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8화 (8/56)

#8.

안녕, 아치.

살아있어요?

6.11. 쓸쓸한 코델리아

* * *

안녕, 코델리아.

살아있지요. 당신도 살아있는것처럼 보이는군요.

연초록달 열한번째 날 밤. 아치.

* * *

이봐요 아치 왕자님,

딴청 피우지 말고 빨리 말해봐요.

우리가 의논한 대로 잘 되어가고 있는거예요?

6.11.슬슬 걱정되기 시작하는 코델리아가.

추신: 내일이 바로 앤 셀린 작가님께 원고를 받는 날이에요. 기대되지 않나요? 그러고보니 폭풍의 언덕은 끝까지 다 읽으셨나요? 소감이 어때요? 셜록홈즈와 맥베스는요? 그중 무엇이 제일 당신의 취향에 맞았나요?

* * *

여전히 참을성이 없는 나의 벗 코델리아 그레이 양께.

당신을 따라 나도 수많은 물음표들을 돌려드리죠.

그러고보니 지난번에 돌려드린 그 원고는 잘 다듬고 있습니까?

당신을 괴롭히던 그 편집장 메리앤 이란 여자는 안녕합니까? (내 기억력이 꽤 쓸모있지요?)

소더비로 가져간 나의 화려한 실망 덩어리 금색 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 어서 근황을 들려줘요. 당신의 그 기나긴 수다를 읽는 것은 언제나 나의 기쁨이니까. 최대한 길게 써주십시오. 시간을 들여서 차근차근이요.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또 냉큼 짧은 서신을 상자가 넘칠 때까지 넣어대며 날 교란시킬테죠,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 코코. 그럼 당신이 쓸쓸해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난, 당신의 재기넘치는 서신들에 답해야만 하고요.

벗이여, 그 의무는 기꺼이 질 수 있는 나의 기쁨입니다. 하지만 오늘 내겐 당신에게 반드시 고해야할 장황한 이야기가 있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잠자코 기다려달라는 거예요. 말썽꾼 아가씨.

연초록달의 열한번째 날, 팔 아프게 쓸 내용이 많은 아치.

* * *

아치에게

(내용없음)

6.11. 저녁. 잠자코 다음 편지를 기다리는 참을성 많은 당신의 코코.

추신: 당신이 던진 수많은 물음표를 충족시키려면 뭐부터 답변해야할지 궁리중이랍니다.

* * *

06-11-TUE-PM9:00

보내는 이: 가렛〈[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오랜만에 찾아온 쉬는 수요일에도 원고를 받으러 가야하는 레이디 코델리아 그레이.

포토벨로엔 몇시에 갈거야?

나도 같이 가는 건 어때?

번번이 신입 편집자인 너를 작가도 아닌 남자와 독대하게 만드는 게 영 걱정되어서 말야.

* * *

06-11-TUE-PM9:10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가렛〈[email protected]〉

와, 물음표에 숨막힐 뻔.

회사에서 물어봐도 될 일을.

암튼 아냐, 됐어. 내 일이니까 나 혼자 가면 돼.

* * *

06-11-TUE-PM9:12

보내는 이: 가렛〈[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괜찮아, 코델리아.

신입 편집자는 좀 도와달라고 해도 되는거야.

어차피 쉬는 날이니 데이트 느낌도 낼 겸 점심 때 출발하는 건 어때?

포토벨로까지 간 김에 같이 저녁도 먹고 들어가면 좋겠지.

* * *

06-11-TUE-PM9:25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가렛〈[email protected]〉

됐다고, 가렛.

그리고 너도 신입 편집자야.

* * *

06-11-TUE-PM9:26

보내는 이: 가렛〈[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너보단 두 달이나 경력이 많지.

* * *

06-11-TUE-PM9:40

보내는 이: 가렛〈[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코델리아? 벌써 자?

* * *

06-11-TUE-PM10:00

보내는 이: 가렛〈[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자나 보군. 그럼 내일 봐.

* * *

[발송 실패 안내] [email protected] 메일이 전송되지 못하였습니다.

보내는 이:블룸즈벨웹마스터 〈[email protected]〉

받는 이: 가렛〈[email protected]〉

고객님께서 보내신 메일이 전송되지 못했습니다.

