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영민한 코델리아 양께.
당신이 가진 인물 설정집이란 것이 점점 궁금해지는군요.
잠시 보여달라고 할까 생각했습니다만, 안보는 편이 지금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나가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지금까지 당신이 말씀하신 것들에 비추어보건데 그 설정집이란 것은 대체로 사실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혹시 거기서 저를 그저 ‘잘난’ 얼굴 정도로 묘사하고 있다면 그것은 설정집을 기록한 자의 미추에 대한 의식을 심히 의심해보아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참고로 세실리아 누님이 나에게만 관대한 것은 내가 그녀에게 열심히 기어서가 아니라 다 내 아름다운 얼굴 때문이랍니다.
연초록달의 아홉번째 날 저녁, 아치.
* * *
아름다운 아치 왕자님께.
아, 네.
6.9. 코델리아.
* * *
말 많던 코델리아에게
대답이 짧네요, 나의 친구 코델리아.
아치 앨버트 윌리엄 렌다이크 엘링턴 윈저튼
* * *
풀네임을 적으시면서 권위로 절 복종시키려 하시는 아치 왕자님께.
사실 앤 셀린 작가님은 인물의 외양을 묘사하는데 제법 인색한 편이십니다.그런 앤 셀린 작가님께서 자그마치 세 단락이나 할애하시면서 그 아름다움을 칭찬하신 왕자님의 외모에 대해서는 저도 여러가지 상상을 해본 터예요.
얼마전에 포토벨로에서 본 끝내주게 잘생겼던 점원을 보았을 때도, 아치 왕자도 저렇게 잘생겼을까? 하고 생각해보았었죠.
정말 그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자기 입으로 자기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예요. 그런 정도의 미남이라 생각하니, 이렇게 편지를 나누고 있는 것이 갑자기 황송해지네요.
추신:
그건 그렇고, 혹시나 왕자님이 못 물어보고 있을까봐 알려드리는데 저도 꽤 예뻐요. 진짜예요.
연초록달 9일. 코델리아.
* * *
틀림없이 아름다울 코델리아에게.
아, 네
-아치
추신: 이런 느낌으로 당신이 그렇게 대답한 거군요.
추신2: 당신은 나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아는데, 난 당신이 나보다 두살 어리다는 것, 책을 만드는 여자라는 것, 요정을 믿는다는 것, 아주 바쁘게 일하는 사람이며 매우 영민하고 통찰력 있다는 것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모릅니다. 조금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다음 편지엔 당신 이야기를 해봐요.
* * *
아치,
여자에게 ‘당신 이야기를 해봐요’ 라고 말할 줄 아는 걸 보면 당신은 내가 아는 바람둥이 아치 왕자님이 맞군요. 그건 아주 쉬운 스킬이지만 대개의 남자들이 잘 하지 못하는 일이죠.
당신이 본문보다도 더 긴 추신을 추가하는 사이에 여긴 밤이 되었어요. 초여름 밤의 공기는 어쩜 이렇게 달콤한지. 당장 누구와든 사랑에 빠져버릴 것 같은 바람이 부네요. 당신이 계신 곳도 밤인가요?
이런 날씨 말고도 저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면, 글쎄요. 따분한 이야기들 뿐일거예요. 전 흥미로운 것 없는 출판회사 새내기 편집자일 뿐이거든요.
기숙사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 후부턴 줄곧 혼자 살았고, 외로움을 많이 타긴 하지만 홀로 있는 걸 어려워하는 편은 아니에요. 혼자 집에 있을 때 심심하다고 느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심심하면 책을 읽으면 되니까요.
아빠는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얼굴도 본 적 없고, 엄마도 떠나신지 한참 되었죠. 친구들은 제법 있지만 언제나 그애들과 같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래서 제 쓸쓸함은 보통 이렇게 책이 달래준답니다. 책 읽는 것이나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사람과는 단 한마디도 나누고 싶어하지 않아서 회사 다니기가 아주 쉽지만은 않은 성격이네요. 당신처럼 좀 능글맞은 구석이 있으면 좋을텐데 말예요. (이건 칭찬입니다. 정말이에요.)
그런데 아치, 당신은 조금만 진지해지려고하면 바로 화제를 농담이나 남의 이야기로 돌리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아요. 이건 설정집에서 알아낸 것이 아니라 당신이 늘 칭찬해주시는 저의 통찰력으로 얻어낸 결론이랍니다. 어때요, 제가 틀렸나요?
