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나의 왕자님께.
당신이 기다리신 만큼 내 얘기가 재밌을 지는 모르겠네요. 사실 내 일상은 윈저튼 왕국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다이나믹하지는 않으니까요.
편지를 쓰다 말고 잠시 시시콜콜한 내 연애사 같은 걸 당신에게 털어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를 언제나 ‘나의 벗’ 이라 칭해주시는 당신의 다정함에 기대어 한껏 수다를 떨어볼게요.
어젠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던 하루였고, 전 내내 이 얘기를 아치 왕자님에게도 해주어야겠다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거든요.
원래는 쉬는 날이었어요. 비도 오고하니 전 당신의 편지나 기다리며 방에서 노닥거리다 저녁에나 포토벨로로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누군가 제 방 문을 두드리더라고요. 문을 열자 서있는 얼굴은 왠지 익숙했어요.
어디서 봤는데, 누구더라, 거래처 직원인가? 얼마전에 들렀던 이스트런던의 동네 서점 직원이었나? 별별 생각을 다 하며 저는 일단 인사부터 했지요.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코델리아.”
그 사람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인사했죠. 그 미국식 억양을 듣자마자 그가 누군지가 떠올랐어요.
“마크 로플린!”
“네, 그게 제 이름입니다.”
왕자님은 모르시겠지만 그는 여기선 엄청난 유명인사에요.
그의 아버지, 리처드 로플린이 전국구로 유명한 고서적 수집상이거든요. 어쩌다 고서적 수집상이 유명인사가 되었냐고요? 10여년 전, BBC에서 집집마다 책장 한 켠에 숨어있는 고서적을 감정해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거든요. 리처드 로플린은 그 프로의 메인 패널이었어요. 모두가 제 방 책장 한 구석에 있는 오래된 책을 들고 그의 앞으로 나갔죠.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사장될 뻔한 프로그램을 살린건 그의 잘난 아들 마크이었어요. 아빠를 닮아 커다란 코에 쑥 들어간 깊고 검은 눈동자를 하고 있는 그는 아주 미남이라고 볼 수 없지만 어딘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어요. 그가 아버지와 함께 나오기 시작하면서 티비 프로그램 〈로플린의 책들〉은 다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답니다.
그런 유명인사가 대체 왜 제 집 문앞에 있는 지 알 수 없었어요. 입만 떡 벌리고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먼저 입을 열더군요.
“메리앤 말이 당신이 꽤 인상 깊은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제야 전 깨달았어요. 메리앤은 소더비 이야기를 하면서 저에게 그랬거든요. 일단 아는 사람에게 연락해보겠다고요. 이 물건에 흥미를 가질만한, 소더비 보다 훨씬 더 좋은 값을 쳐줄 사람을 알고 있다고요.
그게 마크 로플린일 줄은 몰랐죠.
마크는 저에게 그 책을 보여달라며 거의 빌더군요. 제가 책장에 있는 책을 꺼내 들고오자 식겁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는 대체 이런 걸 그냥 책장에 보관하는 정신상태는 뭐냐고 물으며 새하얀 장갑을 끼곤 조심스럽게 책을 매만지더라고요. 좀 변태같았지만, 섹시하긴 하더라고요.
“오늘 바로 보관함을 제공해드리겠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그냥 여기 두시면 될거예요. 작은 금고같은 겁니다. 이런 물건을 이렇게 보관하는 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당신에게 팔지 않을거예요.”
“아뇨, 팔게 될 겁니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아주 기분이 나쁘진 않더라고요.
그는 내게 점심이라도 사고 싶다고 했고, 마침 좀 배가 고프던 참이라 전 그와 함께 집앞으로 갔죠. 간단한 식사를 하며 우린 잠깐 담소를 나누었어요.
유명인과 나누는 이야기라 그런게 아니라 그는 꽤 흥미로운 사람이었어요. 전 마크에게 물었어요.
“진짜로 책은 잘 안 읽어요?”
프로그램 안에서 아버지 리처드는 늘 마크에게 그랬거든요. 책의 겉모습만 좋아하며 내용도 상관안하고 모으는 자식이라고.
“읽지요, 물론. 보통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읽고, 주로 읽는 것보단 사는 걸 좋아하지만요.”
