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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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코델리아 그레이 양께,
지난번엔 내가 실례가 많았어요.
다시 한번 책을 보고 싶은데 이번 주말에 만날 수 있겠어요?
당신에게 보여주면 좋아할 엄청난 물건을 찾았어요.
6.13. 마크 로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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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3-THU-12:20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이 운 좋은 아가씨야. 그래서 마크는 언제 보여줄거야?
장미 향이 칸막이를 넘어서 여기까지 풀풀 풍긴다!
추신: 메일 주소 왜 바꿨어? 발송실패 떠서 나몰래 퇴사한 줄.
* * *
06-13-THU-12:22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줄리엣,
퇴사는 무슨.
마크에 대한 저속한 호기심은 저리 제쳐두고 점심이나 같이 먹자. 가렛이 자기랑 내가 연애라도 하다 헤어진 것처럼 굴고 있어. 하루종일 말야! 점심시간 만이라도 이 분위기에서 탈출하고 싶어. 응?
추신: 그리고 마크랑 만나기로 한 거 아니야. 메일 한 번 주고 받았을 뿐이라고. 리암은 잊었어?
* * *
06-13-THU-12:24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코델리아,
리암은 꽃 같은 거 보내지 않았잖아?
그가 메일이라도 했어? 전화라도 했냐고!
난 장미 바구니를 열댓개나 보내는 남자 쪽이 마음에 든다.
게다가 티비에 나오는 사람이잖아. 마크 실물은 어때? 잘생겼어?
자세한 얘기는 점심 때 하자. 아니, 마크든 리암이든 둘 중 하나랑(둘 다도 괜찮고) 자기 전엔 얘기하지마. 자지도 않은 남자 얘기로 점심을 불태우진 않겠어.
새로 생긴 샌드위치 집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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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3-THU-12:30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좋아, 이따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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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델리아에게,
나보코프의 서명이 들어간 〈롤리타〉 초판본이에요.
당신에게 보여주면 좋아할 물건이란 건 이것이었어요.
사과하고픈 내 마음이 얼마나 큰 줄 알았죠?
그러니까 주말에는 날 위해 시간을 내요. 당신을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으니까.
6.14. 금. 마크 로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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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4–FRI-15:00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마크 로플린도 대단하다. 티비로 볼땐 이렇게 저돌적인 남자인 줄 몰랐네.
오늘, 어제 보낸 꽃만 해도 이백송이는 넘을 거 같아.
슬슬 그의 본업이 꽃집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야.
정말 남은 장미는 내가 가져가도 돼? 답장 안할거야, 코델리아?
* * *
06-14-THU-15:40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줄리엣, 제왕학이라는게 있는데 말이야, 거기에서는 밀고 당기기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니다 이따 저녁에 끝나고 맥주나 한잔 하자. 그때 얘기해.
* * *
코델리아,
거기 있어요?
-연초록달의 열 네번째 날, 아치 앨버트
* * *
아치볼트 왕자님.
네, 언제나 그렇듯 여기 있어요.
제가 보고 싶나요? 전 왕자님이 보고싶은데.
우리의 마법상자가 손을 집어넣어 잔이라도 하나 건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긴 지금 부슬 부슬 비가 내려요. 너무 적게 내린다 싶어 그냥 걷다 보면 어느새 옷이 흠뻑 젖어버리는 그런 비가요. 저는 이런 비를 좋아해요. 당신과 같이 맞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추신: 줄리엣이랑 한 잔 하고 와서 좀 취했어요. 글씨가 꼬부라져도 용서해줘요.
* * *
글씨와 외모는 반대라는 설을 믿게 만드는 코코,
당신 글씨에 대해선 안심해요.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도 늘 알아보기 힘들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오늘(사실은 바로 지금) 발견한 사실인데, 우리의 서책 보관함은 장소를 바뀌어도 제 구실을 하는군요. 실은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 당신께 편지했어요. 아, 하나 더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네요. 코델리아, 당신은 머리가 길어요? 무슨 색이죠? 눈은요? 얼굴은 정확히 어떻게 생겼나요?
-모험심 강한 아치 앨버트.
추신: 당신의 그 수많은 남자들은 어떻게 되었어요? 내가 소식 궁금해한다고 전해줘요.
추신2: 지금도 부슬비가 내리고 있다면 당신 좁은 방이 물에 넘치지 않게 창문 잠그는 것을 잊지마요.
* * *
겁없는 아치,
그러다가 영원히 편지를 주고받지 못하면 어쩌려고 서책보관함을 이동시킨 거예요?