전 사실 당신의 그 아무데나 농담을 우겨먹거나, 자신에게로 화제가 돌아오는 것을 싫어하는 버릇이 꽤 마음에 들지만, 오늘은 슬슬 진지한 이야기도 해볼 때 아닌가 싶습니다. 자, 이야기해보세요. 우리 아름다우신 왕자님께서는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인가요?
-초여름밤의 코델리아.
* * *
어쩐지 좀 가라앉아보이는 밤의 코델리아에게.
당신은 날 애처럼 다루는군요.
뭐 나쁘지는 않습니다. 전 언제나 연상의 여자들에게 끌렸으니까요.
어떻게 할지는 지금 진지하게 고민 중이에요.
......
사실 지금 바로 고민을 시작해봤고 1초만에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언제나 그렇듯 난 좀 번뜩이는데가 있으니 이대로 실행하면 아주 나쁜 결과가 나오진 않겠다 싶네요.
내가 하려는 것을 시도해보려면 당신의 원고가 다시 필요할 것 같은데 혹시 잠깐 빌려줄 수 있나요? 밤새 필사한 후 돌려줄게요.(이번엔 단번에 돌려줄테니 안심해요.)
추신: 이곳도 밤입니다. 초여름 밤의 공기를 당신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좋아요. 이곳과 그곳이 다른 날씨가 아니라 다행입니다.
추신2: 내가 왜 여우사냥을 도망다니겠어요? 저 역시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는 척 하는 데에 소질이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당신도 나와 동류라니 기쁘군요. 적어도 지금 편지를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닐테니까 말예요.
연초록달 아홉번 째 날, 당신에 대해 다섯 줄 더 알게 된 것이 기쁜 아치 앨버트.
* * *
연초록달의 아치.
(저 이 말이 정말 너무 좋아요. 6월은 너무 싱거운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암요, 지금은 연초록달이죠.)
무엇을 하시려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신의에 나도 신의로 보답해야죠. 필사까지 할 필요없어요. 내가 사는 곳엔 이 원고와 똑같은 물건을 10분 안에 뚝딱 만들어내는 아주 커다랗고 멋없는 회색 마법의 상자가 있거든요. 잠시 나갔다올게요. 10분 안에 돌아와 원고를 드릴테니, 기다리고 있어요.
추신: 제가 신이 나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 제가 억지로 편지를 하고 있을 거라는 억측을 거두실텐데! 솔직히 말해서 요즘은 매일같이 이 상자만 들여보느라 넋이 빠져서 살아요. 당신에게도 나에게처럼 우리가 편지를 나누는 일이 조금은 의미있는 일이었으면 좋겠어요.
유월, 아니 연초록달의 9일 밤, 코델리아.
* * *
나의 충실한 벗, 코델리아에게.
정말 급하게 주려는 것인지 오늘따라 하늘로 날아갈 듯 휘청이는 당신 글씨가 마음에 들어요.
원고는 어머니께 보여드려고해요.
에드위나 공주가 기사와 숲에서 얼마나 행복하게 지냈는지를 본다면 어머님의 죄책감도 덜해질 것 같거든요. 말로 전해도 되겠지만 당신도 알잖아요. 내가 진지한 얘기를 하려들면 10초 마다 한번씩 농담을 하는 버릇이 있다는걸요. 이 버릇은 특히 가족들 앞에서 잘 발현되네요. 여왕폐하를 설득시키기엔 적절치 않은 말버릇이죠.
여전히 연초록달에 살고있는 아치 앨버트.
추신: 상자 앞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게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 내겐 꽤 큰 기쁨이 되는군요.
* * *
06-09-SUN-PM9:00
보내는이: 가렛 〈[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 〈[email protected]〉
원고 찾았어?
대영 박물관 전시 보러 왔다가 너희 집 근처 펍에 있는데 나올래?
* * *
06-09-SUN-PM9:10
보내는이: 코델리아 〈[email protected]〉
받는이: 가렛 〈[email protected]〉
응.
그리고 아니.
* * *
06-09-SUN-PM9:11
보내는이: 가렛 〈[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 〈[email protected]〉
답장을 그렇게 하는 버릇은 언제 생긴거야? 한 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하느라 그런건가? 놀랐어? 사실 지금 너 보고 있어. 횡단보도에 원고랑 종이뭉치를 잔뜩 들고 서 있네.
