기 있었는데.”
“천천히 찾으세요!”
코델리아가 다급하게 외치자, 리암이 웃으며 답했다.
“여기 챙겨두었네요. 찾을 것도 없어요.”
“아, 네”
원고는 꽤 두둑한 분량이었다. 코델리아는 그것을 건네 받아 최대한 천천히 가방에 넣고, 가방 걸쇠를 아주 느리게 걸어 잠갔다. 이제 더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저 잘난 얼굴을 이렇게 짧게만 보고 가기엔 너무 아쉬웠다.
그녀가 우물쭈물 뭐라도 더 말을 붙이려 하자, 리암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때, 딸랑, 하고 입구에 걸린 종이 울렸다. 새 손님이었다.
“어서 오세요.”
리암은 손님에게 인사한 후 바로 코델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이렇게 속삭였다.
“여기 좀 잠깐 둘러보고 있어요. 바로 올 테니까. 그냥 가면 안 돼요. 절대, 절대로요.”
암요, 가라고 등을 밀어도 구경할건데요….
코델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손님 쪽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등을 쳐다보았다. 이건 완전 대박이었다.
몇 해 전 이 거리에서 영화 촬영 중이던 할리우드 배우를 봤을 때도 이런 감탄사는 나오지 않았는데.
저 남자는 문자 그대로 ‘동화 속 왕자님’처럼 생겼다. 아니 동화 속 요정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종족이 인간은 아닌게 분명했다.
코델리아는 얼른 전화기를 꺼내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었다. [이렇게 생긴 남자가 나한테 가지 말라고 하는데 이거 나 좋아하는 거임?] 하고 사용하는 모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아니 사용하지 않는 데에도 다 가입해서 올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참으며 코델리아는 개인정보 보호법과 초상권침해법을 떠올렸다.
법이란 것이 무엇인가, 꼭 지켜야만 하는가 하는 원론적인 고민을 몇 초 한 후, 코델리아는 스마트 폰 저장 공간 내에 남자를 소유하겠다는 욕심을 버린 채 그저 생눈으로 이 순간을 실컷 즐기기로 했다.
새로 온 손님은 노부인이었다. 리암은 유리 장식장 앞에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중이었다. 노부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결국 비쌀 것이 분명한 앤틱 찻잔에 은촛대에 자수정 목걸이까지 집어 들었다. 계산대 앞에서 노부인이 코델리아를 보며 말했다.
“참나, 저 얼굴로 이거 저걸 권하니 안 살 수가 없구려.”
“또 오시려면 한 번에 이렇게 돈을 쓰시면 안될텐데요.”
노부인은 껄껄 웃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어린 아가씨가 나보다 야무지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런 칭찬을 듣고 있는 사이, 계산을 마친 리암이 다시 코델리아에게 왔다.
“구경 좀 했어요?”
“네…….”
당신 얼굴을요…….
라는 말을 뒤로 삼키고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골라봐요.”
“네?”
“여기 있는 것 중 당신이 갖고 싶은 것을 하나만 골라보세요. 그냥 드릴게요.”
“아, 네… ...네?”
“여기까지 오는 수고를 해줬잖아요. 이제 보상이 있을 차례죠. 앤이 그랬어요. 뭐든 드리라고요.”
“아, 괜찮아요. 이게 제 일인데요.”
“아뇨, 당신이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는다면 제 마음이 아플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리암은 정말 가슴이 아프기라도 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사실은 살짝 이마를 찡그린 것뿐인데 그것만으로 코델리아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져 왔다.
그, 그럼 당신을 가지고 가겠어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코델리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빅토리아 시대 풍 화려한 태피스트리는 아름다웠지만 코델리아의 작은 방이 감당할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오크 나무로 만든 안락의자는 꽤 괜찮아보였는데, 튼튼한 만큼 무거울 것 같기도 했다.
유리 장식장에 들어있는 물건들은 모두 파인 앤티크 제품이라 가격이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공짜로 준다 했다고 그런 것을 냉큼 고를 정도의 변죽은 없었다.
“어때요? 골랐어요?”
“아니요. 근데 슬슬 이 가게가 좋아지기 시작하긴 했어요.”
