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매번 이름을 하나씩 추가 중이신 아치 앨버트 윌리엄 렌다이크 엘링턴 윈저튼 왕자님께.
전 이토록 긴 당신의 이름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다 알고 있어요. 왕자님, 당신이 알려주시기도 전에요. 어떻게 알았는지는 아치 당신도 짐작하시겠지요? 앤 셀린 작가님이 인물관계도를 그려주셨거든요.
거기에는 선왕 에드워드와 그의 첫째 딸 에드위나 공주.
공주에게 반한 금발의 기사 아서 길런,
그들이 떠난 후 여왕이 된 당신 어머니 아델라이드,
아델라이드 여왕이 낳은 딸 세실리아 로잘린드 벨린다 랭커하이드 페일럼 윈저튼과
아들 아치 앨버트 윌리엄 렌다이크 엘링턴 윈저튼의 이름이 모두 적혀있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게 제가 알고 있는 전부예요.
전 앤 셀린 작가님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앞서 말했듯 그분은 철저히 정체를 감추신 채, 골동품점을 통해서 제게 원고를 전해주시지요.
사흘 후에 앤 셀린 작가님이 원고를 새로 주실 거예요. 그럼 바로 당신에게 보여드릴게요.
전 당신의 놀라움을 이해해요. 그리고 얼마나 고민하고 계실 지에도 깊이 공감하고요. 제가 당신을 도와드릴게요. 어떻게든지요.
일단은 기억에서 가물가물해지고 있는 원고를 돌려주시겠어요? 그걸 살펴보고 이 시점에서 제가 왕자님을 도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볼게요.
왕자님을 도와드리기도 전에 실업자가 될 판인 코델리아 플로라 그레이.(제 이름은 이게 다예요.)
추신: 공주와 기사의 무덤을 찾았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했나요?
* * *
완벽하게 우아한 이름의 코델리아 플로라 그레이 양께.
한 달 배우고 때려치운 제왕학에서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인질을 잡아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신의를 가지고 상대를 대하라는 말도 했지요.
나는 원고를 인질로 잡아두는 대신 당신 말을 믿고 당신께 원고를 돌려드리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그러니 다음 원고가 온다면 내게 다시 편지를 주세요. 사흘 후라니, 그땐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많은 일이 벌어져 있겠지만 말입니다.
당장 내일부터가 문제입니다. 당신은 제게 오두막의 위치를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냐고 물으셨지요? 아뇨. 지금 이 시점에서 그곳을 아는 사람은 나와 셜록, 그리고 나를 찾으러 염소를 끌고 숲을 헤매다 나와 같은 방식으로 그곳을 발견한 필경소장 베데르 뿐입니다.
이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20년 동안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쉽게, 우리 둘은 이 숲에 들어왔어요. 베데르는 비석을 보자마자 바로 말하더군요.
“에드위나 공주님이 돌아가셨어. 그래, 여기서 기사 아서길런과 함께 사시다 돌아가신거야. 아치 왕자님, 제가 공주님의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
“어, 그거 내가 아까 발견했어. 그래서 당신을 데려온거야.”
제가 이렇게 말해본들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 에드위나 공주님이 돌아가셨어. 이 늙은이보다도 더 먼저! 내가 에드위나 공주님의 무덤을 발견했어! 이 베데르가!”
큰 덩치에 맞지 않게 어찌나 호들갑인지 원.
뭐, 에드위나 공주가 생전에 저처럼 레테 수도원을 자주 찾아왔다고 하니, 오래 산 늙은이에게는 매우 슬픈 순간이었을거라고는 짐작합니다.
그렇게 3시간 동안 베데르의 감격과 흥분을 모두 들어주고 나서 일단은 입막음을 해두었지만, 곧 누군가 다시 숲을 헤매다 이곳을 발견하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자도 베데르가 그랬듯 단번에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아차리겠지요. 내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한들,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요?
나의 신실한 벗, 코델리아.