“이런 책을 주로 모으시나요?”
“아름다운 것이라면 뭐든지 모아요.”
“아름다워서 책을 좋아하는 거예요?”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그리고 당신만큼도 아니겠지만 책을 좋아하긴 합니다. 빨리 나한테 제일 좋아하는 책을 물어봐요.”
“제일 좋아하는 책이 뭔데요?”
“리어왕이요.”
리어왕은 제가 왕자님에게 드린 맥베스를 쓴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작품이에요. 그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 바로 ‘코델리아’죠. 전 제 이름을 가지고 하는 농담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다들 자기가 되게 창의적이라도 되는 양 그런 농담을 하는데, 저로서는 살면서 수천번쯤 들은 이야기라 너무 지겹거든요. 하지만 이 농담은 타이밍이 좋았어요. 제법 위트있었죠.
“아주 주인을 제대로 만났네요.”
제가 이렇게 받아치자 그는 싱긋 웃더군요.
“그러게요. 코델리아, 당신도 당연히 셰익스피어는 좋아하겠지요. 설마 원수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요. 그렇지만 전 리어왕같은 비극보단 희극이 좋아요. 십이야나 뜻대로 하세요 같은...”
“저런, 전 철저히 비극주의자예요. 슬프지 않고 아름다운 것은 별로 본적이 없거든요.”
들으셨나요, 왕자님? 슬프지 않고 아름다운 것은 별로 본 적 없다라. 정말 멋진 말 아닌가요?
그 후로도 우린 재밌는 이야기들을 많이 했어요. 주로 제가 마크와 그의 아름다운 책에 얽힌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들었지만요.
그는 꽤 말을 잘하더군요. 저보다도 말이 많은 남자는 처음 봐요. 전 저의 엄마도 예전에 고서적수집가게를 운영하셨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만 그 말을 꺼낼 타이밍도 잡지 못한 것 있죠?
그래도 마크는 좋은 사람인 것은 분명해요. 점심을 먹은 데는 우리 집에서 5분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는데 절 집앞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더군요.
전 그렇게 해봤자 책은 팔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마크는 팔든 팔지 않든 소중히 다뤄달라며, 다시 만나자고 했죠. 잠시라도 책을 살펴볼 기회를 준다면 그걸로도 좋다고요.
그런 것쯤이야 지금도 해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전 괜히 도도한 척 살짝 고개만 끄덕였죠. 왕자님도 제왕학을 한달 배우셨으니 아시겠지만 사는 덴 밀고 당기기의 기술이 좀 필요한 거잖아요?
돌아오는 길엔 비가 그쳐있더라고요. 우리 지난번에 그랬잖아요. 이런 날씨라면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것 같다고요. 그래요. 딱 그런 날씨였어요. 그런 날에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유명인과 함께 러셀스퀘어를 걷고 있자니, 정말이지 소설 속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었어요.
집앞까지 오자, 마크는 신사답게 문을 열어주곤 2층까지 따라들어오진 않았어요. 쿨하게 계단을 올라가려하는데 갑자기 아까 가게에 우산을 두고온게 생각나는거예요. 그래서 다시 나가려 얼른 몸을 틀었죠. 아, 그러지 말았어야했는데......
몸을 돌린 순간, 그가 뭔갈 오해했나봐요. 저에게 바로 키스를 하려고 하더라고요.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런 건줄 모르다, 입술이 부딪히고 나서야 이게 뭔질 깨달은 전 너무 놀란 나머지 으악, 하고 소리를 질렀어요.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아, 난 당신이 다시 오길래, 미안해요 코델리아.”
“아니에요. 실수였잖아요.”
그는 미안하다고 열 번은 사과한 것 같아요. 사실 그 전의 분위기는 키스를 해도 뭐 아주 나쁘지는 않은...분위기였나...? 모르겠어요. 보통 처음 만남에서 잠깐 점심을 먹고 키스를 하기도 하나요? 저녁도 아닌데요!
어쨌든, 그때 몸을 돌리지 말아야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마크가 그렇게 오해할 일도, 서로 부끄러울 정도로 어색해지는 일도 없었겠죠. 집에 돌아와서는 그 일 때문에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잠깐 아아아아악! 하고 소리를 쳤어요. 하지만 아마 저보단 마크가 더 부끄러웠을 거예요.
