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나의 순결한 꽃, 아치 왕자님께.
잘 했어요! 정말 잘했네요!
제 생각보다도 훨씬 더 능숙하게 해냈어요. 아치, 당신은 거짓말에 소질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적어도 당신이 준 아름다운 책을 포토벨로에서 건져왔다고 말했다가 의심을 산 저보다는 훨씬 더 낫네요.
그런데요, 당신 편지를 읽다보니 하나 궁금한 점이 생기더군요.
당신은 처음부터 계속 세실리아가 정말 사악한 존재라고 얘기했잖아요. 하지만 오늘 편지를 읽다보니 꼭 그런 것만 같지도 않아요. 당신이 이렇게 저렇게 잘만 구슬린다면 세실리아도 꽤 좋은 길로 갈 수도 있을 것 같단 말이죠.
아치, 솔직히 말해보세요. 당신도 세실리아를 아주 싫어하는 건 아니죠?
내가 세실 편에 서서 거짓말 좀 하라고 했다고 해서 무조건 내 말을 따른 것만 봐도 그래요. 만일 그러다 정말 세실이 왕이 된다면 어쩔꺼예요? 당신이 정말로 세실리아를 악한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그렇게 굳게 맹세하며 누이 편에 서겠다고는 말하지 못했을거예요.
편지 속 당신은 진심으로 세실이 왕좌에 앉기를 바라는 사람 같았어요. 내가 세실이어도 당신을 믿겠더라고요.
어때요, 아치? 당신은 그저 거짓말의 귀재일 뿐인가요?
모든 것이 당신의 감쪽같은 연기였던건가요?
내가 아는 아치 앨버트 왕자는 거짓말은 좀 할지 몰라도 남의 마음을 가지고 능수능란하게 노는 사람은 절대 아니거든요.
그러니 어서 얘기해봐요.
아치, 당신의 진심은 뭐예요?
6.12 밤.
-코델리아.
추신: 여전히 제 편지는 써가는 중입니다.
추신2: 세실이 열살 짜리 남동생 손목을 아작 낸 건 무슨 이야기죠. 엄청 재밌는 이야기일 것 같은데요?
* * *
쓰라는 편지는 안 쓰고 내 편지에 충실한 응답자가 되어주고 있는 코델리아께.
세실이 내 손목을 아작 낸 이야기가 궁금하다고요?
그걸 이야기 하려면 일단 내가 여덟살 때의 일부터 설명해야겠네요.
그 나이가 되자 본격적인 후계 교육이 시작되었고 어머님께서는 제게 제왕학을 가르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외에도 귀족 가문의 자제 몇과 어울려 승마, 기마, 검술, 간단한 공격과 방어 마법, 발레아어, 알다르어, 레난어 등의 수업을 듣게 되었죠.
세실은 저보다 다섯 살이나 많았고, 5년 전부터 공부를 시작했지만 우리 여왕 폐하께서 세실을 위해 준비한 수업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어요. 다도, 치유마법, 궁중 예절, 춤, 꽃꽂이 등….
차라리 제게 가르쳤다면 정말 재밌게 배웠을 텐데, 세실같은 여인에게는 너무 부드럽고 다정하기만 한 세계였습니다.
세실은 어머니를 졸라 자신도 저와 같은 수업을 듣게 해달라고 했어요. 어머니도 여왕이 되었는데, 저라고 되지 못할 이유가 뭐냐고요. 어머니께서는 단번에 거절하셨고요.
코델리아, 당신의 인물 설정집에도 써있을 지 모르겠지만 세실은 이래 봬도 꽤 미인이랍니다. 아무렴, 나와 같은 피를 나눴으니까요. 어머님은 아마 세실을 로이틀링엔의 왕가로 시집보내실 생각이었던 듯 해요. 그러니 주구장창 신부수업만 시키신 것이고요.
“넌 여왕이 되지 않을 거야, 세실.”
“왜 안되는데요? 어머님은 여왕이 되셨잖아요? 저도 할 수 있어요.”
그렇게 우겨대는 세실을 타이르며 어머님은 20여년전 벌어졌던 로이틀링엔 제국과의 전쟁 이야기를 해주셨다고 합니다. 이야기의 끝에 어머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러니 로이틀링엔과의 평화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국혼이 꼭 필요하단다. 세실리아.”
열 셋밖에 안되었지만 세실은 어머님이 뭘 원하시는지, 그게 왜 필요한 것인지를 바로 알아들었어요.
