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14화 (14/56)

#14.

귀여운 나의 왕자님 아치에게

다시 출근해야하는 스트레스에 쌓여있다가 아침부터 왕자님 편지에 웃고 갑니다. 멋지게 십이야의 대사를 넣어 답장을 쓰고 싶은데, 지금 생각나는 건 ‘청어 피클은 정말 지랄 같다니까!’ 라는 구절 밖에 없네요. 아, 쉬다가 출근하는 날은 정말 청어피클 같아요.

아무튼 왕자님 요청대로 책을 한권 더 드립니다. 이번 책은 더 이상 셰익스피어가 아니에요.

이건 제가 소녀시절에 정말 좋아하던 책이랍니다. 제목은 〈키다리 아저씨〉 이고, 주디라는 이름의 고아 여자애가 보내는 편지글로만 이뤄진 글이에요.

소설 속 주인공 주디는 고아원 출신의 똑똑하고 유쾌한 소녀인데, 자신을 대학까지 보내주겠다는 후원자 ‘키다리 아저씨’를 만나 아저씨에게 자신의 대학생활을 편지로 보고해요. 워낙 말솜씨가 좋은 터라, 주디가 얘기해주는 대학생활 이야기 자체로 재밌는데 소설의 말미에는 설레는 로맨스마저 펼쳐진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책을 제 인생의 책으로 꼽는 것은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니에요.

사실 제겐 이 책에 감정을 이입할 만한 사정이 좀 있었요.

열 두살 때 엄마가 절 떠나고 나서부터 스무살때까지, 전 주욱 기숙학교에서만 자랐었거든요.

주디가 지낸 고아원이랑은 차원이 다르게 고급스러운 곳이었지만 그래도 처음엔 꼭 제가 꼭 고아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죠.

엄마가 '절 떠났다'고 말하면 보통 사람들은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어쩔 줄을 몰라하죠. 사람들은 그럴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 지 잘 알지 못하거든요. 왕자님도 그러실까 미리 말하면 저희 엄마는 죽지 않았어요. 그저 저를 떠나버리셨을 뿐이죠.

제가 열살 때, 그러니까 엄마가 절 떠나기 바로 직전에 엄만 절 앉혀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코코, 곧 엄마가 널 떠나 아주 멀리 갈거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거야. 그래도 엄마는 언제나 너를 사랑해. 언제 어디 있든 널 생각하고 있을테니 걱정말고 잘 살아가렴.”

전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 말에 겁을 먹어 우는 나이는 이미 지나있었고, 저희 엄마는 좀 독특한 분이었거든요.

한번은 공원에 갔는데 어떤 아저씨가 엄마랑 제가 앉아있는 벤치 가까이에 오더니 빨간 머리 여자들은 다 헤프다는 둥 뭐라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예요.

엄마는 딱하다는 듯이 그 아저씨를 쳐다보시고는 제 귀를 두 손으로 막으시더라고요. 그리고 아저씨를 똑바로 쳐다보고 이렇게 소리쳤죠.

‘왜! 내가 애가 옆에 있다고 욕을 못할 거 같아? 시발! 꺼져! 꺼지라고!”

그 아저씨는 엄마의 기세에 눌려 주춤, 뒷걸음질을 치셨어요. 엄마는 아주 조그마한 분이셨는데도 말이죠. 전 아직도 그 장면을 떠올리며 웃곤 합니다. (아치, 당신도 알아두세요. 귀를 꼭 막는다고 해도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지르면 다 들려요.)

엄마는 빈말은 잘 하지 않았지만 농담은 자주 했고, 다른 애들의 엄마랑은 아주 달랐어요. 정말 웃겼죠. 그러니 전 떠난다는 둥 하는 이야기도 다 웃자고 하는 소린 줄로만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며칠 안되어 정말로 엄마가 사라지셨어요.

저에겐 꽤 괜찮은 금액의 신탁자금이 남아있었고, 사는 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그래도 충격은 상당했어요.

사람들은 엄마가 젊은 남자를 만나서 절 버리고 떠났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사라져버리기 전 몇 번, 아주 젊은 남자가 엄마 곁을 맴도는 것을 보았다고요.

하지만 전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았어요. 엄마가 한번 집에 아주 많이 다친 남자를 데려온 적이 있었고, 그 남자가 회복될때까지 한동안, 우리 집에 딸린 차고 근처에서 지냈었거든요.

그러나 제겐 엄마를 둘러싼 온갖 소문들에 해명할 새도 없었답니다. 익명의 후원자가 절 맡기로 했다는 연락이 왔고 바로 기숙학교로 보내졌으니 말이죠.

충격이 가실 새도 없이 전 학교에 적응해야했어요. 그 시절, 그 나마 희망이 되었던 것은 한달에 한번씩 제게 도착하는 편지였답니다. 엄마가 제게 쓴 편지요.

왕자님, 전 그 편지가 정말 엄마가 쓴 것이라고 믿었답니다. 필체도 엄마의 것과 같았고, 내용도 엄마가 할 법만 이야기만 가득했거든요.

이를 잘 닦아라, 손을 꼭 씻어라, 방 청소를 잊지 말아라 같은 잔소리들만 사이에 수업이 정 지루하면 소설책을 껴어두고 몰래 보아라 같은 절대 다른 애들 엄마는 하지 않을 소리가 숨어있었지요.

그 편지는 장장 3년동안 계속 되었어요.

