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4화 (4/56)

#4.

저기요 아치,

정말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지금 상자 앞에서 웃고 계시죠? 빨리 내 편지를 읽고 당장 답장하세요

6.9.일요일. 화가 난 직장인 코델리아.

* * *

성질 급한 코델리아 그레이 양께.

잠시만 기다려봐요, 지금 답장을 쓰고 있는데 당신이 계속 서신을 보내니 어디에 먼저 답장을 써야할 지 모르겠잖아요.

1314년 연초록 달 아홉 번째 날. 식사도 거르며 답장을 쓰려고 하는 중인 아치 앨버드.

* * *

아치 왕자님께.

네 바로 대기 중이에요.

추신: 서두르고 계신 건 알았어요. ‘아치 앨버드’ 라고 이름을 잘못 쓰셨잖아요.

6.9. 침착한 코델리아.

* * *

말 많은 코델리아 양께.

아니 그만 쓰고 잠깐 기다리라니까요.

이럼 내가 원래 쓰려던 것을 쓰지 못하지 않습니까?

추신: 매우 큰 압박으로 받고 있긴 하지만 그리고 이렇게 빨리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 마법의 상자가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하는군요.

추신 2. 아무튼, 잠자코 1시간만 기다려요.

1314년 연초록 달 아홉 번째 날 저녁. 아를리 궁에서 배를 곪고 있는 아치.

* * *

아치 왕자님께

.

(말 없이 기다리고 있는 코델리아.)

추신: 점 하나만 찍었어요. 보이세요?

6.9. 침묵의 코델리아.

* * *

못 말리는 코델리아 양께.

답장이 늦은 것 사과드립니다.

윈저튼의 연초록달은 일 년 중 여섯 번째로 오는 달을 말합니다. 코델리아, 당신이 6월이라 쓰신 걸 보면, 당신이 있는 곳과 윈저튼의 계절 세는 법이 많이 다른 것 같지는 않군요.

이즈음의 윈저튼은 사방이 초록입니다. 여름 사교계의 시작을 알리는 무도회가 언제나 아를리 궁에서 열리니, 궁전 역시 초록색 장식으로 정신이 없지요.

아름답긴 하지만 저는 이맘때의 왕성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전에 없이 사람이 복작거리거든요.

가만히 있다가는 여우사냥이네 무도회네 카드게임이네 하는 것에 불려다니느라 정말이지 눈코 뜰 새가 없을 겁니다. 저야 이제 아를리 궁 25년차 답게, 요리 조리 피해다니는 법을 잘 알고 있지만요.

제 비법은 레테 수도원 필경소에 좀 다녀오겠다고 하는 겁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란 공부는 다 피해다녔던 탓인지 어머님은 제가 책을 붙잡고 있겠단 소리만 들으면 무조건 다 승낙해주시거든요. 그곳에 가면 제가 벽만 쳐다보고 정말 ‘수도’라도 하고 오시는 줄 아시는 게지요. 사실은 수도원 놈들만큼 불경스러운 놈팡이들도 없는데 말입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요 이틀간은 수도원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그 바람에 당신의 서신에 충실히 응답하지 못한 것을 사과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제와서는 일이 그렇게 되어 원고를 바로 돌려 드리지 못한 것이 다행으로도 여겨집니다. 무슨 그런 말을 하냐고요?

코델리아, 당신이 일전에 보내준 원고엔 윈저튼 왕가의 일이 상세히도 쓰여있었습니다. 당신은 이것을 ‘원고’ 라 불렀지만 이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내 가족들이고, 모두 실재하는 인간들이지요.어쩌다 이런 것을 당신 앞에 ‘원고’라고 들이미는 사람이 생겼을까 깊이 생각해보려다 그만두었습니다. 당신이 준 원고에 이런 구절이 있었거든요.

‘깊이 생각하는 것은 아치 왕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분명 옳은 말입니다.)

그래서 얕게 생각하고 제가 낸 결론은 앤 셀린이라는 작자가 당신이 사는 곳과 내가 사는 곳을 오갈 수 있는 마법사라는 겁니다. 그자가 우리 왕국의 일을 소설이랍시고 기록하여 당신에게 준 것이겠죠. 우리가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그 마법사 앤 셀린이 부린 재주일지도 모르겠군요.

거기까지 생각하니 뭐 별 것 아니네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희 왕국에서 일어난 일을 가지고 다른 세계에 가서 책을 내봤자 무슨 큰 문제라도 생기겠습니까? 게다가 계속 읽어나가다 보니 이 작가, 정말 소설을 쓰고 앉아계셨습니다.

우선 그 원고엔 몇몇 사실들이 빠져있었어요. 먼저 나의 어머니는 에드위나 공주의 사촌 언니가 아니에요.

페일럼 공작의 딸이자, 에드위나 공주의 단짝 친구로 마치 사촌처럼 공주와 내내 함께 자라긴 했지만 말입니다.

공주가 사라진 이후 왕가로 정식입양 되었고, 다른 피붙이가 전혀 없었던 관계로 원로회의 승락을 받아 여왕이 되었으나, 아직도 왕가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우리 어머니를 걸고 넘어지는 사람이 많죠. 앤 셀린 작가는 이 중요한 사실을 완전히 누락시켰습니다.

게다가 기사 아서 길런이 에드위나 공주에게 청혼했을 때의 이야기도 사실과 다릅니다.

에드위나 공주는 그때 엘링턴의 공작, 찰스 웰즐리와 약혼한 사이였죠. 왕가의 혼례가 대부분 그러하듯, 두 사람 역시 단지 정략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지만요.

