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11화 (11/56)

#11.

사랑스런 코코에게

대체 이 펜은 뭡니까?

정말 스르르 종이에 미끄러지는군요.

당신이 어쩜 그렇게 빨리 내 서신에 답장을 주었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당장 필경소로 달려가 베데르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을 참고 일단 오늘 밤은 당신의 더욱 충실한 필담 벗이 되어보겠습니다.

지난번 편지에 세실이 나와 함께 후계자 수업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썼죠?

세실은 정말 모든 것을 잘했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들은 하나같이 저만 칭찬했고요.

세실도 일국의 공주였는데…….

...네, ‘공주’ 였으니까요.

그들에게 세실은 그저, 왕자가 후계학을 배우는데 곁다리로 끼어든 학생이었을 뿐이죠. 게다가 나이까지 저보다 다섯살이나 많았으니 세실이 잘하면 그냥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잘하면 그건 아주 칭찬받을 일이었고요.

세실이 질투했냐고요?

글쎄요. 이걸 정확히 질투라고 불러야하는 지 모르겠네요. 어린 제가 느끼기에도 뭔가 부당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세실은 절 질투했다기보다 그냥 이런 상황에 열이 받아있었던 것 같아요. 그 열기를 열심히 뿜어내며 세실은 무얼 하든 저보다 훨씬 열심히 했습니다. 그녀의 기술은 나날이 늘어났어요. 매일 밤 남아 죽어라 연습하는데 그러지 않을 리가 있나요?

게다가 그녀의 타고나길 잔인한 성정은 남을 공격하는 법을 배우는 무술엔 아주 안성맞춤이었고 제왕학은….

코델리아, 제왕학을 배워보셨나요? 젠체하는 소리를 하는 앞장의 몇 페이지를 제쳐두면 그건 일종의 ‘사기술’ 같은 겁니다.

남을 어떻게 속여먹고, 남의 속임수를 어떻게 눈치채나 같은거요. 세실은 뭐, 이 분야에선 타고났다고 봐야 합니다. 코코 당신의 말대로 나 역시 거짓말엔 좀 재주가 있는 편이긴 하지만요.

그렇게 2년여가 지난 어느날이었어요. 승마를 가르치는 카라잔 선생이 우릴 데리고 서쪽 초원으로 가겠다고 했지요. 전 카라잔을 아주 좋아했어요. 그는 알다르 사람이었고 옛 전설을 잘 알고 있었거든요. 가끔 세실 몰래 나에게만 옛 이야기들을 해주었는데 그 중에는 드래곤이 나오는 발레아의 이야기들도 있었죠.

언젠가 제가 그에게 알다르 사람이면서 어떻게 알다르가 아니라 발레아의 옛 이야기까지 잘 알고 있냐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며 내 입에 쉿, 하고 손가락을 대더라고요.

“말을 타고 가다 보면 어디든 가 닿는 법입니다.”

전 물었어요.

“카라잔, 당신의 특이한 발음도 거기서 배운거야?”

“특이한 발음이라뇨, 왕자님?”

“내 이름을 부를 때 발레아어처럼 말하잖아. ‘아치이볼트 왕자님’하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전 그가 그렇게 발레어식으로 날 불러주는게 좋았거든요. 뭔가 신비하잖아요. 알다르 사람인 카라잔이, 윈저튼에 와서, 완벽한 윈저튼어를 구사하며 몰래 발레아어 억양으로 나를 불러준다는게요.

그는 조금 놀라더니 웃으며 내게 말하더라고요.

“네, 맞아요. 거기서 배웠어요. 하지만 왕자님과 저만 아는 비밀이니까,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돼요.”

비밀이란게 생겼다는 게 기쁜 마음에 전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하지만 우리가 그 대화를 나눈 이래로 그는 자기 억양을 완전히 고쳐 다시는 날 그렇게 불러주지 않았죠.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뿐이었습니다. 아마 전 당신이나 세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주 똑똑하진 않은 아이였나봅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날 불러주는 독특한 발음의 재미가 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난 여전히 카라잔 선생을 좋아했어요.

어린 시절만 해도 왕성 밖을 나갈 기회는 승마 시간 뿐이었으니까요. 처음엔 별궁에 딸린 승마장, 기껏해야 근처 풀숲 정도로만 가던 카라잔은 우리가 말에 익숙해지고 나서는 왕성 밖의 시장 거리, 초원 넘어의 숲, 호수, 연못가까지 우릴 데리고 가주곤 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멀리 간 건 그날이 처음이었어요.

