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18화 (18/56)

#18.

코델리아 아가씨께.

베데르 랭입니다.

편지를 아치 왕자님께 빼앗겨버린 것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가씨께서 아치 왕자님을 그리 믿으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애초에 서책보관함을 가지고 홀랑 나른 분이지 않습니까? 우리 왕자님이긴 하지만 손버릇이 아주 고약하답니다.

그러나 우리의 비밀이 발각되어 이렇게 당당히 서신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특히, 물어봐주신 서책보관함에 대해서 제가 해드릴 얘기가 있지요.

이 마법의 상자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 같은 것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 서책보관함은 윈저튼 왕가와 분명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상자를 처음 수도원으로 가져오신 것이 에드위나 공주님이니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설명하려면 먼저 30여년 전에 벌어진 로이틀링엔 제국과 윈저튼 왕국 사이의 전쟁 이야기부터 하지 않으면 안되겠네요.

저희 윈저튼에게는 뼈 아픈 역사이지요. 윈저튼은 완전히 참패했고, 그것도 모자라 우리 왕자님, 에드윈 공이 목숨을 잃으셨지요. 선왕 알프레드 폐하께서는 왕자님의 잘라진 목, 시체라도 찾기 위해 제국의 황제 앞에 무릎을 꿇으셔야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뻔뻔한 제국은 휴전의 대가로 에드위나 공주님을 요구했습니다. 왕자님이 돌아가시고 유일하게 남은 후계자인 에드위나 공주님을 볼모로 10년. 너무한 일이었지만 당시의 윈저튼으로서는 거절할 도리가 없었답니다.

코델리아 아가씨, 혹시 군사학을 잘 아시나요?

저야 수도원에 묻혀 사는 사람이라 그런 것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볼모로 데려간 왕족은 그래도 어느정도 예우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은 들었지요. 하지만 로이틀링엔 제국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에드위나 공주님과 함께 제국으로 건너간 시녀와 시종들의 대부분이 죽고, 겨우 반 정도 되는 수만 돌아온 것을 봐도 제국 안에서의 에드위나 공주님의 삶이 어땠을지는 짐작이 가시겠지요.

그러나 선왕 폐하께서도 우리 윈저튼의 국민들도 모두 에드위나 공주님이 그렇게 힘들게 지내고 계시라는 것은 미처 몰랐답니다. 공주님께서는 한달에 한번씩 보내는 서신에 언제나 로이틀링엔을 아주 즐겁고 흥미진진한 곳이라고 써두셨고, 그 편지가 어찌나 발랄하던지 당시 폐하께서는 공주님이 로이틀링엔을 너무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셨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모든 사실이 밝혀지게 된 것은 에드위나 공주님이 볼모로 가시고도 3년이 지난 시점이었어요. 밝혀지게 된 계기는 정말이지 너무도 공주님 다웠죠.

어찌된 일이냐고요?

글쎄, 저희 윈저튼이 제국으로 보낸 대신이 공주님을 알현하고자 했는데, 공주라 불러온 여자애가 얼굴굴이며 머리까지 모두 베일로 다 가리고 벌벌 떨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공주님은 작은 체구에 연약한 소녀긴 했지만 언제나 강단있고 대범한 분이었거든요. 볼모로 3년을 고생했다고 한들 그리 떨 분은 아니시라 이겁니다. 대신으로 간 알피어스 백작은 어렸을 때부터 공주님을 보아온 분이시라 이상하다 생각했답니다.

“공주님 얼굴을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그가 공주님의 베일을 걷었는데 아니 그 안에는 주루룩 눈물을 흘리고 있는 붉으죽죽한 갈색 머리의 시녀애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알피어스 백작은 아뿔싸 싶었더랍니다. 이거 제국에서 우리 공주님을 죽였구나, 그리고 이 시녀를 공주님이랍시고 보냈구나 한거죠.

코델리아 아가씨, 저희 끼리라 들이는 말씀이지만 알피어스 백작님은 패전국이라고 이런 일을 가만히 두고 넘어가지 않을 만큼의 담대함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더 짧게 말하면 앞뒤 안가리고 성질 부리기로 유명하신 분이었다 이거죠.