“멋진 곳이죠? 평범해 보이지만 여기저기에 진짜 보물이 숨겨져 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포토벨로의 요정님에게 홀린 정신을 다시 차리고 보니 이 골동품 상점은 생각보다 괜찮은 물건이 많았다.
“내가 골라줄까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코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암이 다시 웃었다.
“가격대가 적당한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죠? 집에 가져가기도 보관하기도 편한 거요?”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마법을 좀 부리죠. 자, 이건 어때요?”
리암은 짙은 색 나무로 만든 작은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비스듬한 사다리꼴로 이루어진 그 상자는 끽해야 코델리아의 서류가방만 한 크기였다.
상자의 양쪽 모서리를 감싼 금색 금속은 진짜 금일 리는 없으니 쇠에다 도금을 입힌 것일 테고, 정 가운데에 엉킨 사슬 같은 문양이 작게 조각된 것을 제외하곤 특별히 화려한 장식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을 끄는 데가 있는 물건이었다.
“뭐에 쓰는 물건이에요?”
“서책 보관함이에요. 이 안에 책을 집어넣어 보관하는 거죠.”
“두세 권 정도 들어가면 꽉 차겠어요.”
“예전엔 책이 귀한 물건이었으니 두세 권 정도만 되어도 굉장한 장서였죠.”
“엄청 오래된 건가 봐요. 빅토리아 시대쯤 되나요?”
“어쩌면 그보다 더 전일 수도요. 다른 세계에서 흘러들어온 걸 수도 있고요.”
아까 노부인에게 늘어놓던 몇십년대 추정, 무슨 왕조 물건에 어디서 구해왔네, 뭐네 하는 설명과 비교하면 꽤 모호한 말들이었다. 그편이 좋았다. 코델리아는 늘 정확하게 딱 떨어지는 것보다 애매하게 비어있어 상상의 여지가 넘치는 것들을 사랑했다.
“좋네요. 이걸로 할게요.”
“정말요? 이렇게 간단히요?”
“네, 골라주셨잖아요.”
“제대로 골라드린 거예요. 이건 진짜 마법의 물건이거든요.”
“아까 저쪽 손님한테도 그런 소리 하셨죠?”
리암이 또 웃었다. 그 싱그러운 미소를 보며 코델리아는 리암의 얼굴 주변에 꽃이 동동 떠다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마법의 물건은 서책보관함이 아니라 당신 아닌지 하는 농담이 나오려는 입을 꾹 다물고 코델리아 역시 어설프게 웃어보았다. 코델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리암은 물건을 계산대에 놓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건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예요.”
“통로요? 이 정도 크기면 고양이도 살이 많이 찌면 못들어가겠는데요?”
“고양이는 머리만 들어가면 다 들어간다고 하죠.”
“하지만 제 머리도 안 들어가게생겼어요.”
그 말이 뭐가 그리 웃긴지, 리암이 한 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잘생긴 사람을 웃겼다는 것이 코델리아는 왠지 뿌듯했다. 잠시 후 웃음이 그치자 리암이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사람이 들어간다고는 안 했어요. 코델리아, 그런 거 알아요? 시간을 초월하는 편지함 같은 거요.”
“영화에 자주 나오는 거요?”
“그래요. 그런 거 믿어요?”
“제가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걸 믿을 정도로 맛이 간 건 아니에요.”
“그런 일이 가끔은 진짜 일어난답니다, 코델리아 그레이 양. 힘든 일이 있으면 편지를 써서 이 상자에 넣어봐요. 누군가 답해줄테니까.”
“당신이 우리집에 와서 몰래 상자를 뒤져서 답장해주기라도 하나요?”
“고객 카드에 주소쓰는 란은 없으니 안심해요.”
그렇게 말하며 리암은 능숙하게 고객 카드를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그것을 건네받은 코델리아가 가방 안에서 펜을 찾으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고객 카드를 쓰게 하시네요. 대단한 기술이에요.”
“펜은 여기 있어요. 이것도 선물이에요. 서류함에 들어갈 편지를 쓸 때 쓰세요.“
“영광이네요. 자, 여기요. 다 썼어요.”
