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13화 (13/56)

#13.

아치에게

엄청나게 긴 편지를 썼다가 구겨버렸어요.

다시 읽으니 너무 구구절절하더라고요.

부끄러운 마음으로 다시, 짧게만 전해보려합니다.

어제 당신이 준 금장 책을 사러 마크 로플린이라는 유명 고서적 수집상이 우리집에 왔어요.

잠깐의 대화와 점심 끝에 그는 우리집까지 날 데려다주었죠. 집 근처를 산책할 땐 꽤 괜찮은 분위기기도 했답니다.

오후엔 앤 셀린 작가님께 원고를 받으러 포토벨로에 갔다가 다시, 리암을 만났어요. 리암은 절 따라온 가렛이라는 귀찮은 출판사 동료를 단번에 제압했어요. 지난번엔 그저 잘생긴 요정님인 줄 알았건만, 그런 모습을 보니 좀 색다르게 느껴지긴 했어요. 리암 역시 절 집 앞까지 데려다주더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갑자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설레는 연초록달 밤. 코델리아.

* * *

바람둥이 코델리아에게

그래서 당신의 선택은 누구예요? 마크, 리암?

-아치

* * *

윈저튼 최고의 망나니 아치,

당신같은 바람둥이에게 ‘바람둥이’의 칭호를 얻다니 영광이네요. 제가 말만 안했다 뿐이지, 사실 앤셀린 작가님은 설정집에 당신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도 상세히도 풀어놓았거든요.

평화주의자 독서광 뺀질이 왕자님, 사실 당신이 제일 잘하는 건 여자꼬시기 잖아요?

다프네, 페넬로페, 줄리, 제인, 엘로이즈...

당신이 울린 여자들 이름만 한 다스를 알고 있는걸요?

그 중 누가 진짜 당신 사랑이었는지도 헷갈리네요.

어때요, 아치? 전문가인 당신의 견해에 비추어 두 남자에 대한 의견을 들려주세요. 둘 모두 절 좋아하지도 않는데 저 혼자 이렇게 설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요.

추신: 방금 줄리엣이란 친구랑 잠깐 전화 통화를 했어요. 리암과 마크에 대해 말했더니 ‘했어?” 라고 묻던데, 당신이 줄리엣보다는 그래도 성숙하군요. 뭐, 크게 다르진 않지만 말예요.

6.12. 새벽. 바람둥이는 못 되는 코델리아.

* * *

바보같은 코델리아 그레이 양께.

당신한테 ‘바보같다’는 말을 하게 될 줄야.

당연히 둘다 당신을 좋아하죠.

-전문가 아치 올림.

* * *

대단한 난봉꾼 아치에게

그걸 어떻게 알아요?

-순수한 코델리아.

* * *

꽤 예쁜 코델리아.

당신을 누군들 안 좋아하겠어요? 나의 말 많은 필담 친구.

당신은 대화 나누기 꽤 재밌는 상대인데, 게다가 (스스로가 말하길)예쁘기까지 하다면서요?

당신이 내 앞에 있었더라면 나 역시 마크나 리암 뒤에 줄을 섰을 걸요.

게다가 두 사람 다 당신 집 앞까지 왔다고 했죠. 진지하게 좋아하는 것 까진 아녀도 마음은 어느 정도 있는 것이 분명해요.

추신: 나도 안물어볼 수가 없네요. 그래서, 했어요?

* * *

저열한 아치.

당신이나 줄리엣이나 아주 똑같네요. 당신의 저속한 물음에 대답해드리면 안타깝게도 전 처음 만나는 남자랑 자는 화끈한 여자는 못 된답니다. 그러기엔 생각이 너무 많거든요.

-코델리아.

* * *

코델리아.

잔다고요? 대체 무슨 이야길 하는거예요.

내말은…. 입맞춤을 했냐고요.

아치.

* * *

아치,

아, 키스요?

* * *

불경스러운 나의 벗, 코코

좀 재밌어지네요.

네, 키스요.

얼른 얘기해봐요. 두 시간 동안 열심히 기다렸는데 달랑 다섯줄짜리 편지를 보내다니.

내게 뭘 숨기고 있는거예요?

* * *

아치,

네, 키스. 키스말이죠.

마크는 사실 집 앞에서 저에게 성급한 키스를 하려고 했어요. 아직 해도 지기 전인데다 몇 시간 전에 처음 만나 점심 한 끼 먹었을 뿐인데, 전 좀 당황해서 얼른 몸을 뺐어요. 심지어 소리까지 질렀으니 그에겐 이제 연락도 안 올지 몰라요.

리암 역시 마크처럼 저희 집 문 앞까지 데려다줬는데 그는 정말 손끝 하나 대지 않더라고요. 손 정도는 잡아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좀 부끄러워진 코델리아.