그분은 정말이지 뒷일을 전혀 생각 하지 않으시고 제국의 안방에서 바로 불호령을 내렸답니다.

“일국의 공주를 볼모로 모셔가 죽이고, 죽은 것을 숨기려 시녀 애를 데리고 공주 행세를 하게 하다니이게 어찌된 일이냐!”

로이틀링엔 쪽에서도 당황 했습니다. 패전국의 백작이 성질 부리는 꼴이 같잖아서도 있었겠지만... 그쪽도 일이 이렇게 되었는 줄은 몰랐던 겁니다. 제국 사람은 우리 공주님 얼굴도 알지 못하고는 그 시녀 아이가 에드위나 공주라고 알고 데려온 것이죠.

사건의 진상은 알피어스 백작이 길길이 날뛰며 에드위나 공주의 처소로 안내하라고 하면서 모두 밝혀졌습니다. 백작이 너무 당당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주춤 거리며 제국에서 안내한 공주님의 처소는 참혹할 정도로 엉망이었던 것이지요.

제국은 그 감옥같이 처참하고 궁색한 곳에 우리 공주님과 윈저튼 사람들을 가둬두고 식량이며 청결품 조차 제대로 주지 않은 모양입니다.

당시 로이틀링엔은 윈저튼에 이어 발레아, 알다르와 모두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니 쓸데없이 자기 식량을 다른 나라 국민에게 낭비할 수는 없다 생각했단 모양이지요.

식사 때가 되면 꼬박꼬박 성찬이 준비되었지만, 그것은 오로지 1인 분, 공주님의 것 뿐이었습니다. 제국의 시녀들이 직접 와서 감시하고 있었고, 공주님이 식사를 다 들면 남긴 것까지 그대로 가져갔지요. 나머지 시녀, 시종들은 그대로 배를 곪으며 식량이라고 배급감자 몇알로 연명할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만, 모두들 제국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홀쭉해졌습니다.

식량 창고가 근처에 있는 탓에 가끔 목숨을 걸고 가서 식량을 몰래 주어오기도 하고 제국 시녀들이 적선하듯 던져주는 것들도 있었으나 점차 그런 것들로는 역부족이 되었죠.

게다가 시녀들의 경우에는 매달 있는 달거리도 문제였습니다. 온갖 청결품이며 두툼한 속옷, 옷가지들도 모두 공주님에게만 배당되었으니까요. 그런 주제에 제국인들은 우리 시녀와 시종들은 온갖 일에 노예처럼 동원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쓰러지거나 하면 병들었다고 죽여버리기도 했고, 달거리 때문에 배가 아파 눕거나 피를 보이면 그 역시 감옥 행이였습니다.

노동에 익숙했던 튼튼한 시종들은 그나마 나았지만, 시녀들은 태반이 귀족가의 아가씨들이었습니다. 반년이 지나지 않았을 때 그들 중 반이 넘는 수가 감옥에 갇히거나 숨졌습니다.

우리 에드위나 공주님은 그걸 그냥 보고 안타까워만 할 분이 아니셨지요. 제가 말했나요? 에드위나 공주님은 아치 왕자님처럼 재치가 넘치시면서도 세실리아 공주님처럼 강단이 있으시다고요.

그분은 처음엔 한껏 까다로운 공주 행세를 하며 로이틀링엔의 햇볕이 강해 피부가 다 벗겨지니 베일을 가져달라 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그 베일로 온 얼굴을 가리고 생활했지요.

제국의 시녀들이 그것에 익숙해질 무렵, 공주님은....

네, 코델리아 아가씨, 이제 슬슬 눈치채셨겠지요?

공주님은 자신이 시녀가 되셨습니다.

오늘은 마리아가, 내일은 레미가, 내일 모레는 르네가 공주님 노릇을 했습니다.

배고픈건 누구나 매한가지니 그들의 이 슬픈 공주놀이엔 엄격히 순서가 정해져있었지만, 누군가 달거리를 시작하거나 몸이 아프거나 하면 순서가 뒤바뀌는 때도 있었지요.

