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나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코델리아 양께.
당신의 기대를 배반하고 베데르에게 준 책을 먼저 넘겨보아 미안합니다.
하지만 내가 당신 말을 지킬 것을 기대했더라면 책이 아니라 다른 것을 주었어야죠.
적어도 포장이라도 해서 주었으면 뜯어보지는 않았을텐데! 나는 완두콩을 아래 깔아두고 여덟개의 침대를 쌓아도 맨 아래 완두콩이 배겨서 잠 못드는 옛 이야기 속 공주처럼 예민하다고요. 책을 손에 든 순간, 바로 그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다는 걸 느꼈는걸요.
어쨌든 신의를 져버리고 당신이 베데르에게 보내는 편지를 미리 읽은 것은 사과합니다. 그러나 당신도 나 몰래 베데르와 내통하려 했으니 할말은 더 없겠지요?
코코 당신이야 원래 장난기 가득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곰같은 베데르 양반, 역시 속은 여우같은 구석이 있다니까요. 그 충직한 눈빛을 하고는 나 몰래 당신과 이런 음모를 꾸미고 있을 줄야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이렇게 사건이 모두 발각된 이상, 노엘이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도 전해드리지 않을 수 없겠어요. 편지라기엔 글 하나 없이 그림만 그려있지만 그래도 그림 밑에 당신 이름이 적혀 있긴 합니다.
벌써 필경소 앞에서 지낸게 오년 째인데, 얘는 왜 아직 글을 모르는 걸까요? 그래도 그림엔 제법 재능이 보이지 않습니까? 이 나이에 이정도로 그린다면 천재화가로 클 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나의 작은 천재 노엘이 보낸 그림이 마음에 든다면 부디 실컷 칭찬해주세요. 노엘은 이제 당신을 나보다도 더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요. 여태까진 저한테만 그려주던 그림이었는데, 허무함이 이를 데 없네요.
그래도 당신을 질투하거나 미워하진 않겠습니다, 고약한 나의 코코. 당신은 아치 왕자님을 ‘너무 너무 좋아’ 하니까 말이죠.
추신: 노엘이 날 좋아하는 건 나도 알았어요. 내가 가끔 눈치 없는 척을 하긴 하지만 원래 그렇게 눈치가 없진 않다고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봅시다. 대체 어떤 여자가 나에게 안 반하겠냐고요. 일곱 살짜리라고 해도 여자는 여자란 말이죠.
6.17. 새벽, 아치 앨버트.
* * *
코델리아에게
화났어요?
노엘이 당신 그림도 그려주었는데요?
베데르가 쓴 답장도 줘야하는데요?
아니면 마크와 여행을 갔다가 우리의 서책 보관함을 두고 온겁니까?
코델리아?
연초록달의 열 여덟번째 날 저녁.
-당신 답장을 기다리는 죄 지은 아치 앨버트.
* * *
이틀 째 묵묵부답인 나의 벗 코델리야 양께.
마크와의 여행 때문에 정신이 없는 거면 이해하죠.
하지만 우리의 마법 상자를 머릿 속에서 지워버리진 말아요, 코코.
당신은 잊지 말아야해요. 아닌 척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집착하고 있단 사실을요.
그러게 왜 나한테 폭풍의 언덕 같은 걸 보여줬어요?
집착의 대가, 히스클리프를 보고 나니 나 역시 사랑의 가장 매력적인 영역은 집착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렸잖아요.
연초록달의 열 아홉번째 날 새벽 당신의 벗, 아치.
추신: 편지를 쓰다 말고 갑자기 생각났네요. 그래, 마크와의 여행은 어떻게 됐어요?
* * *
아치 앨버트 왕자님께.
당신은 정말 여자 맘을 잘 아네요.
누구도 당신에게 하루 이상 화내고 있긴 힘들겠어요.
사실 16일엔 당신 말대로 마크와 여행 다녀온 동안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조금 바빴고, 17일엔 당신이 내게 미안하다고 보내는 편지들이 귀엽길래 하루만 더 화난 척 하며 조금 더 두고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결국 당신의 집착 이야기에 참지 못하고 이렇게 답장을 하네요.
자, 날 더 기쁘게 해봐요, 왕자님.
정말로 나한테 집착해요?
6.18. 밤. 코델리아.
추신: 노엘의 귀여운 그림도 절 못참고 튀어나오게 한 요소 중 하나였네요.
베데르들에게 미안하지만 지난 번에 만들어주신 채식 그림과 금 책갈피의 여신같은 여인보다 노엘의 그림과 저와 더 닮은 것 같아요. 노엘에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 * *
밀고 당기기 선수 코코
난 여자 맘이 아니라 당신 맘을 잘 아는거죠.
폭풍의 언덕을 제일 좋아하는 책으로 꼽는 것부터 당신이 집착의 광팬일 것이란 건 짐작했는걸요.