그런데 어디 어머님께 자식이 세실 밖에 없답니까? 국혼이라면, 뭐 저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 사특한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린 세실은 그때부터 저를 슬슬 꼬드겼습니다.
우선 벌에 쏘여 퉁퉁 부르튼 고양이를 고쳐주며 (세실이 누굴 고쳐주다니요!) 세상에 치유마법만큼 재밌는 마법이 없다고 자랑을 했죠. 매일같이 지루하다고 노래를 부르던 것을 말입니다.
궁중 예절도 모르는 천박한 애랑은 놀지 않겠다고 대놓고 절 따돌리질 않나, 턴이며 투스텝도 배우지 못한 놈과는 말도 섞지 않겠다며 함께 걸을 수 없다며 절 두고 혼자 가버리질 않나...
어느날인가엔 정원의 꽃을 꺾어 아를리 궁을 온통 장식하면서 제 방만 쏙 빼놓기도 했답니다. 정말이지 너무하지요?
세실은 한 번 그러기로 작정하면 끝까지 해내는 여자입니다. 어려서부터 그랬지요.
저는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고요. 이 역시 어려서부터 그랬습니다.
네, 이건 결말이 정해진 게임이었어요. 결국 전 일주일만에 어머님께 담판을 지으러 나아갔습니다. 여왕 폐하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죠. 저도 세실이 듣는 신부수업을 다 듣게 해달라고요. 꽃꽂이도, 궁중예절도, 춤도, 다도도, 치유마법도 전부요!
어머님은 얼굴을 찡그리셨지만, 선왕폐하께서는 박장대소를 하시며 그러라고, 반드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야기했나요? 어려서 선왕께서 절 유독 예뻐하셨다고요. 혹자는 에드위나 공주와 제가 좀 기질이 비슷해서 그런 것이라 하던데 피 한방울 안 섞인 사이에 그럴 턱이 있겠습니까? 그저 제가 워낙 예쁘고 귀엽게 생겼으니 그러셨던 거겠죠.
어쨌든 선왕께서 직접 내린 명이시니 저는 세실이 배우던 신부수업을 배울 수 있게되었어요. 그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세실은 냉큼 말을 보탰고요.
“아치가 제가 배우던 것을 배운다면, 저도 아치가 배울 것을 같이 배우겠어요.”
“세실, 너는 일국의 공주야. 언젠가 왕비가 될 몸이고, 공격마법이나 검술같은 것으로 몸을...“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을 막으셨지만 세실은 저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얘가 왕비가 될 수도 있어요. 생긴 것도 얘가 더 예뻐요. 아마 가르치면 춤도 꽃꽂이도 저보다 잘할 걸요?”
그리고 저를 쿡쿡 찔렀죠. 어렸을 때만해도 다섯 살 차이는 엄청나게 큰 차이입니다. 지금이야 제가 세실보다 덩치도 키도 훨씬 크지만, 그때만 해도 세실 가슴팍에도 못닿았던 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세실이 시키는 대로 답했죠.
“맞아요. 제가 더 예뻐요.”
다시 선왕께서 박장대소를 터뜨리셨습니다. 그렇게 열 세살의 세실은 순수한 남동생을 장장 일주일이나 괴롭힌 끝에 자신이 정말 잘할 수 있는 세계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겁니다.
손목이 짤릴 뻔한 이야기를 하라고 하는데 왜 갑자기 신부수업 이야길 꺼내냐고요?
히스클리프가 캐시의 유령을 보고싶다고 절규하기 전에 그들 사이에 끝내주게 처절한 집착과 사랑의 시간이 있었던 것처럼 모든 이야기에는 다 맥락이란게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려봐요, 코델리아. 본론을 시작하기 전에 일단 내 아직도 헐렁한 손목부터 풀어야겠으니까.
-적어도 세실보다는 예쁜 당신의 벗, 아치가.
* * *
윈저튼 사교계의 총아, 아치 앨버트 왕자님,
당신이 사교계를 주름잡는 춤 실력을 지니신 것이 모두 신부수업때문이었다니......
정말 충격적으로 재밌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어요!
팔목 부러지는 이야기 같은 것 되었으니 빨리 신부수업 얘길 더 해봐요.
제 관심은 이제 완전히 이쪽으로 틀어졌답니다.
자, 그래서 여덟살 때 배우던 그 신부 수업은 언제까지 이어졌죠?
보통 신부수업은 결혼하기 전까지 전까지 계속되지 않나요?
아치 앨버트, 혹시 지금도 신부수업 중이신가요?
6.12.밤.
-궁금증이 가득한 코델리아.