시녀들은 제 차례가 되면 머리카락을 붉은 천으로 두르고, 가만히 앉아 말을 삼가고 공주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공주님은 시녀가 되었지요. 오늘은 마리에가, 내일은 제인이, 내일 모레는 르네가 되어서 배를 곪고 싹이 난 감자를 드셨을 겁니다.

제국의 시녀들이 정말로 그걸 못 알아보았을까요? 글쎄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랬을 것 같진 않습니다.

아무렴, 나중에 우리 수도원에 자리를 차지하게 된 시종 출신 녀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주님은 아프거나 지나치게 허약해진 남자들에게도 공주노릇을 시켰다고 하는데요. 제국인이라고 해서 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들도 다 알았을 겁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로이틀링엔의 둘째 왕자가 공주님을 열심히 도와주었다고 하더군요. 그는 무인인 황제나 저의 형과 달리, 몸이 약해 어려서부터 무에는 재능이 없고 마법만을 익힌 자라 황제의 예쁨을 받지는 못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지요.

그런 그가 저처럼 홀로 외로운 에드위나 공주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를 도왔다는 것도 말이 되는 이야기긴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 2황자의 명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 우리 윈저튼 사람들을 도운 이들이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들도 사람이니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하고 왕궁 끄트머리 가장 궁색한 곳에 감옥처럼 갇혀 굶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요.

저 역시도 제국전쟁에서 로이틀링엔의 군사에게 제 형제를 잃어 로이틀링엔을. 제 원수처럼 미워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제 나라로 돌아가지 못한 팔 다리를 잃은 로이틀링엔 병사를 간호해준 적이 있는걸요. 우리는 모두 사람인데, 일이 그렇게 되면 그자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더군요. 며칠을 간호한 끝에 그가 결국 목숨을 다했을 땐 전 많이 울었습니다. 꼭 제 동생이 죽었을 때처럼요.

어쨌든 많은 이들의 친절에 기대어 그 작전이 성공하였다고는 하나 그런 생활을 하시면서 매달 로이틀링엔에서의 생활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고 편지를 쓰신 에드위나 공주님의 심정은 어땠을지 짐작조차 어렵습니다.

다만, 지금 생각으로는 아마 공주님은 정말 즐겁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도 듭니다. 공주님은 좀 특이하신 분이니까요.

그러니까 그날도 공주님은 여느 때처럼 시녀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녀 소피아가 공주님 흉내를 내는 동안에요.

그래도 윈저튼에서 대신까지 오는데 그때만큼은 본인이 직접 나오셔야 했던 것 아니냐고요? 물론 우리 에드위나 공주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겁니다. 다만 그 전날 마리 행세를 하고 식량창고에서 굴러나온 과일 몇개를 서리하려다 제국의 궁내부대신에게 꼼짝없이 들키고 말아, 그땐 철창 신세를 지고 계셨다고 하네요.

그러니 알피어스 백작이 베일을 벗겨본 것은 정말로 잘한 일입니다.

아마, 그러지 않았더라면 제국에서는 감히 과일을 훔치려든 윈저튼의 시녀를 단칼에 죽여버렸을 수도 있을테니까요.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공주님은 내가 바로 윈저튼의 공주라 하는 대신 묵묵히 시녀 대신 죽었을 분이시고요.

어쨌든 그렇게 운이 좋아 윈저튼에선 볼모로 잡혀간 에드위나 공주가 철창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참으로 온 국민을 침통하게 만드는 소식이었지요.

물론 공주란 것을 알게 되고 바로 감옥에서 나오셔서 원래 처소로 돌아가셨지만, 앞으로 공주를 향한 감시는 더해지면 더해지지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윈저튼으로서는 로이틀링엔에 항의할 방법도 없고요.

이 사태를 바꾸려면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것 뿐인데, 그런다고 다시 이길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죠. 아니, 틀림없이 또 패배했을 겁니다.

코델리아, 아가씨 당신께서는 여기까지 읽으시고 대체 이 이야기가 마법의 상자와 무슨 관련이 있냐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바로 이 시점에, 에드위나 공주님이 정말로 마법처럼 저희 레테 수도원을 찾아오셨답니다. 그것도 시녀 몇, 시종 몇을 이끌고 말입니다.