그 사이 저는 엄마가 날 두고 사라져버렸다는 충격을 극복하고 친구도 생기고 기숙학교의 생활에도 적응하기 시작했답니다. 가끔 후원자 분께 엄마에게 전해달라고 답장을 보내기도 했고요.

그리고... 열 다섯살이 되었을 때, 편지들이 엄마가 보낸 것이 아니란 걸 알게되었어요.

방학을 맞아 예전에 살던 마을에 갔다가 옆집에 살던 아주머니를 만났거든요. 아주머니가 말씀하셨어요. 너희 엄마는 좀 독특하긴 해도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고요. 사라지기 아주 오래전부터 사실은 많이 아프셨고, 어린 제게 아픈 자신이 짐이 되진 않을까 걱정도 많이 하셨다고도 말씀해주셨죠.

엄마는 꼭 늙은 개가 자기가 죽는 모습을 주인에게 보여주지 않고 숨어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숨어서 저 몰래 죽고싶었는지도 몰라요. 그것도 참 엄마다운 선택이거든요.

전 울 힘도 없이 터벅터벅 기숙사로 돌아와 여태까지 엄마가 보낸 것이라 믿었던 편지들을 펼쳐 놓았죠.

처음 몇 통은 진짜 엄마가 남기신 것 같았어요. 하지만 1년쯤 지난 후 부터는 필체가 조금 다르더라고요. 이전 필체를 흉내내려고 엔간히도 애를 쓴 글씨였지요.

엄마에게 이 편지를 남기고, 신탁자금까지 맡아주신 저의 후원자 분께서, 편지가 끊기는 것을 못참고 이렇게,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주신 것이란 걸 곧 알게되었어요.

처음 몇 시간은 괜히 배신감이 들더라고요. 절 두고 몰래 죽은 엄마에게, 그리고 엄마를 도와 절 속이는데 일조한 후원자 분에게요.

그런데 감정이 좀 가라앉고 나니 그저 고마웠어요.

엄마는 그렇게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어린 제게 엄마의 간병을 맡기고 싶진 않았던 거겠죠? 절 엄마 죽은 아이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후원자 분은...그분은 대체 누굴까요? 무슨 생각으로 엄마의 필체를 흉내내 매달 열심히 저에게 잔소리하는 편지를 보내셨던 걸까요? 그 심정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전 펜을 들어 그분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답장을 적었습니다.

[후원자님께

더 이상 엄마 필적을 흉내내서 저에게 편지를 보내주시지 않아도 되어요.

그동안 편지를 보내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 편지들이 제게는 큰 위로가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말 많은 제가 그렇게 짧은 편지를 적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제게 작은 상자 하나가 도착했어요. 후원자님이 보내신 거였죠.

전 그분이 저에게 길게 사정이라도 설명해줄 것을 기대했어요. 하지만 그분은 끝까지 자신이 누군지도 밝히지 않으시더군요. 하지만 항상 볼펜으로 휘갈겨 써있던 엄마의 편지와 달리, 이번 편지는 만년필로 쓰여있었어요. 엄마 악필과는 전혀 닮지 않은 그분만의 단정한 필체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잘 지내, 코코. 엄마는 영원히 널 사랑해. ]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그 순간 울컥 눈물이 났어요.

왜 그렇게 슬펐는지, 뭣 때문에 울었는지는 아직도 잘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아마 제가 세상에서 제일 많이 운 날일 거예요.

한참을 그렇게 울다가 상자를 다시 보니 그 안에 얇은 책 한권이 동봉되어있더군요.

그 책이 바로 〈키다리 아저씨〉였어요.

이제 당신도 제가 이 책을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아시겠지요?

아마 , 읽어보신다면 더 잘 알게 될거예요.

6.13. 새벽. 날라가는 글씨체의 코델리아.

추신: 십이야의 리암의 취향이었어요. 역시 금발머리 남자들이란! 행복한 연애 이야기만 좋아한다니까요.

추신2: 만년필 열자루와 볼펜 50자루, 노트 10권을 더 동봉해요. 당신만 즐겁지 말고 당신의 필경소 친구들에게 가져다주세요. 우리의 마법의 상자가 좀 더 커다라면 좋을텐데.

* * *

아침에 이 글을 볼 코델리아에게.

〈키다리 아저씨〉는 멋진 책이네요.

그러나 난 이 책보다 당신의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듭니다.

오늘 당신 편지는 나를 웃겼다가 울리네요.

책에 대한 감상을 뒤로 하고 오늘은 당신에게 이 한 마디만 하고 싶어요.

당신 엄마가 살아계시든 돌아가셨든 그분은 마지막 편지대로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겁니다, 나의 코코.

추신: 세실리아가 변경백과 함께 변방으로 떠났어요. 며칠 시간이 비는 동안 당신이 준 선물을 나눠주러 필경소에 다녀올게요.

연초록달의 열세번째 날 이른 아침.

-당신의 벗, 아치 앨버트.

========== 작품 후기 ==========

다시 독자님들께

솔직히 서간체 소설에 둘이 책 추천하고 있는 지점에서 언젠가는 키다리 아저씨가 나오겠구나 다들 짐작하셨죠?

추신: 작가의 말 쓰는 것이 재밌어서 연참 와중에도 계속 쓰는 사람은 저 밖에 없을까요...?

추천, 선작, 코멘트는 다음 작가의 말(?)을 쓰는 힘이 됩니다.

<-- 당신의 코코 -->

(연참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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