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틀림없이 보폭이 매우 클 코델리아 그레이 양에게
이젠 자고 있겠지요? 상자가 툭 하고 편지 도착하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의 지난번 편지는 내가 처음 당신 편지를 받았을 때의 경악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해주었지요.
책상이 침대 바로 옆에 있고 방 하나가 큰 걸음으로 세 발자국밖에 안된다고요? 당신 사는 곳은 참으로 이상하군요. 끝내주게 멋진 책을 10분 안에 만들어주는 회색 마법상자도 있으면서 당신 같이 훌륭한 여성에게 그런 집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뇨. 그 나라의 왕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나는 당신의 왕자가 아니지만 그래도 왕족이 된 도리로 당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방 근처를 기웃거리다 이것을 찾았고, 서책보관함 안에 넣어보니 마치 이런 일을 위해 이 크기로 만들어진 듯 딱 맞게 들어가더군요.
이 책은 내가 갓 스물이 되었을 무렵, 어떻게든 나의 결혼을 일찍 성사시키려했던 여왕폐하를 피해서 수도원 필경소에 숨어있던 시절에 만들게 된 책입니다.
윈저튼 왕국에 전해져내려오는 옛 이야기들을 모아 낸 책이니 제가 집필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세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책으로 엮은 자로의 자부심은 조금 부리고 싶군요.
야망 없는 아치 왕자가 여우사냥을 마다하며 할 법한 일이라며 비웃고 계실까요? 제가 수도원에 틀어박혀 채식사들과 어울리는 것을 알고 대단한 시도서라도 만들어 올 것을 기대하셨던 어머님은 실제로 매우 실망하셨답니다. 이 책을 반기는 독자라 해봤자 자기가 염소라도 되는 듯 종이 씹어먹기를 즐기는 나의 말, 셜록 뿐이겠죠.
하지만 전 이 책을 만들어낸 것에 약간의 뿌듯함을 느낍니다. 기도문이나 따분한 종교적 지침서가 아니라 이야기만을 가지고 이렇게 화려한 책을 만드는 사치를 부렸다는 것이 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이지요.
이 책은 꽤 많은 이들의 공이 들어갔답니다. 아를리궁의 최고가는 금세공사가 기사와 공주의 모습을 돋을 새김으로 넣어주었으며 윈저튼 왕가를 상징하는 푸른색과 초록색의 보석이 그 위에 장식되었습니다.
필사는 레테 수도원 필사실의 제일 가는 필경사 베데르가 해주었고, 장 마다 들어있는 채식에 쓰인 녹색은 산화동이 아니라 야생 자두에서 얻은 색이라 산뜻하며, 푸른색 역시 청금석을 녹여 만들었기에 탁함 없이 완벽하지요.
첫 책이니 만큼 내용이야 당신의 비웃음을 사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겠지만, 그래도 만듦새 하나만큼은 어딜가도 지지 않는다 자부합니다.
당신이 회색상자에서 만들어온 책처럼 가볍고 실용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당신의 필담 친구 아치가 주는 사소한 보답이라 생각하고 받아주십시오.
당신 세계의 까다로운 미적 기준에 걸맞지 않는다면 금을 녹여 팔아버리거나 다시 만드셔도 됩니다. 여기 들어간 금이나, 여기저기 박힌 보석들을 팔아넘기면 작은 집 하나는 지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안의 내용은 당신을 생각하는 나의 마음이 담겨있으니, 간직해주겠죠? 당신의 조금 더 커진 방 안에 말입니다.
연초록 달 열 번째 날 새벽에.
-생각없이 사는 것은 맞지만 백성을 가끔 생각하긴 하는 아치
* * *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하해 같으신 아치 왕자님께.
왕자님은 책을 만드는 분이셨어요!
꿈에도 몰랐네요. 앤 셀린 작가님은 대체 왜 대단한 이야기를 생략하신 걸까요? 이건 정말 화려하고 멋진 책인걸요.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은 없어요. 원래부터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마법 상자가 물건이나 편지 뿐만 아니라 우리 사이에 놓여있는 긴 시간까지 함께 배달해주는 것인지 손 대면 부스러질 것 같이 낡아있지만 세월의 흔적이 책의 아름다움에 덧칠을 해준 느낌마저 들어요.
차마 휙휙 넘기진 못하고 살금 살금 첫 장을 읽어보았는데요. 왠 걸, 첫 장에 적혀 있는 이야기 둘은 얼마전에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한 애니메이션의 내용과 꼭 같은 거 있죠?
혹시 그 영화를 만든 사람도 저처럼 마법의 상자를 가지고 있어 윈저튼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걸까요? 아니면 모든 세상에서, 전해 내려오는 신화나 설화란 다 비슷비슷한걸까요?
아치, 당신이 이렇게나 멋진 책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니, 미처 몰랐어요. 글재주가 좋은 것이야 눈치채고 있었지만요.