주말인데 남자친구도 없이 이 시간까지 복사나 하러 다니다니 딱하군. 그러지말고 펍으로 와. 맥주나 한잔 하고 러셀스퀘어에서 산책하자.
-매일 회사에서 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말에 따로 너와 즐기는 식사도 싫지 않다고 말하고 싶어서 메일 한 가렛.
* * *
06-09-SUN-PM9:20
보내는 이: 코델리아 〈[email protected]〉
받는 이: 가렛 [email protected]〉
그런 느끼한 말은 네 여자친구한테나 해둬.
나 바빠.
* * *
06-09-SUN-PM9:21
보내는이: 가렛 〈[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지금 입은 옷이 허름하거나 화장을 안해서 부끄러운 거면 집에 들어갔다 나와도 돼. 러셀스퀘어에 전에 갔던 그 카페알지? 거기서 두 시간쯤 있을게.
추신: 여자친구 없음.
* * *
친애하는 아치 왕자님께.
오래 기다리셨죠?
원고를 가져왔어요. 내친김에 제본까지 하느라 좀 늦었어요.
아델라이드 여왕님께 보여드리기 위한 것이라면, 팔랑거리는 종이에 있는 것보다 그럴듯한 표지라도 있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봤자 노란 종이 한장을 더 덧붙인 것이 다지만 그래도 제법 그럴듯 하죠?
당신 계책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되길 바라요, 행운의 왕자님.
연초록달의 아름다운 밤에, 코델리아.
* * *
마법사 코델리아에게.
당신의 회색 상자가 이런 것을 해낼 수 있다니 인상적이네요.
원고 고맙습니다. 잘 보여드린 후 다시 편지할게요.
잘자요, 코델리아.
사랑을 담아, 아치 앨버트.
* * *
좋은 꿈 꾸세요. 왕자님.
* * *
당신도요, 코델리아
추신: 자러 간다면서도 왜 상자를 안 닫고 계속 보고 있죠?
* * *
아치,
당신이 계속 보내니까 저도 자꾸 기웃거리게 되잖아요.
그러는 당신은 잘자요, 라고 해 놓고 왜 계속 상자를 보시는 데요?
* * *
당신이 빈 상자를 보고 서운해할까봐서요, 코델리아.
그러니까 이 편지를 끝으로 오늘은 이만 자요, 코델리아. 꿈이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기를.
당신의 벗, 아치.
* * *
퍽도 다정하신 아치 왕자님께.
제가 빈 상자를 보고 서운해할까 봐서라니, 그토록 자의식 높고 오만하면서도 다정한 말도 없을 거예요. 부정할 수 없는 말이기도 하고요. 상자가 비어있다면... ...조금 쓸쓸하긴 할거예요. 상자를 열었을 때, 당신이 보낸 얇은 종이가 비죽 튀어나와있는 걸 볼때마다 제 마음은 부풀어 오른답니다.
아치, 당신이 이 밤을 이렇게 함께 있어 주셔서 좋아요.
같이 있지 않아도 우리는 비슷하게 선선한 연초록달의 바람을 맞고 있겠죠?
지금쯤 그만 수다를 떨고 자라고 투덜거리고 계시겠지만, 안심하세요. 잠은 자지 않아도 전 벌써 아까부터 침대에 누워있었거든요. 앞서 말씀 드렸듯이 침대 바로 옆에 책상이 놓여있고 거기에 바로 상자가 있어서 팔만 뻗으면 된답니다. 이제 정말 잘 자요.
2019.6.9. 밤, 더이상 답장을 쓰면 안되는 코델리아가.
* * *
좋은 밤 되길, 코델리아.
-연초록달 아홉번째 날 깊은 밤, 나의 벗이 쓸쓸해할 일 없도록 주의할 예정인 아치.
==========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이번편은 아침보다 새벽에 올리는 것이 어울리는 것 같아 얼른 두고 자러 갑니다.
제가 관심을 갈구하는 성격이라 그런 것인지 독자님들이 저보다 훨씬 글을 잘 쓰셔서 그런것인지 댓글 하나하나가 너무 재밌어요.
그러니까 댓글도 연참해주시면 저도 연참... 네.. 죄송합니다.
추신: 조용히 누르시는 선작과 추천도 댓글만큼 감사합니다.
-초열달의 쓸쓸한 새벽, 조용한 관종 올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