여태까지 우리가 나누었던 서신들 속에서 당신은 꾸준히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었지요.
그것에 기대어 당신에게 몇 가지 의견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앤 셀린의 원고대로 아마 공주와 기사의 무덤은 곧 누군가에게 발견될 겁니다.
선왕께서는 어떻게든 그 아이를 찾아, 제 핏줄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시겠지요. 에드위나 공주에게 막대한 부채감을 지닌 우리 아델라이드 여왕폐하께서도 그게 이치에 맞는 일이라 생각하실 거고요.
나의 누이 세실리아는 소설 그대로 아마 그 붉은 머리 남자애를 찾아 죽이려 들겁니다.
누군가 음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군요.
'이 모든 것은 앤 셀린이 적은 대로 되리라.’
네,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거예요. 난 압니다. 내 가족들이니까요. 그들은 그렇게 행동할만한 인물들이에요.
하지만, 여기서 바꿀 수 있는게 하나 있습니다. 당신 덕분에 이 모든 것을 먼저 알게된 나 자신이지요.
이제야 질문을 드릴 수 있겠군요.
나는 원고 속 ‘아치 왕자’처럼 세실리아보다 먼저 그 애를 찾으려고 해야 합니까?
당신은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1314년 초록달 아홉 번 째 날로 가는 새벽에.
아치 앨버트 윌리암 렌다이크 윈저튼.
* * *
총명한 아치 왕자님께
베데르의 입막음을 하시고, 아직 아무에게도 공주와 기사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신 건 정말 잘한 일이세요.
선왕께서 그 아이를 찾으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갑자기 사라진 에드위나 공주를 그토록 그리워하신 분이니, 공주가 남겼다는 자식을 얼마나 보고 싶으실까요?
아델라이드 여왕께서 그 아이를 찾아 왕위를 물려 주고 싶어 하는 것도 이해가 되어요. 나라도 그렇게 해서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나였다는 죄책감을 씻고 싶을 거예요.
하지만 아치, 당신이 여왕님을 막아야해요.
선왕이나 아델라이드 여왕께서 그 아이에게 큰 의미를 두지 않게 해야 해요.
두 사람이 세실리아를 두고 공주의 아이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작당을 하게 둬선 안된다고요.
제 생각을 이야기해보라고요?
제가 세실리아였더라면 어땠을지를 말해보죠.
아치, 당신이 땡땡이치고 놀러다니는 동안, 세실리아는 열과 성을 다해 후계자 수업을 받았어요.
당신이 내팽개친 따분한 외교행사들에도 빠짐없이 참여했고요. 그토록 노력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빨간 머리 남자애한테 왕위를 물려주겠다니요? 이건 세실리아의 존재를 완벽하게 무시하는 결정이에요.
저라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애를 찾으라고 사람을 풀었을 거예요.
찾아서 죽인다.
그래요. 아마 제가 세실리아라면 그렇게 할거예요.
하지만 정말 그걸로 충분할까요?
난 앤 셀린 작가님이 주신 원고와 인물설정글을 수십번은 읽었어요. 만나본 적 한번 없으면서 이런 말을 하긴 뭣하지만 세상에 나만큼 세실리아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또 없을 거예요. 그녀는 악독하긴 하지만 절대 멍청하지는 않은 여자예요. 그리고 당신생각보다 당신을 훨씬 높이 평가하고 있기도 하지요.
아치, 당신이 잘생긴 얼굴을 무기로 귀족가의 여식들과 시시덕거리며 한량처럼 놀아대긴 하지만 사실은 꽤나 머리가 좋다는 것을 세실리아가 설마 모를까요?
배우다 그만뒀다는 그 제왕학, 한달 째가 되었을 때 당신이 세실리아보다 훨씬 잘 한다는 칭찬을 듣고는 바로 그만둔 거잖아요?
그렇게 좋은 머리를 써먹지 않고 놀고 있는 이유는 야심많은 누이와 대립하기 싫어서라는 것도 당연히 눈치챘겠죠.