그는 필체라도 확인하듯 카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시선이 그쪽으로만 가 있는 것이 코델리아로서는 다행이었다. 펜을 건네받을 때, 카드를 돌려줄 때 슬쩍 닿는 손 탓에 코델리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버렸으니 말이다.
“코델리아 F. 그레이”
카드를 보며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읽었다.
“거창한 이름이죠. “
“아뇨 완벽하게 우아한 이름인데요.”
잘생긴 남자는 역시 칭찬도 능숙했다. 서류함을 포장하는 모습은 묘하게 어설펐지만, 다시, 가게 입구까지 들고 와 배웅해주는 태도는 매우 신사다웠다. 코델리아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에게 눈인사했다.
“꼭 편지를 써봐요.”
“정말 저희 집에 와서 답장이라도 써주시게요? 여기에 위치추적기라도 달아두신 건 아니죠?”
“네? 위… 뭐요?”
리암은 코델리아의 말을 잘 못 알아들었는지 다시 한번 되물었다.
“아니에요.”
코델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 * *
그런 미남을 만나는 건 그리 빈번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기에, 집에 와서도 코델리아는 한참 그 여운에 젖어있었다.
누군가에게 전화라도 걸어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되돌아보니 그저 드물게 화창한 날에 가로수길을 지나 포토벨로 거리의 초록간판 앞에서 만난 환상적으로 잘생긴 남자와 시시덕거리며 몇 마디 나눈 것이 다였다. 그것이 왜 이렇게 특별하게 느껴지는지 몰랐다.
단꿈에서 깨어난 코델리아는 얼른 서책 보관함의 포장을 끌러보았다.
보통의 직장인들이 그렇듯 코델리아 방의 책상 역시 본래 의미를 잃고 오늘 입은 옷 던져놓는 자리로 전락한지 오래였지만 코델리아는 오랜만에 책상 위의 옷을 치우고, 말끔해진 책상 오른쪽 한편에 서책 보관함을 얹어놓았다.
“제법 어울리는데?”
정돈된 책상에 앉으니 갑자기 뭐라도 하고 싶은 기분에 코델리아는 얼른 노트북을 켜서 메일부터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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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5 20:50
보내는 이: 가렛〈[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열혈 편집자 코델리아 그레이.
포토벨로에서 벌어진 수요일밤 보물찾기엔 잘 참여했어?
무슨 보물을 찾았는지 내일 들려줘.
그런 수고를 할만큼 값진 원고였는지도 얘기해주면 좋고.
추신. 회사 근처에서 근사한 펍을 발견했어. 내일 점심 때 같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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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메일은 편집장 메리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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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5-19:50
보내는 이: 메리앤〈[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코델리아.
오늘 받은 원고는 내일 아침 회의 때 보고하도록.
메리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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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받은 원고를 내일 아침 회의에 보고하라니.
근사한 펍에서 점심 먹을 생각하며 설렜던 마음이 푹 식을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를 만났던 일이 그녀에게 무슨 힘이라도 주는 걸까, 코델리아는 한숨 한번 쉬지 않고 선뜻 책상에 앉아 원고를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공주는 기사를 찾기 위해 먼 길을 떠나고, 하나 뿐인 후계자가 사라진 윈저튼 왕국, 시름에 잠긴 왕은 몸져 눕고 공주의 사촌언니 아델라이드가 윈저튼의 새 군주가 된다.
아델라이드 여왕은 잘생긴 공작과 결혼하여 딸 세실리아와 아들 아치볼트를 낳고, 남편이 죽은 후엔 홀로 아이 둘을 키우며 나라를 다스린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난 뒤 어느날, 잊혀진 숲에서 사라진 공주와 기사가 살던 오두막이 발견된다. 오두막 뒤뜰에는 봉긋이 오른 무덤이 하나 있다. 그 앞에 세워진 비석엔 공주와 기사의 이름이 적혀있다. 두 사람이 죽어 거기 묻힌 것이다.
오두막 안엔 그림도 하나가 있다. 붉은 머리의 공주와 금발 머리의 기사가 그려진 그림. 그리고 그들 사이에 사람이 하나 더 있다. 공주를 똑 닮은 타는 듯한 붉은색 머리에, 기사와 꼭 같은 샛초록색 눈동자를 한 아이. 공주의 아들이다.