어젠 그대로 고꾸라져 잠들어 버린 터라, 그만 당신 편지를 보지도 못했네요. 그 바람에 시의 적절하게 툴툴거릴 기회를 놓친 것이 몹시 유감스러워요.
이럴때보면 당신은 정말 나와는 다른 사람같아요. 난 마법의 상자를 책상에서 침대로도 들고가지 못하고 있는걸요. 혹시라도 위치를 조금 바꾼 탓에 당신과 편지를 하지 못하게 될까봐요.
이런 제가 너무 소심해보이나요? 하지만 그만큼 당신이 좋아요. 그러니까 당신이랑 이렇게 편지하는 것이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이제 마음대로 가구배치를 바꿔도(여전히 침대는 책상 옆에 붙어있을 예정입니다)되고 이사나 여행을 가도 되니까 말이에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곧 여행을 갈 것 같아요.
당신께서 궁금해하시던 제 연애전선에 이변이 생겼거든요. 간단히 보고하자면 마크란 남자가 며칠 째 직장이며 집을 모두 장미로 물들게 하고 있어요. 제 관심은 리암에게 쏠린 상태이지만, 나랑 주말에 에든버러의 망한 고서적 수집상을 구경하러 가자는 제안은 거절할 도리가 없었네요. 거기엔 내가 좋아할만한 소설들의 초판본이 가득할테니까요.
어쩌면 리암처럼 신기루같은 남자보단 마크가 저랑 더 잘 맞는지도 몰라요. 리암은 여전히 아무 소식 없거든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에요. 그는 제 메일주소는 커녕 전화번호도 모르니까요.
그래도 우리집 주소는 알고있잖아요. 그가 정말 마음이 있다면 마크처럼 꽃 수백다발을 안기는 것까진 아녀도 어떤 제스쳐를 보여줘야하는 것 아닐까요? 줄리엣이 그러는데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를 헷갈리게 하지 않는대요!
하지만 줄리엣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에요.
줄리엣은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읽고나서부터는 말버릇처럼 ‘그건 그 사람이 너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증거야, 버려!’ 라고 말하거든요.
게다가 제가 다음주에 마크와 여행을 갈거라고 하니 벌써부터 속옷을 사주겠다며 야단이지요. 전 당일치기로 다녀올 것을 은근히 마크에게 암시했지만, 줄리엣은 거기서 자고오지 않으면 마크는 목석이고 저는 완전 바보래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니, 말하지 말아요. 분명 당신도 줄리엣처럼 신이 나서 떠들어댈테니까요. 왕자님까지 제 속옷을 골라줄 필요는 없어요.
어쨌든 어제 술에 그렇게 취한 것은 줄리엣과 이런 이야기들을 하느라였답니다. 술에 취해서 한 말이긴 하지만 우리 마법 상자가 정말 손이라도 집어넣어 악수라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거예요. 가끔은 살아있는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화가 필요한 법이거든요.
하지만 아치, 너무 질투하진 말아요. 여전히 난 줄리엣과의 수다보다 당신과 손 아프게 떠들어대는 시간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니 어서 말해보세요. 그래서 지금 우리의 마법상자를 들고 어디로 가버린거예요, 이 경솔한 왕자님아.
-6.14. 저녁. 소심한 코델리아.
추신: 이제와서야 내가 어떻게 생긴지가 궁금한거예요?
* * *
술주정꾼 코델리아.
어쩌다가 내가 줄리엣에게 질투할 거라 생각한 거예요. 질투를 한다면 줄리엣이 아니라 마크겠죠. 어쨌든 당신 속옷을 골라줄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요. 왠지 오늘의 편지는 어제보다도 더 술냄새가 나는 것 같네요. 그래도 잔뜩 들떠서 휘갈겨 쓴 당신 글씨에서 설렘 묻어 나와 좋습니다.
그런데 마크란 남자, 좀 너무 저돌적인거 아닌가요? 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아까의 질투 얘기는 농담이었습니다. 질투고 뭐고 다 제하고 정말로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봐서 별로예요.)
지난 번에 키스때도 그랬어요. 그땐 더 말하지 않았지만... 세상에, 묻지도 않고 키스를 하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답니까?
하지만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를 헷갈리게 하지 않는다는 줄리엣의 말은 저도 동의합니다. 사람의 감정이란 것은 쉽게 감춰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나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눈빛만 바라봐도 알 수 있지요.