저희로서는 정말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공주님께서 혈혈단신 그곳을 빠져나온 것인가? 그럴 수 있을리가 없는데? 하지만 수풀을 헤치고 온 듯 잎사귀 투성이인 것을 보면 정말 그런 것같기도 한데, 하얀 얼굴이며 멀끔한 팔다리에는 고생의 흔적이 없으셨죠.

공주님은 어떻게 제국을 빠져나왔는지에 대해 일언반구가 없으셨습니다.

그저 제게 상자 하나를 건네더군요.

“이걸 가지고 있어.”

“이게 뭡니까?, 공주 전하.”

공주님은 제 말을 답도 없이 아주 잘 씹어 드시고나서는, 자기 팔을 내미시더군요.

“내 팔 좀 봐.”

“네? 팔이 가늘어지셨군요.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공주전하.”

“시끄럽고, 팔에 있는 이거 좀 빼봐.”

“3년을 지내시는 동안 성질이라도 죽으실까 걱정했습니다만, 그대로시군요, 에드위나 전하!”

“베데르, 당신은 3년간 말수가 좀 적어지려나 했는데 그대로군. 유감이야.”

네, 제가 아까 말씀드렸지요. 공주님은 아치 전하를 닮기도 했지만 세실리아 전하와도 비슷한 성품이라고요. 저는 더 군말않고 공주님의 팔에 채워진 오묘한 빛깔의 엉킨 사슬같은 팔찌를 빼드렸습니다. 공주님은 그 팔찌를 상자에 담아 제게 주었습니다.

참, 팔찌 하나 빼는 것도 저에게 시킬 만큼 왕족도 이런 왕족이 없으신 공주님이 어찌 시녀 노릇을 하셨을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공주님은 다시 세실 전하 저리가라 할 무뚝뚝한 말투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가지고 있어.”

“언제까지요?”

“다시 달라고 할때까지.”

“공주전하,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제 물음에 대한 답은 공주님이 아니라 시녀들에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로이틀링엔의 제 2황자께서 이 상자와 팔찌를 주시고 저희를 황궁에서 빼내어 주셨어요.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되어요. 베데르 경께서만 알고 계셔야해요.”

에드위나 공주께서는 서신 한통을 휘갈겨 쓰시더니 수도사 중 한명을 불러다가 제국에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걸 서신이라 해야하나요, 거기엔 이렇게만 적혀있더군요.

[나를 이리 일찍 윈저튼으로 보내준 로이틀링엔에게 감사하다.]

신부수업은 어떻게 받은 것인지 서신 작성법이고 뭐고 아무것도 지키지 않은 데다가 필체마저 엉망으로 마구 휘갈겨 쓴 편지였으나, 저는 공주님께서 무얼 계획하고 계신지 알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식이 직접 풀어준 타국의 볼모를 다시 데려오기에는 로이틀링엔의 황제도 면이 서지 않았겠지요. 그렇기에 공주님은 황제에게 선수를 쳐 메시지를 보낸 겁니다.

'그냥 네가 보내준 걸로 하자. 고맙게 생각할게’ 라는 메시지를요.

일이 생각보다 쉽게 해결된 데에는 로이틀링엔의 제2 황자 덕이 컸습니다. 그는 제 아비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분 만큼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모양입니다.

제 아무리 황제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고 하나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 제 아들과, 그 아들을 싸고드는 황비를 무시하고 볼모를 함부로 풀어준 벌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요.

그렇게 에드위나 공주님의 로이틀링엔 볼모기는 지나갔습니다. 공주님이 데려오신 시종 하나가 우리 수도원에 남았으며, 시녀 몇 역시 수도원에서 한참을 보내다 거처를 정한 후 떠났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떠나고 난 후에도 공주님이 남기신 서책보관함은 이 베데르의 손에 남아있었지요.

그 후의 일은 코델리아 아가씨 당신도 모두 아시지요? 기사 아서 길런이 공주님을 찾아와 99일 동안 발코니 앞에서 기다리다 떠나고, 공주님이 다시 아서 길런을 따라 떠나셨던 일들 말입니다.