아래 실패 사유와 해결 방법을 참고 부탁 드립니다.

보낸시간 : 06-11 PM 10:00

실패사유 : 받는 사람의 메일 주소가 존재하지 않거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휴면 상태입니다.

해결방법 : 받는 사람의 메일 주소가 정확한지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주소가 맞는지 다시 확인하고 발송해 보세요.

* * *

아치 왕자님께

그거 아세요?

오늘 왕자님께서 저한테 일어난 일을 설명해주신다면, 전 내일 받을 원고의 내용을 미리 아는 셈이 된다는 거요. 하지만 소설이란 때때로 한 편 안에 10년의 일을 다 넣어두는 경우도 있으니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죠.

추신: 이 편지에 대한 답장은 되었으니 얼른 쓰던 것을 쓰세요! 빨리 왕자님의 기나긴 편지를 받고 싶어요.

추신2: 전 지금 모종의 이유로 좀 불쾌한 기분이 되었어요. 얼른 왕자님의 편지로 이 기분을 씻어내고 싶네요.

6.11 밤. 캐시의 유령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히스클리프의 심정인 코델리아.

* * *

나의 기특한 책 추천자, 코델리아

우리가 마지막 편지를 주고받았던 그날 밤, 밤새워 폭풍의 언덕을 읽고는 벅찬 마음을 가누지 못해 새 책 〈맥베스〉까지 시작해버린 난 새빨간 눈을 한 채 아침이 다 되어서야 잠에 들었답니다.

그 말은 한심하게도 내가 아침 나절을 할애하여 나의 누이를 찾아가겠다는 계획을 지키지 못했다는 소리죠. 지금 이 글을 읽고 혀를 차고 있다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 이건 전적으로 코델리아 당신 탓이니까요.

사실 난 당신이 내게 헛으로 그런 책을 추천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이걸 다 읽고나서야 내가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그 생각은 아주 틀리지만은 않았어요.

신기하게도, 내가 세실을 찾아가지 않자, 세실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해가 아를리 궁의 정 가운데에 떠 있을 때쯤이었죠. 아직도 비몽사몽인 채로 있던 내 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세실이 소리쳤어요.

“무슨 작당 중인거야?”

코델리아, 당신도 알고 있는 것처럼 세실은 엄청나게 똑똑한데다 눈치도 어마어마하게 빠른 여자지요. 사교계 행사를 피하겠다고 수도원으로 내뺀 내가 한달 내내 필경소에 틀어박혀 있는 대신 예정보다 훨씬 빨리 왕궁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칠 여자는 아니란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움직임이 빠른 것 아닌가 하고 저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세실의 표정을 살폈어요. 세실은 그런 저를 보고 한숨을 쉬며 물었습니다.

“수도원은 왜 막아놓은 거야?”

“수도원?”

“그래, 대체 거기에 무슨 보물을 숨기고 있는건데?”

“수도원에 사람을 보냈군.”

“안 보내게 생겼어?”

어리석은 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전 그냥 빨리 돌아온 수준이 아니라 밤 늦게 허겁지겁 왕궁으로 돌아왔어요. 당신에게 상황을 묻기 위함이었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세실의 눈에는 퍽도 이상하게만 느껴졌을 거예요.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나의 누이는 바로 수도원으로 사람을 보냈겠지요. 그런데 수도원의 빗장은 굳게 잠겨 있던겁니다. 네, 저와 함께 공주의 오두막을 목격한 베데르가 약속대로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모자라 수도원의 출입까지 완전히 막아버린거죠. 이런 충성스럽고 도움이 안되는 늙은이가 다 있나. 저로선 통탄할 노릇이었죠.

제 아무리 왕국의 공주이자 후계 1순위인 세실이라 해도 수도원을 쳐들어갈 수는 없었겠죠. 그렇다고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 지도 모르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래서 세실은 바로 제게 온 거예요.

거기까지 파악하니 여기서 공주의 오두막을 발견했다는 것을 바로 말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숨기다가 추궁당해 들키듯 고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도권을 잡고 고백하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여전히, 수도원이 왜 닫혔는지에 대해서는 대답해야했죠.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던 그때, 제 눈에 띈 것은 바로 코델리아, 당신이 보내준 책들이었습니다.