그래도 음, 제가 만약 리암이라 해도 아무 정보도 모르는 당신에게 다짜고짜 꽃을 산더미처럼 보내거나 당신 집 주소를 안다고 집앞으로 쳐들어가진 않았을 거예요. 글쎄요, 사랑은 좀 더 속살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고백해야하는 것 아닌가요?
물론 큰 거리에 서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랑한다고 외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마크 같은 치들이겠지요.) 저라면 그냥 천천히 당신을 알아갈거에요.
마크가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는 물었나요? 당신이 좋아하는 책은요? 당신이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좋아하는 건 아나요?
하나부터 열 까지 모두 알고 싶은 것이 사랑의 감정이라 난 믿습니다. 밤새 대화하고도 할 말이 더 남아, 그 설렘을 간직하며 잠드는 날들을 난 사랑합니다. 그렇게 무르익고 나서야 결국, 자백하듯이 사랑을 털어놓는, 나는 그런 순간을 사랑해요. 수백만송이의 꽃은 그 다음이지요. 그런고로 난 마크는 반대입니다!
...농담이에요, 코델리아. 그냥 당신의 큰 오빠인척 말해보고 싶었어요.
-오늘도 줄리엣과 함께 전문가인척 하는 아치 앨버트 윌리엄 렌다이크 올림.
추신: 당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는...필요한데가 있어서 그래요. 빨리 말해봐요. 최대한 자세히요.
-다급한 큰 오빠 아치-
* * *
친애하는 왕자님께.
저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아야만 고백할 수 있는거라면 아치, 당신을 제외하곤 아무도 내게 고백할 기회도 얻지 못하겠는데요?
어쨌든 거침없는 필체로 해주신 연애 조언들은 달게 받겠어요. 사랑에 대해 얘기할 떄 가장 생기 넘쳐보이는 걸 보면, 당신에게 제일 잘 맞는 직업은 어쩌면 연애 상담가 아닐까 싶네요.
어찌나 흥분하셨는지 제 큰 오빠 노릇을 하시느라 그만, 제가 뭘 물었는지도 까먹으셨잖아요.
그래서 지금 어디 계시는데요? 바보, 아치.
제가 잠깐 상상해 봤는데....
왕자님, 혹시 지금 다프네와 엘로이즈 들과 함께 시골 별장에서 여름 휴가라도 보내고 계신가요?
다프네가 왕자님을 붙들고 대체 요즘 어딜 가느라 밤마다 그렇게 격조하였냐고 물은거죠. 왕자님은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면서 요즘 어떤 여자와 편지를 하고 있는데 말야, 하고 떠벌리신 거예요.
다프네는 그 요염한 입술로 물었겠죠.
‘누군데 그렇게 왕자님의 시간을 많이 빼앗았나요? 저보다 예쁜가요, 아치?’
거기서 왕자님은 아뿔사 싶었던 거예요. 제가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고 계셨으니까요! 그래서 드디어 저에게 뒤늦은 질문을 하고 계시는거죠. 빨리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이런 상상을 하는 건 너무 재밌단 말예요.
-삼각관계 매니아 코델리아 올림.
추신: 제가 다프네를 질투하고 있냐고요? 암요, 그렇고 말고요. 질투는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감정인 것 같아요.
* * *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계신 코델리아 양께.
당신의 기대를 깨서 미안하지만
맹세코 아니에요.
난 연애에 있어서는 고전주의자예요.
꽃다발을 보내기 전에 무얼 젤 좋아하는 지부터 알아야하고,
키스를 하기 전에는 해도 되는 지부터 물어야 하는 사람이지요.
그러니 다른 여자들 앞에서 당신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떠들어 댈 일은 없을 겁니다.
내 앞에는 노엘이라는 쪼그맣고 무서운 여자애가 날 노려보고 앉아있을 뿐이고요. 그러니 질투를 하시려거든 얼굴도 가물가물한 다프네가 아니라 노엘에게 해주세요.
-성실한 당신의 벗, 아치 앨버트
추신: 전 거의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어요.
========== 작품 후기 ==========
재밌게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네, 가렛의 메일 발송실패는 코델리아가 차원이동을 해서가 아니라 그저 메일주소를 바꿨기 떄문이었습니다. ...실망시켜드렸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뭐 언젠가는 만나겠지요. 키워드가 로맨스인데..?
추신: 선추코 감사합니다! 기계적으로 쓰는 것 같지만 정말 쓸때마다 하늘을 보고 감사함을 느끼며 울컥해서 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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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