글재주 뿐만 아니라 당신, 상상력도 좋은 것 같아요. 우리의 작은 마법상자(이렇게 불러도 되는 거겠죠?)가 물물교환의 장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전 생각도 하지 못했거든요. 이제 와서야 상자의 크기가 아쉬워집니다. 조금만 더 컸더라면, 내가 그 세계에 들어가 당신을 직접 만날 수도 있었을텐데 말예요.
오늘 아침 회의 때는 원고보다도 이것으로 편집장 메리앤의 시선을 끌었어요. 옆자리에 앉은 가렛이 어디서 그런 조잡한 가짜를 가지고 왔냐고 콧방귀를 끼었지만 메리앤의 눈빛은 바로 변했습니다. 원래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분은 아닌데, 바로 어디서 이런 것을 발견했냐고 무섭게 캐물으시더군요.
저는 포토벨로 골동품 점에서 헐값에 산 물건이라고 거짓말을 쳤어요. 왕자님이 주신 물건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메리앤은 이런 물건을 포토벨로에서 구했을리가 없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어찌되었든 당장 소더비에 들고 가자고 하더군요. 소더비는 그러니까.. 음.. 오래되고 값비싼 물건을 감정하고 경매해주는 곳이에요.
소더비에서는 이걸 보고 어떤 왕조의 물건이라 결론 내릴까요? 그곳의 전문가들이 감히 이 책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을까요?
콧대 높은 감정사들이 이 책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일 것을 생각하니 왠지 짜릿합니다.
왕자님, 하지만 전 이 책을 팔아버려 집을 사거나, 당신이 허락하신대로 녹이거나(절대 안 될 일이에요. 너무 아름다운 걸요.) 하진 않을 거랍니다. 그저 나의 필담친구가 주는 호화로운 선물로 여기며 제 작은 방 한켠에 간직해둘 거예요.
메리앤이 자꾸 이상한 말들을 중얼거리면서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는 걸 보면 어느날 갑자기 소더비의 악인들(은 제가 지어낸 이미지에요. 전 사실 이 사람들을 실제로 본 적도 없거든요.) 이 제 방 앞에 나타나 이 책을 훔쳐갈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요.
추신:
애거서 크리스티가 말하길, 세상에 책 추천하려는 사람 말릴 길 없다고 하죠. 저도 악명높은 책 추천자 중에 한 명이에요. 왕자님께서 친히 직접 만드신 책을 추천하여 보내주셨으니 저 역시 왕자님께 작은 선물을 드리고 싶네요. 추리고 추려서 세 권을 골라드려요.
하나는 당신의 충성스러운 말, 셜록과 이름이 같은 탐정이 나오는 추리 소설이고, 나머지 하나는 셰익스피어란 재능많은 이가 쓴 희곡, 〈맥베스〉예요.
그리고 마지막 것은... 당신의 밤을 그대로 앗아갈만한 끔찍한 사랑이야기랍니다.
이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왕자님의 취향에 맞으면 좋겠네요.
6.10. 밤. 코델리아.
* * *
06-10-MON-PM7:30
보내는이: 가렛 〈[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 〈[email protected]〉
어제는 원고를 찾는 탓에 바빴다고 하지만 오늘은 밤 산책마저 놓치진 않겠지? 러셀 스퀘어를 다 돌고 지금은 홀본의 헌책방이야. 추천해줄 책 있으면 한 권만 말해봐.
* * *
06-10-MON-PM7:45
보내는 이: 코델리아 〈[email protected]〉
받는 이:가렛 〈[email protected]〉
책은 네가 더 잘 알잖아.
난 책 추천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리고 업무시간 외는 메일 좀 자제요.
* * *
사랑하는 나의 친구 코델리아.
첫인사가 너무 격했나요? 그럼 이렇게 부르지요.
친애하는 나의 미치광이 책 추천자, 코델리아.
나에게 별의별 복잡한 과제를 다 시켜서 내일을 두렵게 만들었으면서 이런 책까지 주다니요. 지금 막 〈폭풍의 언덕〉의 앞부분을 읽은 참이에요.
코델리아, 아시나요? 읽던 책이 너무 재밌어서 더는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잠시 덮어 둔 채 아으으, 하고 신음 비슷한 것을 흘리며 방을 빙글 빙글 돌게되는 순간들을요. 어린시절, 발레아에서 온 드래곤 신화 책을 본 이후론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랑이야기가 있나요?
죽어버린 캐시의 유령이라도 보기 위해서 창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제발 다시 한번만 유령으로 와달라며 절규하는 히스클리프의 모습을 본 다음부터 제 가슴은 내내 빠르게 뛰고 있습니다.
이런 책을 내게 전해준 코델리아, 당신께 백만번의 키스를 보내드립니다. 이건 정말 미친 책이에요.
