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9화 (9/56)

#9.

아치 왕자님께.

제가 있는 곳은 오늘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네요. 우산도 우비도 레인부츠도 소용없을 정도로 큰 비예요. 윈저튼의 연초록달엔 이런 일은 없겠지요.

어쨌든 비가 오건 말건 저는 오늘 저녁엔 포토벨로로 가야합니다. 이렇게 심한 비를 뚫고 나가는 직장인의 마음을 이해하시나요? 오늘 물을 헤치고 나가다 말고 죽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네요.

그러니 제가 죽고나서 후회하지 말고 빨리 편지를 보내요. 당신도 폭풍우에 휩쌓여 죽기라도 한게 아니라면 얼른 연락해줘요.

다녀와서 상자를 열면, 당신의 편지가 들어와 있기를 바라며.

6.12. 아침, 코델리아.

* * *

살아있기를 바라는 코델리아에게.

원고는 잘 받아왔습니까?

읽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난 줄도 알겠군요.

연초록달의 열 한번째 날, 아치 앨버트.

추신: 이곳도 비가 옵니다. 이상하고 기분 좋은 우연이로군요.

* * *

얄미운 아치 왕자님께

일단 대답부터 할게요.

아니요. 어떤 일이 일어난 줄 전혀 몰라요!

원고는 어떻게 하고 아직도 아무것도 모른 채 있냐고요?

지금부터 저도 팔 아프게 그 이야기를 적어 드릴게요.

제가 적는 동안 왕자님께서도 다음 이야기를 적어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편지를 교환하죠.

어때요? 제 이야기가 듣고 싶지 않아요?

오늘 저한텐 정말이지 엄청난 일이 생겼답니다.

추신: 제가 얘기했나요? 저 꽤 예쁘게 생겼다고요.

6.12. 수요일 밤의 행복한 코델리아.

* * *

꽤 예쁜 코델리아 그레이 양께.

갑자기 미모를 어필해도 소용없어요.

내가 더 예쁠 거라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린 영원히 마주 볼 수 없는 사이잖아요?

어쨌든 지금 난 그간 당신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하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궁금한 다음 이야기를 참고 있느라 좀이 쑤시는 기분이군요.

그동안 당신의 애를 타게 한 것을 사과드리며, 그럼 좀이 쑤신 김에 팔이라도 운동할 겸 어제 있었던 긴 이야기를 적겠습니다.

가만있자, 지난번에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네, 공주의 오두막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꺼낸 곳 까지였네요.

세실은 레이디 맥베스보다 더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제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전 거짓말을 좀 섞어 자초지종을 설명했지요. 처음 발견은 없었던 일인 것처럼 거짓말을 좀 섞어서요.

책을 더 가지러 수도원에 갔다가 공주와 기사가 살던 오두막을 보았다고 말했지요. 후원의 무덤과 비석, 2층 방에 있던 그림과 그림 속 에드위나 공주의 아이 이야기까지 모두 말입니다.

제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나서도 세실은 한참을 아무 반응없이 앉아있더군요.

제가 말한 것들을 조용히 곱씹어보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있더니, 5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제게 물었어요.

“어머니께는 말했나?”

“누이에게 제일 먼저 말하는 거야.”

“왜지?”

“왜겠어?”

세실이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곤 이렇게 말하더군요.

“여왕께선 공주의 아들을 왕위에 올릴 생각을 하시겠군. 선왕은 박수를 치며 좋아하실테고.”

더 설명할 것도 없이 모든 것을 간파한 그 말을 저는 애써 부정해보았습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야.”

“아니, 그렇게 될거야.”

세실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하얀 얼굴엔 늦은 오후의 햇볕이 그림자져 있어서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잘 알 수 없었어요.

당신 말대로 왕국 안의 빨간 머리 남자애를 다 죽이기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는 지도 몰랐어요. 결심이 굳어지기 전에 제가 나설 차례였지요. 저는 얼른 준비한 책을 내밀었어요. 코델리아, 당신이 만들어준 그 책을요.