그날, 우린 제법 거창한 행렬을 거느렸습니다. 시종만 해도 마차로 열은 될 정도가 따라왔고, 우린 서쪽 초원 근처 자작가에 들러 여장을 풀고 본격적으로 우리 말을 달리게 할 준비를 시작했죠.

카라잔은 그 많은 시종들을 어떻게 설득한 것인지 여기서부터는 우리 셋만 달리자고 했어요. 세실도 나도 그 제안이 퍽도 기꺼웠죠.

초원을 한참 달려나갔을 떄 누군가가 따라붙었죠. 고작 셋이었으며 카라잔은 명사수에 검도 잘 다루었기에 우린 그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카라잔이 계속 뒤를 살피더니 우리에게 잠시 멈추라는 사인을 했습니다. 우리가 멈추니 마차를 끌고 온 그 사람들 역시 멈추더군요. 카라잔은 말에서 내리라고 했고 세실도 나도 순순히 내렸어요.

그렇게 우린 너무 쉽게 납치되었죠.

그들은 발레아 인이었어요. 발레아가 우릴 납치한다고 해서 발생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전 생각해봤죠.

전쟁을 일으킬 빌미를 만드려고?

전쟁이 일어난다면 인질로 우릴 잡은 것이 전략적으로 많은 이득이 될 수 있어서?

로이틀링엔 제국에다 우릴 넘기려고?

고작 서너 달 공부한 어린애의 머리로도 서너가지의 가설은 대어볼 수 있었으니 아마 더 많은 꿍꿍이가 있을 터였어요.

우리 입을 가린 천에 미약이라도 묻어있던 것인지 마차 뒷칸에 실린 후, 세실과 전 잠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한참 후에서야 전 제 얼굴에 축축한 것이 묻어 깼어요. 그것은 물론 세실이 뱉은 침이었죠.

제가 말했죠, 코델리아? 세실이 그렇다니까요.

그런 악독한 방법으로 깨어난 후에는 어서 사태를 파악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셜록 홈즈를 읽기 십수년 전이었지만 그래도 뭐라도 둘러봐야 여기가 단서를 얻을 수 있단 생각은 그때도 했답니다.

마차 짐칸에 달린 줄을 보았는데 매듭이 특이했어요. 카라잔이 내게 해준 옛 이야기 중, 매듭에 묶인 용의 전설이 떠올랐죠. 아주 특이한 매듭으로 묶여 빠져나오지 못한 용의 이야기였죠.

“발레아야”

제가 귓속말로 세실에게 말했어요.

“발레아?”

“저 매듭을 봐. 발레아 매듭이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카라잔이 이야기 해준 전설에서 꼭 저런 매듭이 묶여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슴의 이야기가 나왔었어.”

“…카라잔이 해준 이야기면 알다르 이야기가 아니고?”

“아니야. 그 이야기에는 용도 나왔단 말야. 그리고 카라잔이 해주는 얘기는 거의 다 발레아 얘기였어. 카라잔은 발음도 발레아 발음이잖아.”

세실은 말이 없어지더군요. 바로 이해한 거겠죠. 카라잔이 사실은 알다르가 아니라 발레아 인이라는 사실을요.

“카라잔은 발레아 사람이었나봐. 그렇지?”

제가 이렇게 물었지만 세실은 말없이 가만히만 있었어요.

“카라잔은 처음부터 이러려고 우리에게 잘해준걸까?”

“......”

“카라잔한테 가서 그러지말고 우리랑 같이 궁으로 돌아가자고 해볼까?”

제가 다시 묻자, 세실이 무서운 목소리로 대답했죠.

“입 닫아. 이 머저리야.”

그리곤 이렇게 덧붙이더군요.

“어깨 물어.”

“응?”

“내 어깨를 물라고. 더 꽉. 이쪽으로 조금 더 와.”

제가 세실의 말대로 움직이자마자, 무언가 쾅 소리를 내며 떨어졌어요.

부드득, 하는 소리가 났죠.

내 손등 뼈가 아작나는 소리였습니다.

세실이 벽을 차서 우리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던 철퇴를 떨어뜨렸고, 그게 내 손에 떨어진거죠. 덕분에 그들이 내 손목에 씌워둔 보호구가 어그러졌고, 그것과 함께 내 손목도 영영 못쓸 형편이 되었어요. 내가 물어버린 세실의 어깨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꽉 문 덕분에 비명 소리는 나지 않았고, 발레아인들은 잠시, 짐칸을 열어 우리가 멀쩡히 있는 것을 확인하더니 단지 철퇴가 떨어진 소리였을 뿐이란 걸 깨닫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잘했어.”