그런데, 제일 좋아하는 책이라고 꼽는 것이 이렇게 광폭한 사랑이야기라니, 코델리아, 당신이란 여자가 정말 궁금해지는군요. 어쩌면 당신도 이런 사랑을 해보았나요?
밤이 쓸쓸하지 않게 매일 편지를 보내달라는 요망한 요청으로 저를 꼬드길때 알아보았어야했는데! 당신은 어쩌면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능숙한 사랑의 귀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 연애, 그리고 책 추천의 천재, 나의 벗.
당신이 벌인 이 악독한 짓 덕분에 여왕께 나가 설득하는 일은 내일이 아니라, 그 다음날로 미뤄질 것 같아요. 오늘 밤새 이 책을 읽어야할 판이니까요.
그러니 내 잠을 빼앗은 사악한 그대, 코델리아. 당신은 나 대신 오늘 밤도 평안히 잠들길 바랍니다. 창문은 단단히 붙들어메고요.
연초록달 열번째 날 밤. 아치.
* * *
책 추천자를 더 없이 기쁘게 하는 아치 왕자님께.
아마 제 편지를 읽을 새도 없이 열심히 폭풍의 언덕을 읽고 있겠죠? 당신이 히스클리프의 미친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기쁩니다.
그리고 저도 히스클리프와 캐시같은 사랑을 해보았냐는 질문엔 안타깝게도 드릴 말씀이 없네요. 저의 연애점수는 처참할 정도로 스코어가 좋지 않거든요.
짝사랑은 몇 번 해보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람들이 절 좋아하기 시작하면 저는 바로 그 사람을 싫어하게되더군요.
언젠가 주어들은 말인데 '나를 가입시켜주는 클럽에는 들어갈 생각이 없다' 라는 격언이 있대요. 아마 그런건가봐요. 나 따위를 좋아하는 남자를 사랑하고 싶지는 않은,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제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왕자님같은 분은 전혀 공감하지 못할 이야기겠지요?
오늘 읽은 어떤 소설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책을 금지하는 나라가 나오더군요.
그 나라에 사는 두 청년은 몰래 몰래 책을 빼돌려 읽지요. 어느 날, 두 친구는 욕망과 열정과 충동과 사랑에 눈을 뜨게 할 만한 격정적인 책을 읽고 몹시 흥분하는데...
둘 중 하나가 그 책을 먼저 읽고 감정이 너무 격해진 나머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달려나가요. 연인은 나무 아래에서 새하얀 손수건에 붉게 적시며 첫 경험을 하죠.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밤새도록 열정을 불태워요!
그러는 사이에 나머지 한 친구는 밤새워 그 책을 읽고는 광기에 휩쌓여 그 책을 필사하기로 결심하지요. 하지만 책도 금지된 그곳엔 종이조차 마땅치 않고, 결국 그 친구는 엄동설한에 양털 점퍼를 벗어 늙은 산양가죽에 만년필로 깨알같이 글씨를 옮겨적는답니다. 이 역시 밤새도록 진행되지요.
아마 전 후자인 것 같아요. 흥분하면 섹스를 하러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책을 필사하는 부류인거죠.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람둥이 왕자님께서는 전자시겠죠? 부러울 따름이에요.
그럼, 책보다 더 중요한 일을 다 끝낸 후 다시 소식 들려주세요.
2019. 6.10. 새벽.
'사악한 그대’라는 칭호에 매우 만족하고 있는 악랄하며 조용한 책추천자 코델리아.
* * *
불경스러운 나의 벗 코델리아.
당신 편지는 이 밤에 읽기엔 몹시도 자극적이며 매우 재밌군요. 어쩌면 〈폭풍의 언덕〉보다 더요.
책을 읽고 흥분한 나머지 섹스하러 달려가는 친구라...
나 역시 그 쪽보단 열심히 필사하는 쪽임을 결혼을 마다하고 수도원에 틀어박혀 필경소에 들락날락 거린다는 소리를 듣고 눈치챘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어쨌든 당신이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우쭐해집니다.
잘자요, 조용하고 차분한 척 하지만 머릿 속엔 음란한 상상으로 가득한 나의 벗.
추신: 짝사랑하던 남자들이 싫어졌던 건 그냥, 그들을 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닌가요? 어쨌든 난 그들에게 점수를 좀 주고 싶군요. 당신을 알아보고 좋아할 정도면 꽤 괜찮은 치들이겠죠.
사랑을 담아 아치 앨버트.
========== 작품 후기 ==========
설렌단 댓글로 저를 설레게 하시는 독자님들께.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 감사합니다!
내일은 다시 세실리아가 등장하니 기대해주세요.
추신:
아치가 코델리아에게 선물한 책의 모티프가 된 것은 중세에 만들어진 〈코덱스 아우레우스〉라는 책으로 공지사항에 이미지를 올려두었으니, 궁금하신 독자님들은 확인해주세요!
<-- 레이디 맥베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