“책!”

제가 그렇게 소리쳤어요.

“책?”

세실리아가 되물었죠.

“그래, 책이야! 책!”

“뭐라는거야.”

세실리아가 다시 한심하다는 듯이 저를 보았습니다. 그래도 일단 주의를 다른 쪽으로 돌리는 데엔 성공한 저는 얼른 말을 덧붙였어요.

“책을 가져왔어. 수도원에서 책을 가져왔다고.”

“잠이 덜 깬거야? 자세히 좀 말해봐.”

“베데르가 구해온 책이야. 완전히 새로운 거지.”

“뭐 저렇게 생겼어?”

그런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어요. 당신이 준 책들은 하나같이 너무 작고, 가벼웠으며, 장식 하나 없이 초라한데다 대체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매끈하기도 했으니까요.

나는 얼른 책 세 권을 집어들어 미덥잖은 눈 한 세실에게 들이밀었어요.

〈셜록 홈즈와 주홍색 연구〉

〈맥베스〉

〈폭풍의 언덕〉

“필경소에서 만든 것이 아니야. 베데르 말로는 누군가가 수도원에다 두고 갔대.”

“대체 누가?”

“그건 알 수 없어. 다른 왕국에서 온 이일지도 모른다고 베데르가 그랬어. 어쨌든 이게 다가 아니야.”

“몇 권이나 더 있는데?”

“열 권은 족히 넘어.”

내 입에서 거짓말이 술술도 흘러나왔습니다. 세실은 흠칫 놀라며 이렇게 물었어요.

“그렇게나 많아?”

“그래, 이 책들 좀 봐. 이런 것들이 열댓권이 넘는다니까?”

“몹시도 초라하군. 아마도 야만인들이 사는 알다르 같은 곳에서나 가져온 모양이지.”

알다르!

그곳은 윈저튼 북쪽의 척박한 땅입니다.

지금은 야만인들이 산다고 하지만 100여년 전만해도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제국을 이루었던, 윈저튼보다도 훨씬 긴 역사를 가진 곳이죠. 그래요, 그런 곳이라면 이런 책들이 열댓 권 넘게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습니다.

저는 얼른 세실이 꺼낸 그 이야기를 받아 삼켰죠.

“그래, 알다르. 그럴거야, 아마. 알다르는 역사가 깊잖아. 말이 되네! 이것봐, 모양새는 이렇다해도 내용은 무척 휼륭해.”

“이 책들을 필경소에서 베껴서 다시 내 볼 참이로군?”

기특한 세실, 계속해서 저 대신 핑계거리를 만들어주더군요.

“베끼고 꾸며야지. 채식사들도 같이 작업에 동원되었어.”

“그래서 수도원의 문을 닫은거야?”

“그래, 세실. 내가 권했어. 잠시 닫아두라고. 그리고 거기 계속 있는 대신 이 책들을 가지고 왔지. 누이에게도 보여주기 위해서야.”

그땐 어쩜 그렇게 거짓말이 술술 나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실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말고 슬쩍 눈길을 책 쪽으로 돌렸더군요.

“다 해서 세 권이로군.”

“가져가서 읽어볼테야?”

“넌 읽어봤어?”

“대충은.”

“재밌어?”

“놀랍도록.”

전 세실에게 책 세 권을 모두 내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권 골라봐.”

내심 세실이 〈폭풍의 언덕〉을 가져가길 바랬어요. 그 책은 사람의 정신을 홀랑 빼놓는데가 있으니까요. 셜록 홈즈 역시 나쁜 선택은 아니었어요.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내릴 만한 수작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세실이 골라잡은 건 〈맥베스〉였습니다. 아름답지만 슬프지만 잔인하고 피가 아주 많이 나오는 이야기였지요. 세실리아 다운 선택이라고 빈정대고 싶은 걸 꼭 참고 저는 책을 내밀었습니다.