“젠장, 세실, 이거 엄청나게 아프다고.”

제가 그렇게 십년의 인생 동안 알음 알음 배워온 윈저튼에서 가장 저속한 욕설을 세실에게 여럿 내뱉는 사이, 세실은 표정 하나 흩트리지 않고 제게 말했어요.

“그 정도는 치유술로 복구돼.”

“그럼 당장 해.”

“내가 할 수 있다는 건 아니고.”

“젠장, 세실!”

“아주 늦지만 않으면 치유술사가 복구시켜줄거야.”

“아주 늦지만 않으면?”

“그래,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빨리 나 좀 풀러줘.”

보호구에서 팔이 풀린 내가 그나마 덜 짜부라진 왼 손으로 얼른 세실의 묶인 손을 풀으며 물었어요.

“다른 방법은 없었어?”

“네 손목 쯤이야 아작 났다 고치면 되는 일이야. 우리가 죽으면 흑마술사가 와도 살려내진 못하지. 산 채로 잡혀가면 일은 더 커지고.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하고 불평해.”

세실은 빠르게 그렇게 말하곤 손이 자유로워지자 마자 철퇴를 들었고, 장막을 걷고 바로...

전 당연히 세실이 우릴 납치하려한 두 무뢰배 쪽을 죽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세실이 제일 먼저 죽인 건 카라잔 선생이었습니다. 그동안 매일 같이 초목 아래 같이 떠들고 웃고, 말에서 떨어지려 하던 때마다 세실과 나를 안아주던 따뜻하던 카라잔이요.

늘 우릴 향해 웃어주던 카라잔의 얼굴을 세실은 단번에 철퇴로 뭉개버렸습니다.

저라면 그렇게는 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니 못했겠지요.

세실은 자작가에서 우릴 기다리던 시종들도 모두 갈아치웠어요.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씩 우리 옆에 있던 사람들이었는데 말입니다.

세실은 그런 여자예요. 전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고요.

코델리아, 당신은 내게 세실을 꼬드기기 위해 거짓맹세를 하라 하셨죠. 전 당신의 현명한 조언을 따라 그렇게 했고요.

네, 하지만 당신이 추리하신 것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전 세실이 여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어요. 윈저튼을 위해 제가 상상도 못할 짓들을 모두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어때요, 코델리아. 당신도 동의하시나요? 자, 이 이제 당신도 슬슬 편지를 다 썼겠지요?

어서 내게 왜 앤셀린 작가의 원고를 읽지도 못하고 있는지 들려주세요.

-연초록달의 캄캄한 밤에, 당신의 벗 아치.

* * *

슬슬 팔목이 걱정되는 아치 왕자님께.

그래서 당신의 그 연약한 팔목은 괜찮았어요?

제가 잘 미끄러지는 펜이라도 보내드린 것이 다행이네요.

근데요, 아치. 전 사실 세실에게 좀 반할 것 같아요. 물론 절대 만나고 싶지는 않은 여자지만, 제가 윈저튼의 병사였다면 저의 여왕으로 모시고 싶은 여자네요. 진짜 레이디 맥베스요.

6.12. 팔목이 아작 날 지경인 긴 편지를 쓰다말고 코델리아.

* * *

사려깊은 나의 벗, 코델리아께.

그래요, 이제 내가 기다릴 차례였죠.

어디 한번 그 팔목이 아작나게 긴 편지를 보내봐요.

점 하나 찍지 않고 조용히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의 아치.

추신: 세실리아의 말 대로 제 팔목은 치유술사가 바로 고쳐주었어요. 서너달 고생을 하긴 했지만 이젠 당신이 걱정하실 일은 없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그건 너무 한 일이죠?

==========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윈저튼 남매의 가장 가까운 스킨쉽은 뭐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그건 그렇고, 제가 세실을 좋아한다고 말씀드렸었나요?

추신1: 제 손목은 아치처럼 아작난 적이 없으니, 오늘도 소처럼 일해서 내일(8월 1일로 넘어가는 새벽) 자정에 아홉개 내지 열개의 연참거리를 가지고 올게요. 잊지마시고 아치와 코델리아, 그리고 다른 이들의 편지를 엿보러 와주세요!

추신2: 정성스러운 코멘트가 절 더 열심히 글쓰게 합니다.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전 욕을 주셔도 반응만 있으면 행복해요..(침은 뱉지 마세요..) 조용히 눌러주시는 선작과 추천도 정말 감사합니다.

<-- 보내지 못한 편지 -->

(연참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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