그런 생각으로 위안하며 전 하루종일 이 일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게 다음 일정이 있음을 감사히 여겼죠.
포토벨로로 출발한 건 오후 네시쯤이었어요. 비가 먼지를 다 씻어준 덕인지 전에 없이 선명한 초록간판 골동품 점 앞에 서서 저는 지난주에 겪은 일을 떠올렸어요.
분명 린다와 패트릭이 그랬었죠. 가게는 매주 수요일마다 쉰다고요. 하지만 린다 말과 달리 그곳은 지난주와 마찬가치로 불이 켜 있었고 문도 활짝 열려 있었어요. 그리고 신기루같은 미남자, 리암이 있었죠.
전 리암에게 대체 뭘 어떻게 한 거냐고 물었죠. 왕자님과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게 된 것은 정말 좋은 일이지만, 일주일 전부터 궁금했던 질문이었으니까요. 리암은 내 질문에 적의가 담겨있지 않았다는 것을 간파했는지 웃으며 고개를 저었어요.
“말할 수 없어요.”
그 얼굴은 ......
아, 형용할 수도 없네요.
전 그만 ‘아 네 말할 수 없으면 말하지 말으셔야죠.’ 라고 말할 뻔했다니까요? 그런 종류의 생김새가 세상에 있더라고요.
왕자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당신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리암에게는 못 미칠 거예요. 금빛 머리는 햇살 한점 없는 오후 7시의 실내에서도 스스로 빛이라도 발산하는 듯 눈부시고 섬세한 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이마는 날카로운 콧날로 이어졌지요. 저는 그 선을 감상하느라 그만 넋을 잃고 말았는데, 그러는 새에 연푸른색 눈동자가 절 쳐다보고 있더라고요.
“코델리아?”
“네?”
“...괜찮아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니 온 실내가 컴컴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얼른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니, 요정님께서는 상냥하게도 제게 권하셨죠.
“잠시 차라도 마시겠어요?”
숲의 요정같이 생기긴 했지만, 차를 권하는 것이며 따르는 폼새는 누가봐도 영국인이더군요. 커다랗고 단단한 몸이 날렵하게 움직이며 찻잎을 꺼내어 티포트에 넣고 우아한 손놀림으로 물을 끓이고 하는 것이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정말이지 아름다웠어요.
창밖엔 속살속살 비가 내리고, 실내는 적당히 서늘해 따뜻한 차를 마시기엔 딱 좋은 날씨였습니다. 넋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전 찻잔을 받아들고나서야 겨우 원래 목적을 상기하고 물었습니다.
“앤 셀린 작가님이 당신에게 이 원고를 넘기라고 시켰어요?”
“아마도요.”
그가 또 제 눈을 상하게 하려고 사악한 미소를 지어댔습니다. 전 눈살을 찌뿌린 채 물었죠.
“혹시 당신이 앤 셀린 작가님이에요?”
“뭐, 아주 오래 전에 제법 글재주가 있다는 소릴 듣긴 했죠.”
“정확히 말해주세요, 리암. 당신이 쓴 책이에요?”
와, 보셨어요, 아치? 제가 그 미남에게 이렇게 똑부러지게 물었다니까요. 그런데도 그는 무서워하지도 않고 웃으며 고개를 흔들더군요.
“아뇨.”
“그럼 앤 셀린 작가님을 만나보긴 했어요?”
“물론이죠.”
“...작가님의 사생활은 존중하니 여기에 대해선 더 묻진 않을게요.”
“좋은 자세예요, 코델리아. 당신이 그 초록눈을 반짝이며 물어보면 뭐든 대답해주고 싶어지거든요.”
왕자님도 그러시나요?
잘생긴 남자들은 대체 왜 그렇게 의식도 않고 끼를 부리는 거예요?
여자를 설레게 할만한 말들이 아주 입에 붙어있다니까요.
저는 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에 손을 올리곤 그의 말을 받아쳤어요.
“그럼 그냥 물어볼까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 제 마음이 아플거예요.”