공주님이 다시 서책보관함을 찾으러 제게 온 것은 그 일이 일어나고도 반년이나 지나서였답니다.

이 얘기까지 오늘 모두 하고 싶으나, 아까부터 우리 아치 왕자 전하께서 그 아름다운 푸른 눈으로 절 쏘아보아 제 얼굴이 뚫어질 것 같군요. 원래는 여기 있던 것을 몰래 가져가신 것이면서 원래부터 자기 것이신 듯 어찌 이리 당당하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오늘 이 늙은이가 늘어놓은 이야기로도 아가씨의 궁금증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겠지요?

이제 이 늙은이는 펜을 놓고 여기에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채식사들의 작업을 보러 가야할 것 같습니다.

내일이면 세실리아 공주님께서도 왕궁으로 다시 돌아오실 것이며, 선왕께서 에드위나 공주의 숲을 보러 이쪽으로 행차하신다고 하시는 군요. 우리 철없는 왕자님의 길은 앞으로도 파란만장할 듯 하니, 코델리아 아가씨, 부디 왕자님의 좋은 벗이 되어주십시오.

-연초록달이 저물어 가는 날 밤, 필경사 베데르 랭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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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벗 코코에게,

다시 아치 입니다.

커다란 초록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에드위나 공주의 이야기를 읽다말고 갑자기 튀어 나온 내 글씨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며 투덜거리고 있습니까? 아치 왕자때문에 산통이 다 깨졌다며 입을 비죽일 당신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네, 정말로 눈앞에 선해요. 난 이제 당신이 붉은 머리카락에 초록색 커다란 눈을 한 동그란 얼굴의 귀여운 소녀란 걸 아니까요.

연초록달의 열여덟번째 날 밤,

-당신이 너무 너무 좋아하는 아치 앨버트.

* * *

주책맞은 아치,

그 ‘너무 너무 좋아하는’ 은 그만 하기로 하지 않았어요?

맞아요. 당신 편지에 눈물 콧물 빼던 것이 쏙 들어가고 말았네요.

아니 왜 편지쓰는 베데르에게 눈치를 주시는 거예요?

에드위나 공주가 기사를 찾는 모험을 하다 말고 레테 수도원에 들른 얘기 같은 것은 앤 셀린 작가님의 원고에는 들어있지 않다고요. 에드위나 공주가 왜 수도원에 들른 것인지 궁금해 죽겠어요.

베데르 필경사님 또한 아치 당신만큼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시네요. 어서 다시 펜을 쥐어주세요.

아치, 당신은 얼른 에드위나 공주의 무덤에 선왕을 모시고 갈 채비를 하시고요.

추신: 몸 조심해요. 혹시 윈저튼이 아직도 볼모로 왕자를 보낼만한 상황은 아닌거죠? 당신이 얄밉지만 늘 걱정이 되긴 한답니다.

6.18.

-그냥 코델리아

* * *

그냥이라고 하기엔 나를 정말 좋아하는 코델리아.

편지를 찢어버리려 하진 말아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할게요.

당신이 날 너무 너무 좋아한다는 말이 나는 너무 너무 좋거든요.

베데르의 그 뒷 이야기는 나도 궁금한 참인데, 선왕 폐하께서 주문하신 시도서의 채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 발등의 불이 떨어진 모양이더군요. 베데르 역시 당신에게 옛 이야기를 털어놓는데에 재미가 들린 듯 하니, 조금만 기다려봐요. 사실은 나도 에드위나 공주님이 기사를 찾는 도중 수도원에 들렀다는 건 금시초문이었거든요. 시도서가 완성되면 바로, 그를 재촉해 다음 이야기를 듣도록 하죠.

-당신에게 조금 더 걱정을 사기 위해 윈저튼의 상황은 말하지 않을 작정인 아치 앨버트.

========== 작품 후기 ==========

너무 너무 좋아하는 독자님들꼐.

저도 독자님들에게 조금 더 걱정을 사기 위해 제 비축분 상황은 말하지 않을 작정이에요.

선작, 추천, 코멘트 모두 감사합니다.

<-- 플로리안의 비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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