“이게 뭔데?”

“그 집에서 발견한 거야.”

세실은 빠르게 그 글을 읽어내렸습니다.

공주가 기사를 찾아 한참을 헤매이며 여러가지 모험을 하고, 마침내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확인하고 숲에 정착하게 된 과정을 그린 아름다운 글들을요. 잠시후 그녀가 책장을 닫자마자 제가 얼른 입을 열었어요.

“어머니께 보여드릴거야. 선왕께도. 이거면 두 분을 설득할 수 있어.”

“뭘 어떻게 설득한다는 건데?”

저는 세실리아의 손을 잡았습니다.

“누이.”

“뭔데?”

세실리아의 얼굴이 좀 붉어졌죠. 아, 제가 잘생겨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우린 100퍼센트 같은 피를 물려받은 혈육이고, 세실은 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면역이 되어 있는 유일한 여자이니까요.

세실이 당황한 건 우리가 손을 마주잡을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라서입니다.

전 당황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얼른 세실이 구미에 당겨할 만한 말을 했어요.

“난 언제나 누이 편이야. 누이가 믿기 어려울 만큼 사악한 사람이라고 해도.”

세실이 제 발을 꾹 밟더군요. 발이기에 망정이지 팔이었으면 지금 당신께 이렇게 서신을 쓰기도 힘들만한 그런 강도로 말입니다. 세실은 으르렁 대며 말했어요.

“똑바로 말해.”

“알잖아. 무슨 말인지. 공주의 자식이 어떤 놈이든 간에, 윈저튼의 왕좌에 걸맞는 사람은 누이라고 난 생각하고 있어.”

“아치 앨버트, 너에게 왕좌에 대한 야심이 눈꼽만큼도 없다는 건 나도 알고있지. 하지만..,“

“무슨 말인 줄 알아. 에드위나 공주의 아들은 다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 애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선왕이나 여왕이 그애에게 야심을 불어 넣을 거라고?”

“그래, 이 망나니 자식아. 그애가 너처럼 매일 레테 수도원으로 내빼는 놈이 아니라면 말이야.”

“어쩌면 내가 같이 내빼는 놈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지. 그리고 내가 정신차리고 누나 편에 서 줄 수도 있고.”

“네 놈이 어떻게?”

“일단 이 책을 먼저 봐. 이걸 읽어보신다면 에드위나 공주를 불행한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어머니의 자책은 좀 덜해지지 않겠어?”

“이따위 책으로 30년 간의 죄책감이 사라질 거라 기대하는 건 너무 순수한 생각이야.”

“어쩌면. 하지만 이건 정말 낭만적인 이야기잖아. 우리 아델라이드 여왕께서는 무척이나 낭만적인 분이시고 말야.”

그렇게 말하고 난 벽에 붙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초상화를 가리켰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두 분의 사이좋았던 모습을 회상하는 듯 세실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지더군요. 세실은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치 네 녀석의 그 세치혀라면 어떻게 해볼 수도 있겠지.”

그 다음은 일사 천리였습니다.

전 얼른 내 누이에게 다시 공주와 기사 원고로 만든 그 책을 건네주었어요.

“누이가 발견한거야.”

“뭔 소리야?”

“공주의 오두막을 찾은 것도, 이 책을 발견한 것도 누이란 말이야.”

세실은 바로 모든 공을 저에게 떠넘기겠다는 내 계획을 알아챘어요. 하지만 못마땅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죠.

“수도원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베데르 영감과 놀아나던건 내가 아니라 아치 너야. 그리고 난 아직 완전히 결정하지 못했어. 여왕의 반응에 따라서 난,”

“에드위나 공주의 아들을 찾아내 죽이려는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거지?”

세실은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노선을 어느쪽으로 정할지 망설이고 있는 듯 보였어요. 이쯤에서 제가 그녀를 설득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전 다시, 코델리아 당신이 준 책을 써먹었어요. 공주와 기사 원고로 만든 책 말고, 다른 책이요.