아, 네. 요정님께서 마음이 아프면 안되죠.
아까 제가 제왕학이니 밀땅이니 뭐니 했던가요? 이상하게 마크 앞에서 그렇게 단단하고 도도하던 제가 리암 앞에서는 허물어지기만 했어요. 전 다시 상냥한 말투로 돌아가 물었어요.
“사실 지난 주 목요일에도 여기 왔었어요. 린다는 이 가게가 수요일은 쉰다고 했어요.”
“그러니 내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거죠.”
“그녀는 당신을 모르던데요?”
“제가 알리지 않았으니까요.”
“불법 점거중이에요?”
“그렇담 신고할건가요?”
그렇게 말하고 웃는데, 와 이런 얼굴이면 그래 네가 살인을 했어도 일단 이유나 들어보자 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도 전 왕자님이 세실 앞에서 그랬듯이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다시 물었습니다.
“혹시 얼굴을 무기로 범죄를 일삼는 분이세요?”
리암이 다시 웃었어요.
“칭찬으로 받아들이죠.”
“이해가 안 돼요.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일어나는 법이에요, 코델리아. 당신도 그런 것들을 좋아하잖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럴 것 같아 괜히 아는 척 해봤어요. 맞췄다니 기분 좋네요.”
선문답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심정이었죠. 그때 등 뒤에서 누가 제 이름을 불렀어요.”
“코델리아!”
“가렛?”
어미 잃은 염소처럼 갈라지는 목소리로 절 찾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가렛이었어요. 제 옆자리에 앉는 우리 출판사 직원인데데 저보다 한달 먼저 들어왔으면서 제 사수라도 되는 양 하나부터 열까지 참견하려고 드는 사람이죠.
“종이 떨어졌네요.”
리암은 입구 쪽으로 가더니, 떨어진 종을 줍더라고요. 어쩜 그 손짓 마저도 그렇게 우아한지! 종이 없어서 가렛이 그렇게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우린 눈치도 못채고 있던 거였어요. 가렛은 떨리는 목소리로 제게 묻더군요.
“불법점거..? 지금.. 너 무슨 말 한거야?어? 코델리아? 말해봐!”
자기가 내 뭐라도 되는 듯 제게 윽박지르는 것이 참 꼴 사납더군요.
전 가렛에겐 아무것도 설명하고 싶지 않았어요. 일단 저도 당장 어찌된 영문인지 파악도 안되었고요.
“저 작자가 널 가지고 논거지?”
“그런 게 아니야.”
“지금 그런 이야길 하고 있었잖아. 이 가게 오늘 문 안연다고? 가게 주인이 저 사람을 모른다고 했다고? 코델리아, 대체 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건데?”
“가렛 클래포드, 넌 왜 여기 왔는데? 그만 가. 내가 얘기 끝내고 가게.”
“그러게 내가 같이 간다고 했잖아.”
“내가 싫다고 했지.”
“이리와.”
가렛이 내 핸드백을 붙잡고 절 끌더라고요. 그런데 거기에 제 머리가 걸린거예요.
제가 아, 하고 소리를 내는데도 가렛은 막무가내로 절 끌고 갔어요. 리암이 그걸 보고 풀어주러 옆에 왔더니 가렛은 갑자기 핸드백을 버리고 미친 사람처럼 리암에게 달려들었어요.
덕분에 전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리암은 한바탕 당할 게 뻔했어요. 가렛은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덩치가 제법 있거든요. 저는 눈을 질끈 감았죠.
그런데 저쪽에서 아아, 하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눈을 떴더니, 가렛이 꼼짝 없이 리암에게 잡혀 이ㅣㅆ더라고요. 팔을 양 뒤로 하고 펄떡거리면서요.
리암은 키는 훤칠했고 어깨도 꽤 넓었지만 전체적으로 무게가 좀 있다기 보단 슬림하고, 매끈한 체격이었죠.
그런데 땅땅한 가렛을 저렇게 한번에 제압하다니, 리암이 조금 달라보이더군요.
아름다운 얼굴에 홀리긴 했지만, 남성적인 매력이 있는 편보다는 좀 부드럽고 유순한 바람둥이 스타일에 가깝다고 생각했거든요. 왕자님, 당신처럼요.