추신: 내가 본 인물설정집에서 아치는 귀족집 여자애들이나, 작은 영지의 영주 딸을 꼬드겨, 정원에서든, 그들의 침방에서는 수도없이 ‘해대는’ 인물이었는데..... 혹시 그 하는 것은 다 ‘키스’였나요?

추신: 윈저튼 왕국은 당연히 결혼 전에는 ‘하면’ 안되는 보수적인 나라겠죠..? 아니면 왕자님이 저를 좀 놀리고 있는건가요?

* * *

저속한 코델리아.

네 놀리고 있는 거예요.

-아치.

* * *

얄미운 아치 앨버트 윌리엄.

날 놀리는 게 재밌나요?

-코델리아.

추신: 그래서 정말 안잤어요? 다프네랑도요? 제법 뜨거운 사이셨잖아요.

* * *

귀여운 나의 코코.

그럼요. 당신을 놀리는 것이 요즘 나의 가장 큰 재미입니다. 그건 그렇고 마크의 키스는 좀 성급했네요. 내 취향은 리암입니다. 손도 잡지 않았다는 건 좀 쪼다같지만 전 천천히 가는 편을 좋아하거든요.

추신: 당신이 가진 그 인물 설정집은 대체 뭐예요? 당신 질문은 너무 저속해서 대답해드릴 수가 없어요. 레이디 다프네 베넷 양의 명예가 달려있으니까요.

모든 레이디들의 명예와 입술의 수호자 아치 올림.

* * *

성스러운 아치 왕자님께.

여기서 성은 물론 성(sex)이 아니라 성(saint)입니다. 그래서 다프네랑은 키스만 입술의 수호자가 될 정도로 부르트게 했단 말이죠? 왕자님께서 그렇게 순수한 분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그리고 마크와 리암의 명예는 어쩌실건데요, 흥!

그런데 아치, 잠 안자나요?

혹시 오늘도 당신께 잠 못드는 밤이라면, 시집 말고 다른 책도 빌려드릴까요?

대답을 듣지 않고 일단은 보내볼게요. 두 권 모두 지난번에 빌려드린 〈맥베스〉를 쓴 작가, 셰익스피어 작품이에요.

사실요. 하나는 마크가 가장 좋아하는 책, 하나는 리암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고 해서요. 왕자님은 둘 중 어느 책을 더 좋아하실 지 궁금합니다.

6.12. 밤 12시의 책 추천자 코델리아.

* * *

나의 사랑스러운 책 공급자 코델리아에게

마다할 일 있나요, 얼른 줘봐요.

그렇잖아도 셜록 홈즈를 다시 읽어볼까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폭풍의 언덕은 세실이 빌려갔거든요. 광폭한 사랑의 시가 가뜩이나 잔인한 세실의 성정에 기폭제 역할을 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며 전 셜록이나 다시 읽고 있었어요.

계속 읽다보면 다음주부터 해야할 에드위나 공주 아들 수색대 일에도 도움이 될지 모르는 일이죠.

-연초록달 열 두번째 날, 밤샘 독서를 기대 중인 아치.

추신: 마크와 리암의 명예따위 제가 알게 뭡니까? 남자의 명예는 여자들의 수다에 희생되라고 있는거예요.

* * *

잔인한 코델리아에게

당신 문 옆에 버드나무 오두막을 지을 거예요.

그리고 메아리 치는 구릉마다 당신 이름을 노래할 겁니다.

수군대는 공기마다 ‘코델리아’ 하고 외치겠지요.

오, 당신은 쉬지 못할 걸요.

...어때요, ‘십이야’의 대사를 따라해봤는데 좀 비슷한가요? 우리가 필담이 아니라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당신도 내가 훌륭한 왕자이기 전에 재능있는 배우라는 것을 알아주었을텐데 말예요.

이 책은 정말 엄청나게 재밌네요. 전 ‘리어왕’보단 이 책 쪽이 배는 더 좋습니다.

자, 제가 정말 아를리 궁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기 전에 빨리 다른 책을 내놓아요.

추신: 당신이 준 펜으로 쓰니까 편지에 더 아무말이나 지껄이게 되는군요. 좋은 걸까요? 어쨌든 당신이 매번 편지를 어떻게 그렇게 말하듯이 줄줄 쓸 수 있는지는 확실히 알았어요.

========== 작품 후기 ==========

읽어주신 분들께.

이게 바로 발췌글 사기라고...

네, 그 짧은 발췌글이 사실 이 긴 주고 받음 사이에 있었습니다.

또 분량 조절을 실패하여 이번편 보다 다음편이 깁니다.

재밌게 읽으셨다면 추천을 눌러주세요!

<-- 키다리 아저씨 -->

(연참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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