그렇게 세실과의 독대가 끝났어요. 난 얼른 셜록을 타고 가 베데르에게 사정을 털어놓고 왔지요. 이것으로 며칠은 한숨 돌렸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쉽게 흐르지만은 않더군요.

다음날 새벽 무렵, 연무장에 있던 내게 세실은 다시 찾아왔어요. 그리고 맥베스를 집어던졌죠. 얼른 주워 흙을 터는 내게 세실이 소리쳤어요.

“대체 이 책을 왜 내게 보여준거야? 그래서 사람 죽일 용기도 없으면 왕이 될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

거기서 그만 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세실의 눈꼬리가 무섭게 올라가는 걸 보아도 웃음은 끊이질 않았죠. 〈맥베스〉를 읽고 그런 식으로 해석하여 주인공에게 이입하는 사람은 정말이지 세실 하나밖에 없을 거예요.

“왜 웃는데?”

그렇게 묻는 나의 누이 세실리아는 처음으로 조금 귀여워보이기 까지 하더군요. 그래서 전 웃음으로 그녀의 노여움을 사는 것을 그만두고 이렇게 대답했죠.

“일단 내가 보여준 게 아니라 누이가 골라갔어.”

세실은 다시 검을 뽑는 시늉을 했습니다. 얼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더라면 전 목이 덜렁덜렁한 상태로 이 편지를 썼어야했을 거예요.

“그리고 누이는 맥베스가 아니라 레이디 맥베스야.”

“뭐라고?”

“왕이 될 배짱도 없으면서 사람을 죽이고 혼령에 벌벌 떠는 놈이 아니라고. 누나는 레이디 맥베스야. 제 남편한테 더 담대하게 나아가 다 죽여버리고 왕이 되라고 속삭이는 뱀이지.”

세실이 가만히 나를 노려보았어요.

밤의 연무장은 고요했습니다. 세실은 여느때처럼 성장을 모두 하고 칼도 가지고 있었죠. 전 연무장에 막 들어와 갑옷도 입지 않은 채 튜닉 하나 걸치고 있었고요. 여기서 세실이 칼을 휘두른다면…….

그때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어요.

“그래, 레이디 맥베스. 말 되네.”

잠시 후, 웃음이 멎어 들었습니다. 연무장이 다시 저녁의 적막함이 찾아왔을 때야 저는 그래, 이 말을 하려면 이때가 가장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세실, 공주와 기사가 살던 집을 찾았어.”

잠시만요. 누군가 문을 두드리네요. 곧 다음 편지를 쓸게요. 코델리아.

-조금 늦게 일어난 것을 제외하곤 당신의 조종대로 움직이는 말 잘 듣는 남자, 아치가.

* * *

세상에, 아치 왕자님.

쓰던 편지를 던져버리고 다시 써서 보냅니다.

제 조종대로 움직이는 말 잘 듣는 남자가 되시려거든 얼른 뒷이야기를 해주세요. 그래서 다음은요? 어떻게 되었는데요?

엄청 쓸쓸해진 코델리아가.

* * *

쓸쓸한 척 하는 것도 귀여운 코델리아,

당신의 충실한 벗, 아치 앨버트는 당신이 명하신 대로 행하러 지금 여왕께 나아가요. 다녀와서 다시 편지할게요.

추신: 어차피 내일이면 앤 셀린 작가에게 원고를 받아볼텐데, 정말로 내 편지가 필요한가요?

* * *

아치,

필요해요. 엄청요.

당신이 해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원고를 읽는 것보다 훨씬 재밌는걸요.

일이 어떻게 흘러가 지금 여왕님을 만나러 가는지 모르겠지만, 잘되길 바랄게요.

추신: 당신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는데 어쩌죠? 저 세실리아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어요. 레이디 맥베스같은 여자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조금 호감이 생겨요. 세상엔 그런 여자도 있어야죠. 망설임 없이 악의 길로 마구 나아가는 여자요. 빨간머리 애들이 다 죽는 건 안될 일이지만요.

==========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전 세실을 아주 좋아해요.

독자님들도 좋아해주셨으면 좋겠고, 싫어하셔도 좋아요(관종은 무엇이든 달게 받습니다.)

추신: 선작과 추천, 댓글이 비축분을 쌓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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