아무튼 그렇게 리암은 가렛을 제압하고는 그의 귓가에 뭐라 속삭였어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가렛은 흠칫 놀라더니 몸을 떼더라고요. 더 때리거나 몸을 꺾거나 하지도 않았어요. 그저 잠시 잡아 두었다, 풀어주었을 뿐이죠. 손으로 나비를 잡았다 날려 보내는 것처럼요.
그토록 비폭력적으로 남의 육체를 제압했다 놓아주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죠. 가렛은 우물쭈물하더니 저한테 작별 인산지 뭔지 모르겠는 말 비슷한 걸 던지고 바로 달아났어요. 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었어요.
전 리암을 쳐다봤어요. 리암도 절 바라보았죠. 리암이 제게 물었어요.
“같이 좀 걸을까요?”
“저한테도 가렛한테처럼 할 거예요?”
리암이 웃다 말고 정색을 하며 말했죠.
“손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을게요.”
손끝 정도는 건드려도 되는데요.
...라는 말을 삼키고 전 고개를 끄덕였죠.
리암은 불법 침입자 주제에 불도 잘 끄고, 열쇠로 가게 문도 철저히 단속하더니, 저와 함께 포토벨로 거리로 나왔어요. 전 다시 입을 열었죠.
“저는 처음엔 당신이 상자에 무슨 장치라도 해놓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우리 집을 불법 침입했다고도 생각했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아니요. 그런데 상점에 불법 침입한 것을 보니 갑자기 다시 의심스러워지긴 해요.”
리암이 다시 웃었습니다.
“그렇게 웃으면 다 넘어가니까 좋겠어요.”
“그 정돈 아니에요.”
“지금 전 당신이 다른 세계에서 온 마법사라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해요. 마력이나 매력이나 그게 그거 아니겠어요?”
“그것 역시 내가 아주 매력적이라는 칭찬으로 받아들이죠.”
“맞아요. 그런 칭찬이었어요. “
“코델리아, 당신도 꽤 매력적이에요.”
“그런 말 들으려고 한 칭찬은 아니에요.”
“알아요. 여기 자주 와요?”
와, 그는 말 돌리기에도 선수였어요. 그렇게 전 또 노팅힐이나, 포토벨로에 대해서 한 5분은 수다를 떨었어요. 한참 후에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논점으로 돌아와 이렇게 물을 수 있었죠.
“아마 당신은 앤 셀린 작가가 고용한 잘생긴 하인 같은거겠죠?”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신선한 시각이군요.”
다시 한번, 선문답 같은 대화를 하는 동안 우리는 노팅힐 사이드에 도착했어요.
“전 여기에서 센트럴 라인을 타야해요. 우리집까지 따라올건가요?”
“밤이 깊었는데 데려다 드려야죠.”
그는 꼭 왕자님처럼 우아하게 말하더군요. 가렛이 그런 말을 했다면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고 나 혼자 집에 가는 길은 안다고 했을 거에요. 하지만 전 그와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어요
우린 센트럴라인으로 가는 튜브를 탔어요. 튜브는 지하로 가는 긴 차인데, 빠르긴 하지만 그 안은 아주 눅눅하고 습기차고 더럽고 답답해요. 오늘은 비까지 왔으니 평소에 나던 퀴퀴한 곰팡이 냄새에 비비린내가 더 해졌죠.
전 늘 그렇듯 자리에 앉지도 않고 창가에 섰고, 리암은 제 맞은편에 서서 저를 봤어요. 근데 갑자기 회색 튜브 안에 연초록색 잎사귀가 하나, 둘 , 셋 피어났어요.
아치, 그런 적 있으세요?
누군가와 걸어가는데, 그 길에 꽃이 피어나는 거예요.
열일곱 살에 첫사랑과 걸으며 처음 느꼈던 감정이죠. 하지만 그 길은 진짜로 꽃길이었다고요.
런던의 회색 튜브에서 이런 기분에 사로잡히는 건 처음이었어요.
창문 하나 열려있지 않은 지하의 회색 상자에 갇혀있는데 갑자기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왔어요.
저는 캄캄한 창문만 응시하는 척 하다가 곁눈질로 그를 보았죠.