“잘 들어봐, 세실. 우린 맥베스를 읽었잖아. 다시 떠올려보라고.“

“무슨 잘난척을 하려고 또 그런 말을 하지? 왜? 내가 그 자식을 죽이고 나서 맥베스처럼 벌벌 떨면서 망령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못하고 미쳐버릴 것 같아?”

“아니, 세실. 난 누이를 잘 알지. 누이는 고작 열 두살밖에 안되었을 때 여우 다섯마리를 어깨에 이고 웃던 여자잖아. 유괴당한데서 빠져나오겠다고 아무 망설임없이 열 살짜리 동생 손목을 아작낸 사람이고.”

“고쳤잖아.”

“누가 뭐래? 난 그냥 내가 누이를 잘 알고있다고 말하고 싶은거야, 세실. 누이는 망령이 찾아오면 망령까지 죽여버릴 여자야.”

“그런데 왜 맥베스 얘기를 하는거야?”

“누이는 맥베스가 아니라 레이디 맥베스라니까 그러네. 그녀의 계략대로 해. 그래야 성공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고 전 뜸을 잠깐 들인 후, 레이디 맥베스의 대사를 읊었어요.

“순결한 꽃처럼 보이되,”

세실이 내 말을 받았습니다.

“..그 밑에 숨은 뱀이 되라.”

우리 둘은 거대한 작당이라도 모의하는 사람들처럼 얼굴을 맞대고 눈빛을 주고 받았습니다.세실과 이렇게 길게 얘기해본 것도 오랜만이었죠.감격한 제가 세실을 껴안으려고 하자 세실이 절 밀어 죽여버리려는 소동이 잠깐 벌어진 후, 우리는 바로 어머니와 선왕을 알현하기 위해 사람을 불러 보냈습니다.

알현 허락이 오기 전까지 기다리며 전 세실에게 말했습니다.

“뱀을 숨기고 순결한 꽃이 되는 건 누이가 왕이 되려면 꼭 해야할 일이야. 알지?”

세실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녀가 가진 무인으로서의 용기는 화르르 달아오르는 무인의 잔악무도한 성정을 동반했죠. 그녀가 키워온 뛰어난 능력은 사람 마음을 얻기 힘든 냉정한 말투 덕에 자주 평가절하되었습니다. 언제나 한발짝 물러나 관찰하는 버릇을 음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죠.

네, 내 누이는 똑똑했지만 덕망이 없었어요. 어머니도 선왕께서도 그런 점 때문에 세실을 못미더워하는 면이 없잖아 있었습니다. 이건 정말 그녀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이었어요.

“넌 왜 이걸 내게 넘기는 데?”

“...사랑해서?”

거기서 또 몇대 두드려맞을 뻔 한 후, 저는 다시 대답했습니다.

“얘기했잖아. 난 누이 편이라고. 난 그냥 그 붉은 머리 놈의 자식을 찾을게.”

“그리고?”

“그리고? 뭐, 그리고 다시 만나 화목해진 가족놀이에나 열심히 참여하도록 하지.”

세실이 실실 웃더군요. 완전히 마음이 풀렸을 때만 나오는 얼굴이 보였죠.

그 후로는 일사천리로 풀렸습니다.

전 세실과 함께 여왕 폐하의 앞에 나갔고, 우리가 같이 공주의 오두막을 발견했노라 말했어요. 세실이 오두막에서 발견한 책이라며 여왕의 앞에서 〈공주와 기사〉의 원고를 낭송했지요.

낭송에 서툰 세실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떨려오는 통에, 이야기는 더 감동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공주가 죽지 않고 살아서 제 사랑을 만났고, 두 사람이 아늑한 숲 속에서 함께 하다 죽었다는 걸 아시고는 선왕께서는 오랜만에 다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엉엉 우시며 세실을 끌어안으셨을 땐, 쾌재를 부르다 말고 저도 살짝 눈물이 나왔어요. 어머니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시더군요. 저는 이제 그만 자책하셔도 된다고 말하려다가 그냥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세실리아의 덕이 커요. 세실리아는 벌써 에드위나 공주의 아들을 찾기 위한 수사대를 조직했어요.”