찰스 웰즐리 아주 미남이었고, 공주보다 열살이나 많았던 사교계의 총아였다고들 합니다. 약혼 당시 열 일곱 밖에 되지 않았던 공주에겐 그가 첫사랑이었겠으나 정작 그는 제 약혼자인 에드위나 공주에게 별 관심이 없었죠. 제국전쟁이 끝나고 공주가 볼모로 잡혀갔을 때조차, 단 한번 제국을 방문하지 않았을 정도이니 약혼자라 하지만 거의 남남이나 다름 없는 사이였어요.

그래서 공주에게 기사의 말은 더욱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당신 없는 내 삶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찰스 웰즐리의 그 잘난 입에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말을, 난생 처음보는 남자가 제 얼굴을 보자마자 이야기해준거예요. 갓 스무살 된 소녀의 마음을 꼬드기기엔 그만한 것도 없었지요.

하지만 에드위나 공주보다 두어살 더 많았던 나의 어머니 아델라이드 여왕께서 성급한 결정을 막았어요. 어머니는 공주에게 말했어요. 첫 눈에 반해 그런 말 하는 것 따위 아무 힘도 들지 않는 일이라고, 낭만적인 말 한마디에 취해 인생을 걸지 말라고요.

공주는 어머니에게 물었죠. 그럼 어떻게 해야 그의 말이 진심인지를 알 수 있느냐고요. 어머니가 말했어요.

-아주 힘든 일을 시켜봐요, 공주님. 힘들고, 괴롭고, 의미 없는 일을. 100일을 발코니 앞에서 공주의 얼굴만 보고 기다리라고 하는 것처럼요. 그런 걸 해낸다면, 그 마음도 사실이겠죠.

그렇습니다. 그 조언은 바로 나의 어머니, 아델라이드 공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어요. 그것 때문에 우리 착하디착한 여왕께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고 계세요. 결국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자신이라면서요.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빼먹다니, 이 작가, 왕실 내부에 있던 사람은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두 번째 장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지어내 얘기하고 있더군요.

공주와 기사는 그렇게 사라진 뒤로 단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지요. 공주가 100일 동안 기사를 찾아 헤매였단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어요. 둘이 다시 만났는지 어땠는지 역시 아무도 모르지요. 그들이 살던 집을 찾아낸 사람도 없었어요. 그들이 이미 죽었다는 것도, 그들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는 것도 모두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발칙한 글이긴 하지만 가볍게 웃어넘기면 되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원고를 바로 돌려드리려고 했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정말 그랬습니다, 코델리아.

그런데 바로 어제 ‘그 일’이 일어난겁니다.

어제 저녁, 수도원 필경소에서 면벽수행만 하는 것도 지겨워 잠시 셜록(제 말의 이름입니다)에게 풀을 먹일 겸 숲으로 들어갔던 때였습니다. 오랜만에 밖에 나온 것이 좋았는지 녀석은 끝 모르고 달리더군요.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쪽 저 편만 아직 환하게 빛나고 있는겁니다. 셜록은 말릴 새도 없이 빛을 향해 내달렸죠.

숲속 깊은 곳까지 한참을 내달리다 발견한 건 작고 아늑한 오두막집이었습니다. 조그만 앞뜰엔 노란 마리골드가 피어있었고, 한적한 뒤뜰엔 한 사람의 것 치고는 제법 커다란 무덤이 봉긋히 솟아 있었죠. 묘비엔 이렇게 적혀있더군요.

[에드위나 앤 마리 윈저튼 공주와 그의 기사 아서 셀리네 길런, 여기에 잠들다]

네, 맞아요. 바로 공주와 기사의 집이었습니다.

무덤과 비석이 있다는 건 누군가 그들을 묻고 묘비를 세웠다는 것이죠. 전 오두막에 들어갔어요. 현관의 꽃병엔 시들 시들한 들꽃이 꽂혀 있었고 부엌의 컵엔 짜놓은 지 며칠 되어 찌꺼기가 가라앉은 오렌지 주스가 담겨 있었고, 부엌엔 말라비틀어진 양파가 있을 뿐이었죠. 인기척 하나 없었어요. 하지만 썩은 냄새 같은 것도 나지 않았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여기 살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그 작은 집을 뒤지기 시작했어요. 곧 2층 작은 방의 커다란 그림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에드위나 공주와 금발의 기사 아서,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공주의 붉은 머리와, 기사의 샛초록색 눈을 빼닮은 남자아이가 그려진 그림이요.

네, 모든 것이 앤 셀린의 원고에 나온 바로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지금 무척이나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자꾸 제 본질을 잃고 ‘깊은 생각’ 속으로 빠지려고 합니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거지요, 코델리아?

당신에게 이 원고를 준 앤 셀린이란 작자는 대체 누구입니까?

죄송하지만 그것을 말해주기 전까진 원고를 드리기 어렵겠습니다.

1314년 초록달 여덟번 째 날 밤, 오랜만에 신중해지려고 노력 중인 아치 앨버트 윌리엄 렌다이크.

========== 작품 후기 ==========

읽씹왕자가 오늘도 아침부터 어그로를....

아침 일곱시 반으로 업로드 시간을 잡은 것은 이 기회에 아침형 인간이 되보려함이었는데,

어느 고마우신 분께서 제게 조아라는 예약이 돼!!! 라는 큰 가르침을 주셔서 이렇게 오늘도 예약을 걸어두고 맘 편히 자러갑니다...!

덕분에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께 한 분 한 분 고마움을 실시간으로 전달할 수는 없지만,

재밌게, 웃으면서, 즐겁게 보고계신다는 글들이 저를 춤추게 한다고는 말씀드리고 싶네요.

선추코 늘 감사합니다.

추신: 예쁜 표지의 움직이는 버전을 공지사항에서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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