제가 눈을 돌릴 때마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어요.
글쎄, 눈도 돌리지 않더라고요!
왜 그러는 걸까요, 정말.
잘생긴 사람들은 대체 왜 그렇게 뻔뻔하냐고요.
곧 러셀스퀘어 역이라는 방송이 나왔고 전 말했어요.
“갈아타야해요. 홀본까진 한정거장 더 남았거든요. 아니면...”
“아니면 걸어갈 수도 있죠.”
“어떻게 할래요, 리암?”
“코델리아 당신은 그냥 걸어가는 걸 좋아하잖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나랑 같이 있으면 여자들은 늘 더 걷겠다고 하더군요.”
리암은 그렇게 말하고는 제가 말하고도 우스웠는지 피식 웃더라고요. 역시, 그렇게 잘생겼는데 자기가 잘난 걸 모를 린 없겠죠.
“여자들이요? 여자들이 많았어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만 연애엔 재주는 없는 편이에요.”
“저도 그래요! 저도 연애에는 젬병이거든요! 어? 그게 무슨 표정이에요? 지금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려고 했죠?그런 말은 실례되는 말이에요.”
“...코델리아, 저 아무말도 안했는데요?
네, 저는 신이나서 분수대처럼 나오는 대로 맘껏 떠들었고, 리암은 친절하게도 제 주책을 모두 받아주었습니다.
집까지 가는 길이 10분 밖에 걸리지 않는게 아쉬웠어요. 별 말도 하지 않는데 매 순간이 즐거웠지요.
꼭 얼굴이 잘생겨서 뿐만은 아니었어요. 그냥 리암이랑 있으니까 편했어요. 아주 오래된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요.
믿어지세요?
그렇게 잘생긴 사람이랑 있으면서 편할 수 있다는 게요.
러셀스퀘어에서 홀본으로 가는 길엔 크고 작은 고건물들이 가로수라도 되는 양 우리가 가는 길 양 옆으로 펼쳐져있었죠. 사람도 많았는데, 이상하게도 둘 밖에 없는 것 같더군요.
비가 그치고 나니 날씨는 부쩍 선선해져 조금 춥게까지 느껴졌어요. 살짝 몸을 떨자 리암은 바로 제 외투를 벗어 주었어요.
집이 가까워져 왔을 때야 저는 퍼뜩, 원래 목적이 원고였다는 게 생각나서 얼른 그에게 원고를 건네 받고는 습관처럼 봉투를 열어 원고를 확인하려 하는데 그가 막더라고요.
“왜요, 보면 안 돼요?”
“이따가 보세요.”
“지금 보면 안되는 이유가 뭔데요?”
“편지를 받을 거잖아요. 그 편지가 시시해지는 건 싫어요.”
“원고를 먼저 읽으면 편지는 재미없어져요?”
“아마 그럴걸요. 다 똑같은 내용이니까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가 모르는 게 뭘 것 같아요?”
“그러게요, 리암. 모르는 게 대체 뭐예요?”
“당신에게 내가 아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하는거요.”
“정말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네요.”
그가 웃었습니다. 왕자님, 사실 전 이런 류의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뭐라도 숨겨놓은 것처럼 말하는 사람, 한 마디 한 마디 여운을 남기고 명징한 울림이라도 주려고 하는 사람들이요.
그것보단 그냥 ‘남자애’가 좋아요. 순수하게 웃을 줄 알고, 땀흘리고, 엄청 빨리 달리고, 떨면서도 바로 손을 잡는 남자애요. 그런데 리암은.... 아 왕자님 제발, 그냥 잘생긴 얼굴에 넘어간거 아니냐고 하지 말아요.
리암은 일부러 내게 무언가를 숨기려는 것 같진 않았어요.
그래서 전 선문답 같은 대화가 이어져도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고요.
“내가 맞춰볼까요?”
“뭘요?”
“당신은 마법사의 쫄따구예요.”
“쫄따구요?”
“네. 앤셀린과 같이 여기에 넘어 온거죠. 그래서 앤 셀린 마법사의 쫄따구 역을 하고 있고, 뭔가 여러가지 조건이 많이 걸려서 저한테 더는 말할 수 없고.”