노는 것을 좋아해서 귀족가의 무도회란 무도회마다 빠짐없이 참석해서 사교계의 총아가 된 주제에 왕궁에서 일어나는 커다란 행사는 또 보란 듯이 빠지는 이유를 그녀가 모를까요?
당신은 평생 세실리아에게 그런 메시지를 은근히 전달해왔어요.
[나는 누나의 적수가 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안심해.]
세실리아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당신에게는 언제나 다른 이들에게보다 훨씬 관대했지요. 하지만 아치, 그녀가 어디까지 냉혹해질 수 있는 사람인지 당신도 잘 알잖아요.
평화의 수호자, 아치 앨버트 왕자님.
솔직히 말해봐요. 당신은 늘 운이 좋았잖아요.
조금만 공부해도 세실리아보다 더 잘했고, 잘난 얼굴 때문에 모두가 당신을 좋아했죠. 그 덕분인가 세실리아는 애먹는 문제들도 당신 앞에서는 술술 풀렸고, 행운의 여신조차도 당신 곁에만 머물고 싶어하는 듯 보였어요. 결국 모두가 당신을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죠.
‘행운의 아치’
'운 좋은 아치’
세실리아는 이미 알고 있을 거예요. 사람은커녕 여우 한 마리가 죽는 꼴도 못 봐 넘겨서 여우 사냥철마다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아치 왕자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지를요.
‘머리 좋은 아치는 내 속셈을 단 번에 파악할 거야.
나약한 놈이니 그애가 죽는 꼴을 못봐넘기겠지.
아치가 그애를 나보다 먼저 찾아, 보호하려고 할거야.
언제나 그렇듯 운도 좋게 나보다 먼저 그 일을 해내고야 말테고.’
세실리아의 머릿 속에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겠죠.
제가 세실리아라면 공주의 아이를 찾아내려고 노력하지 않을 거예요. 어차피 그건 아치, 당신이 이기는 게임이니까요. 전 그냥 17세에서 20세쯤 되는 빨간 머리 남자애를 모두 죽여버릴 거예요.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 일에 방해가 된다면... 글쎄요, 세실리아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어쩌면 이건 그저 공주의 아들 뿐만이 아니라, 아치 당신의 목숨도 달려있는 일처럼 보이네요.
그러니까 당신이 내일 할 일이 정말 중요해요.
편지가 늦어져도 이번엔 참고 기다릴게요. 내가 시키는대로 해봐요.
결국 발견될 것이라면 당신이 먼저 이야기해야해요.
선왕과 여왕께 공주의 무덤을 찾았다고 말하세요.
하지만 그보다 전에 세실리아를 만나요.
공주와 기사가 살던 오두막을 찾았고 그들 사이에 자식이 하나 있는 것 같다는 걸 말해요.
세실리아라면 거기까지만 말해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단번에 예측할테죠.
그러니까 당신이 그녀를 설득해야해요.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후계자가 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설탕발림하세요.
당신이 그녀의 편에 서겠다고 거짓맹세 하세요.
그녀에게 굳이 빨간 머리 남자애들을 죽이면서까지 아득바득 왕위를 챙기려 노력하지 않아도 될 여건을 만들어주세요.
내가 아는 당신은 누구보다 쉽게 사람을 녹이는 사람이죠.
아치, 오직 당신만 윈저튼에 불 피바람을 막을 수 있어요.
6월 9일 새벽. 당신의 신실한 벗, 코델리아.
========== 작품 후기 ==========
키워드에 #사실은능력자남주 ...가 있는 것을 확인해주세요....네..
재밌게 읽고 계신다는 독자님들의 반응이 저의 비축분을 더욱 채워주었기에
오늘은 저녁에 한 편 더 들고왔습니다. 선추코는 언제나 제 안에 쌓여 비축분으로 변하네요.
그럼 한 시름 놓은 코델리아와 함께 좋은 밤 되세요.
<-- 당신 밤이 쓸쓸하지 않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