제가 울고 있는 선왕과 어머니를 보며 말했습니다.

“수사대?”

“네. 그림에 적힌 년도로 추정하건데 그 아이는 저나 세실보다 조금 어릴 거에요. 오두막에 남긴 것을 보면 어디 멀리 떠나진 못했을 거고요.”

“거기까지 알아냈구나.”

“네, 오두막을 보신다면 알겠지만 남은 신발이나 옷가지가 전혀 없어요. 오렌지주스 잔이나 구운 양파, 흰빵이 그대로 있는 걸 보면 급하게 오두막을 떠난 것인데, 그럼 옷도 다 챙겨가진 못했을 거 아니에요? 그런 데도 어떤 아인지 알 수 있을만한 단서가 전혀 남아있지 않는 걸 보면 모르긴 몰라도 아주 소박한 성격의 남자애일거예요.”

코델리아, 눈치채셨어요? 네, 전 당신이 주신 셜록 홈즈를 이미 읽기 시작한 터였습니다. 그의 재주를 흉내내어 말해본다면 다들 인상깊에 들을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지요. 어머니와 선왕폐하께서는 아니나 다를까 크게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저는 얼른 세실에게 공을 돌렸죠.

“세실리아가 이 모든 걸 조사했어요. 그리고 저에게 그 다음 일을 일임했고요.”

제가 그렇게 말하자 세실은 눈치 빠르게 다음 말을 이어받았습니다.

“어머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아치에게 그 애를 찾는 일을 맞기고자 합니다.”

“세실, 정말 네가 그 아이를 찾을 수사대를 조직한거니?”

“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에드위나 공주의 아이가 다시 왕실로 돌아오는 겁니다, 어머니. 그렇죠, 선왕 폐하?”

세실이 그렇게 말하자, 선왕께서는 조금 감동하신 거 같더군요.

“세실, 그냥 할아버지라 부르렴.”

이런 말을 다 하셨으니까 말예요.

저는 얼른, 그 감동을 가로채어 떠들어댔습니다.

“왕실로 데려온다면, 가르칠 것이 많을 거예요. 숲속 오두막에서 혼자만 자란 아이잖아요.”

여왕폐하께서 고개를 끄덕이셨죠.

“어머니,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지금은 아마 혼자 외롭겠죠. 얼른 그애를 찾아와 아직 그애 곁에 많은 가족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후계교육을 시켜야한다, 왕실 예절을 가르쳐야한다, 이런건 나중 일이에요. 그런 걸 위해 그애를 찾는게 아니잖아요. 우린 그애에게 어떤 스트레스도 없는 환경을 만들어줘야해요. 완벽한 애정이요.”

“어떤 스트레스도 없는...”

선왕 폐하께서 읊조렸습니다.

“네, 제왕학이니 군사학이니 그런걸 가르치기 전에 그 애에게 사랑을 줘야해요. 어때요, 어머님. 어머니도 동의하지요?”

여왕께선 좀 떨떠름한 표정을 짓긴 하셨지만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세실이 저를 쳐다보며 뱀처럼 미소를 짓더군요.

저는 순결한 꽃처럼 그 웃음을 세실에게 되돌려 주었죠.

어떻습니까, 코델리아. 이 정도면 저에게 칭찬을 좀 해주실 건가요?

========== 작품 후기 ==========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님들께

순결한 꽃처럼 매일연재를 하되,

사악한 뱀처럼 여러분의 선작과 추천, 댓글을 받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선추코에 보답할 폭풍연참을 기획하기 위해 저는 뱀이고 꽃이고 뭐고 소처럼 글을 쓰러 갈게요.

추신이자 TMI: 아치가 세실의 손을 잡기 전에 이 둘의 가장 가까운 스킨쉽은 세실의 타액이 아치의 뺨에 얹어지는 행위였답니다. 침뱉기요...네, 정말 이상적인 남매죠. 그 얘기는 또 다음 기회에.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