“그리고요.”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잘생겼네요.”
리암이 박장대소했어요.
“맞아요. 거의 맞췄어요. 어마어마하게 잘생겼다는 부분에서 점수를 더 드릴게요.”
“정말요? 아, 그러니까 앞부분도 맞춘거예요. ”
“네. 뭐, 약간은요. 코델리아, 다음엔 내가 더 알려줄 수 있었음 좋겠어요.”
“그럼, 다음이 있는 건가요?”
제가 너무 구질구질했나요? 하지만 안 물어볼 수가 없었어요.
“네. 당신만 허락하신다면 다음이야 끝없이 있죠. 그럼 잘 들어가요 코델리아.”
“잘 들어가요. 리암.”
차가운 바람이 그와 내 사이를 스쳤어요. 닿을락 말락, 손 끝이 스친 것도 같아요.
전 아, 정말 약속대로 손 끝 하나 건들지 않네 하고 생각했어요. 내심 헤어지는 인사 삼아 볼에 뽀뽀 정도는 하지 않을까 기대했거든요. 리암은 끝까지 그냥 손만 흔들더군요.
아까 마크랑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뭔가 묘한 감정이 되었어요. 리암이 그랬더라면 나는 그냥 키스를 했을까. 아니 리암은 절대 안 그럴 사람이지 그래서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을 하지.
복잡한 생각을 떨치며 머리를 흔들고 이층으로 올라가 얼른 창문을 열어보았어요. 창문 여는 소릴 들은 건지, 리암이 날 올려보더라고요.
“잘 가요, 리암.”
“잘 자요, 코델리아.”
그리고 그는 등을 돌려 걸어나가기 시작했어요. 전 리암, 하고 작게 그를 불렀어요. 갑자기 물어보지 못한 것이 생각나서요. 리암이 돌아보았죠.
“제일 좋아하는 셰익스피어 작품은 뭐예요?”
“십이야요.”
“리어왕이 아니고요?”
내 이름이 리어왕의 주인공 ‘코델리아’에서 나온 것 때문에 하는 농담이란걸 알아듣고 그가 웃었죠.
“난 행복한 결말을 좋아하거든요.”
아까 마크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봤어요.
‘슬프지 않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 말이 더 멋드러졌던것은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리암이 내게 물었어요.
“코델리아, 당신도 가르쳐줘야죠.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셰익스피어는 뭔데요?”
전 웃으며 대답했죠.
“‘뜻대로 하세요’요.”
리암은 말 없이 씩 웃더라고요.
아, 왕자님. 그 웃음엔 정말 모든 것이 다 담겨져있었어요.
어떤 여자라도 반할 만한 능구렁이 같은 능글맞음에다 더해 소년의 순수함까지도요.
차라리 리암이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게 아니에요. 정말로 내가 뜻대로 하면 어쩌려고요?’ 같은 말을 했더라면 좀 징그럽기라도 했을텐데, 그는 미소 한 방으로 절 바로 사로잡았어요.
전 괜히 제 발저린 사람처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습니다. 제 빨개진 얼굴이 가로등 불에 다 보였을텐데도 그는 별 말 없이 이렇게만 말했습니다.
“뜻대로 하고 싶지만, 오늘은 이만 물러갈게요.”
돌아서는 그를 다시 한 번 불러세운 것은 이번에도 못말릴 저였습니다.
“리암!”
“네, 코델리아.”
“왜 나를 집까지 데려다줬어요? 어차피 아무것도 얘기해주지 않았으면서요.”
그가 뭐라 대답했는지 짐작하시겠어요, 아치?
리암은 딱 이렇게 말했어요.
“그냥 당신과 좀 걷고 싶었어요.”
..마치 그와 걷고 싶어했던 그 수많은 여자들처럼.
그는 나와 좀 걷고 싶었다네요.
다행히 아직은 제 심장도 무사합니다.
-연초록달의 코델리아.
==========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이번편은 분량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편지 한통을 어떻게 두 편으로 자르나요.
이게 다 코델리아가 말이 많아서예요..
추신: 추천을 꾹 누르시고 나머지 8개의 글을 보러 가주세요! 언제나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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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