추신: 신부수업 중이라 바쁘시면 답장은 천천히 하셔도 돼요!
* * *
날 놀리고 싶은 것 같은 코델리아,
난 하나도 창피하지 않아요.
오직 진정 남자다운 남자들만이 당당히 신부수업을 받을 수 있는 것이죠.
티스푼을 제대로 잡는 법도 모르면서 검을 잡아서 뭐한답니까?
찻잔에 차 따르는 법도 모르면서 궁술로 과녁을 명중시킬 수 있답니까?
장미꽃의 가시도 무서워하는 주제에 날아오는 창을 막아내는 일이 가당키나 하겠냐고요.
윈저튼의 어떤 뛰어난 기사도 나보다 우아한 방식으로 검을 잡을 수는 없을거라 나는 자부합니다.
여하튼 당신이 궁금해하시는 바를 설명하자면 세실과 내가 받던 신부수업인가 뭔가는 2년 후, 로이틀링엔 제국의 공주와 왕자가 모두 이른 결혼을 한 후 세실이 국혼을 할 껀덕지도 없는데 이딴 건 더 배울 필요없다며 박박 우겨 중단되고 말았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적잖이 섭섭했습니다. 모든 과목에서 낙제생이었던 세실과 달리 난 춤, 다도, 치유마법, 꽃꽂이 등에 균형있게 뛰어난 두각을 나타냈으니까요.
내 실력이 궁금하시겠지만 당신 손을 붙잡고 춤을 리드할 수도, 당신에게 따뜻한 차를 따라드릴 수도 없으니 여기, 내가 정원에서 꺾어 온 꽃을 묶어 보냅니다.
많은 남자들이 꽃을 선물하는 걸 부질없다 생각하지만, 세상에 꽃처럼 좋은 선물은 없죠.
꽃을 받았을 때 얼굴에 잠깐 퍼지는 미소, 그것만으로도 꽃선물엔 정말 큰 가치가 있는걸요.
코델리아, 당신과 나의 경우는 독특하여 이걸 받고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 지 난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말이에요. 나의 다정한 벗, 코코. 마음에 안들었더라도 부디 웃었노라 이야기해줘요. 당신이 웃었다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기쁨이니까요.
연초록달의 열두번째 날
-윈저튼의 일등 신랑감, 아치 앨버트.
* * *
최고의 신랑감 아치 왕자님께.
당신이 보내주신 꽃은 안타깝게도 완전히 말라서 제게 도착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가진 마법의 상자는 편지나 물건 뿐만 아니라 세월까지도 전달해주나 봅니다.
하지만 상자에 담긴 수많은 시간들이 꽃에게 거칠게 굴지는 않았던 것인지 바싹 마른 꽃들은 원래 제 색보다 조금 바랜 빛으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네요. 원래대로라면 연분홍빛을 띄었을 큰 봉오리의 장미에, 수수한 푸른빛의 작은 들꽃들, 아직도 푸른 내음을 풍기는 조그만 잎사귀들이 참 아름답습니다.
네, 인정할 수 밖에 없겠어요. 당신이 글재주만큼 손재주도 있다는 것을요.
언젠가 우리가 만난다면, 당신이 따라주는 차라도 마시며 다른 재주는 또 무엇이 있는지 알아봐야겠어요. 그 전에, 오늘은 일단 당신이 준비한 이야기를 듣고요.
이제 다시 긴 편지를 기다리며 혹시나 그때 부러진 손목이 아직도 성치 않으실까 저도 선물을 하나 보내볼게요.아끼는 만년필 하나와 어제 집앞 가게에서 산 포르투갈 산 편지를 동봉합니다.
만년필은 쓱쓱 미끄러지며 쓸 수 있으니 당신의 깃털펜보다는 글쓰기가 훨씬 수월할테고,
편지지는 윈저튼의 인장이 찍힌 종이처럼 폼이 나진 않지만... 매끄러운 데다 내구성이 좋거든요.
전 왕자님의 편지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답니다.
자,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마음껏 손목 부러진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겠죠?
6.12.
-당신의 코코.
추신: 물론 저는 아주 활짝 웃었어요. 정원까지 나가 따온 보람이 드시나요?
========== 작품 후기 ==========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로설 남주가 신부수업이라니 하차합니다...
라는 댓글이 달릴까봐 걱정하다 지인의 감수까지 받아가며 이번 편을 올립니다.
아치의 남성성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삭제하려 했지만 아치가 상관없대요
추신: 선작과 추천, 댓글과 칭찬, 심지어 욕까지도..모든 반응은 저의 글쓰는 힘이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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