노엘의 그림 이야기를 언급해주어 고마워요. 이 쪼그만 아이는 이제 완전히 당신 쪽으로 돌아선 듯 합니다. 당신의 칭찬에 나한테도 잘 보여주지 않는 천사같은 미소를 짓더라고요. 노엘은 눈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어 꼬마애 주제에 세실리아가 화날 때가 생각날 정도로 근엄한 생김새를 가졌거든요. 가끔 날 째려볼때는 나도 모르게 움찔 할 정도라니까요.
하지만 오늘처럼 환하게 웃을 때면 정말이지 이 아이에게 세상 전부를 다 가져다주고 싶어진답니다.
어쨌든, 당신의 편지를 다시 받게 되어 전 행복합니다.
집착과 밀고 당기기의 대가 코델리아 그레이양, 이제 마크 이야기 해줄거예요?
-필담 벗에게 연애 상담사가 될 자질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는 아치 앨버트.
추신: 당신도 거짓말을 잘하는 것 같아요. 당신이 연애를 못한다는 말, 이제 더 이상 믿을 수 없네요.
* * *
아치 앨버트 윌리엄 렌다이크 엘링턴 윈저튼 왕자님.
당신과 거리를 두기 위하여 이름을 길게 부르고 있는 중인 코델리아입니다.
얼른 베데르가 내게 쓴 답장이나 주세요.
마크 이야기는 내 편지를 함부로 본 벌로 왕자님께는 하지 않을 셈이니까요!
-그냥 코델리아(여전히 당신의 벗이긴 합니다.)
추신: 어떻게 이 긴 이름을 다 외우세요? 혹시 어디 써가지고 다니세요?
* * *
여전히 나의 벗인 코델리아.
그래봤자 소용없어요. 난 이미 당신이 나를 ‘너무너무 좋아한다’ 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당신이 긴 이름을 모두 부르며 거리를 둔다고 해도 기죽지 않으렵니다.
빨리 이 큰 오빠에게 털어놔봐요, 코코.
당신이 마크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베데르의 답장을 줄게요.
추신: 당신이 잊을까봐 말하는데 나는 제왕학을 무려 한달이나 배운 몸이랍니다.
-협상의 달인, 아치 앨버트 윌리엄.
추신: 네, 이름은 작은 종이에 적어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 까먹을 때마다 찾아봅니다.
* * *
아치 앨버트 윌리엄 전하,
알았어요. 그냥 이야기할게요. 대신 그놈의 ‘너무너무 좋아한다’ 로 놀리는 건 이제 그만 하기로 해요.
마크랑 있었던 일은... 음...
사실 별 것도 아닌 얘기예요. 에든버러까지 가는 길 내내 마크는 혼자 떠들었고, 고서적 수집상에 가서도 열심히 자기가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했어요.
그 얘기들은 꽤 재밌었지만 그는 단 한번도 내게 ‘코델리아,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책은 뭐예요?’ 라고 묻질 않더라고요. 그렇게 물었다면 전 폭풍의 언덕이나 키다리 아저씨 얘기를 했었을테고, 그럼 우린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예요.
마크는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도 묻지 않았지만(마크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는 알아요. 연어를 못 먹고 남부식 감자요리를 좋아한다네요.) 제법 근사한 식당에는 데려갔답니다. 만약 당신의 연애조언이 없었더라면 전 그럭저럭 그 시간을 즐겼을 수도 있었을텐데, 음식을 먹는 내내 아치, 당신의 말이 떠오르더라고요.
'코델리아, 마크가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는 알아요?’
네, 마크는 아직도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모른답니다. 그는 제게 묻지 않았고, 저는 그에게 말할 기회가 없었거든요.
마크는 이틀 내내 정말 많은 말을 했지만, 내가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은 단 한마디였어요.
당신이 전에 내게 했던 말이요.
‘당신 얘기를 해봐요.’ 라는 말.
어때요, 이런 별 것 아닌 얘기에 베데르의 편지를 건 것이 아까운가요?
어쨌든 내가 연애를 잘할 거라는 것은 당신의 착각이에요. 남자에게 내 얘기를 묻게 하지도 못했으니까요.
추신: ‘그러게 내가 그랬지. 걘 아니라고.’ 같은 말은 하지말아요.
추신2: 여전히 리암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를 생각하느라 마크에게 집중하지 못한 내 탓도 있는 것 같아요.
* * *
가엾은 코델리아,
그래서 안 잤어요?
-줄리엣에게 한 수 배운 아치.
추신: 방금 건 침울해진 당신을 웃기려고 한 농담이에요.
마크랑 그렇게 되어서 유감이에요. ‘그러게 내가 그랬지 걘 아니라고’ 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그저 제가 그 말을 하고 싶은 걸 얼마나 꾹 참고 계시는지만 알아주세요! 그리고 당신이 그에게 당신 얘기를 묻게 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하지말아요. 그냥 그 자식이 제 할말만 하는 머저리인 거니까.
추신2: 당신의 우울함을 날려드릴 베데르의 편지를 동봉합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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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