나이든 선왕은 공주가 남긴 유일한 자식, 자신의 손자를 찾고 싶어 한다. 여왕 역시 제 조카를 찾아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왕좌를 그 아이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왕의 아들, 아치 왕자는 한숨을 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누나 세실리아보다 그애를 찾아야 한다.
야심이 드글드글한 세실리아가 그애를 먼저 찾는다면, 당장 죽여버리고 말테니까.
공주와 기사의 후속편은 뭐 그렇게 시작하는 이야기였다.
40여 페이지의 원고를 읽은 코델리아는 노트를 꺼내 간단한 메모를 적어보았다.
1. 첫째 세실리아 공주가 너무 개연성 없이 악녀로 그려진다. 세상에 이렇게 못돼 먹기만 한 여자가 어딨음? 어쩌다 이렇게 큰 거야?
2. 사촌조카에게 다시 왕위를 돌려주려하다니, 여왕은 너무 착하다. 현실감 없음.
3. 아치 왕자는 잘생겼다는 묘사는 마음에 드는데 좀 한심한 구석이 있다. 너무 한량이고 야망이 없는 것이 남자 주인공으로선 실격. 붉은 머리의 아이를 얘가 찾아도 문제임. 제대로 일 처리나 하겠나. 매일 놀기만 하는데?
다 쓰고 나니 너무 적나라한 감상이었다. 작가에게 보낼 때는 칭찬과 아부를 적당히 섞어 다시 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일 할 일이었다. 오늘은 일단 다 읽고, 아침 회의에서 메리앤에게 보고할 첫 감상을 준비한 것으로 되었다.
[개연성이 떨어지는 지점만 약간 보완하면 더 풍성한 글이 될 듯싶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코델리아는 일단 원고와 메모를 서책 보관함에 넣어두기로 했다.
그래, 그때까진 어떠한 문제도 없었다. 문제는 다음 날 아침 서책 보관함을 열었을 때 발생했다.
원고가 사라진 것이다!
대충 휘갈겨 쓴 코델리아의 메모 역시 없었다. 휑한 서책 보관함 안에 들어있는 건 오로지, 빛바랜 종이 한장 뿐이었다. 손에 쥐니 바로 바스러질 것같이 얇은 옛날식 종이. 거기엔 고풍스러운 필기체로 정갈한 글씨가 몇줄 쓰여있었다. 코델리아는 얼른 그것을 소리 내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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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침입자님께.
당신은 대체 누구길래 감히 내 방에 들어와 나의 서류함 안에 이런 서신을 두고 간 겁니까?
세실리아 누님의 인성에 대한 당신의 통찰력이 있는 평가만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 왕족모독이 가득한 문서를 당장 어머님께 전달했을 겁니다.
대체 어떻게 내 방에 들어왔는지 모르겠으나, 당신의 대범함 하나 만큼은 높이 사겠습니다.
내 외모에 대한 상세한 칭찬 역시 고맙군요. 제대로 일 처리도 하지 못하고 매일 놀기만 한다는 평 역시 기쁘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태어난 기쁨을 가장 편히 누리는 방법이라 생각하는데 귀하의 의견은 어떠신지.
삶을 즐기는 방법에 대한 견해 차이와는 별개로 유쾌하게 조롱할 줄 아는 분을 만난 것은 기쁩니다. 그러니 이번 일은 눈감고 지나가겠습니다. 모쪼록 평안히 놀기도 하시며 지내시길.
ps. 세실리아 누님의 개연성 없이 악하기만 하다는 평에는 매우 동의하는 바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컸냐는 당신의 물음엔 태어났을 때부터 이랬다고 대답해드리고 싶습니다. 적어도 제가 태어난 이래로는(그러니까 4살 때부터) 줄곧 이런 상태였습니다. 일관성 있는 사람이지요?
1314년 연초록 달 여섯 번째 날 화창한 아침에, 아를리 궁에서.
-흠 없이 착하기만 한 여왕의 아들이자 개연성 없는 악녀의 남동생인 아치 앨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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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선추코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으셨기를 바라며.
-새벽의 작가 올림.
<-- 편지의 시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