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불성실한 나의 벗 아치,
내가 내 외모 묘사를 얼마나 열심히 해드렸는지 잊었어요?
리암이 얼마나 잘생겼는지도 성실히 이야기해드렸잖아요.
심지어 마크의 눈색깔 까지도 말해주었다고요, 난.
아니, 앤 셀린 작가는 아치 당신의 금색 머리칼이며 연푸른색 눈동자 같은 건 쓸데없이 다섯줄씩이나 들여서 설명해놓고, 왜 플로리안의 외모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을 삼가셨을까요?
빨리 더 이야기해줘봐요.
플로리안은 잘생겼나요?
틀림없이 잘생겼겠죠?
에드위나 공주도 미인이었으니까요.
난 벌써부터 그가 마음에 들어요.
-다음 편지를 기다리며, 당신의 코코.-
추신: 아직 세실의 마음이 누그러진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았잖아요, 게으른 아치.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제게 고하기 전까진 그 방에서 나오지 마세요.
* * *
잘생긴 남자만 좋아하는 코델리아에게,
당신이 미남을 선호한다는 것은 뭐, 나한테도 나쁘지는 않은 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만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만나는 것까지 가지않아도 얼굴이라도 잠시 들여다 볼 수 있었더라면 당신은 틀림없이 내게 홀딱 반했을걸요?
플로리안이 나처럼 잘생겼냐고 물으시면, 글쎄요. 그애를 잘생겼다고 말해도 될까요?
그앤요. 좀... 특이합니다.
키는 저보다 조금 작은 정도인데 자기보다 훌쩍 큰 옷을 입고 있어 훨씬 더 작아보이고 체구는 호리호리한 편이죠.
사내라기엔 좀 젊지만, 소년이랄 만큼 어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덜 익은 과실같은 뺨이며, 하얀 피부, 붉은 입술은 그가 앳되어보이는 데에 한 몫합니다.
네, 아주 밉상은 아니예요. 조개껍데기 같은 하얀색 얼굴이며, 초록빛이 도는 눈동자는 예쁘장하다고 말하기엔 좀 과한 정도지요.
그러나 당신의 눈에도 플로리안이 잘생겨보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지난 번에 리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코코, 당신은 사내다운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요.
그러나 나의 누이, 세실의 취향에는 그 소년과 청년 사이의 애매한 아름다움이 안성맞춤이었던 모양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시는지 아시겠지요? 네, 세실은 완전히 그애 편이 되었어요.
사실요. 선왕께서 그애에게 빠진 건 이해한단 말이죠. 자기 손자가 살아돌아왔다고 하면 그게 거짓이라고 해도 믿고 싶은 노인네의 심정을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우리 어머니도 그래요. 물론 에드위나 공주와 그애가 정말이지 닮았던 모양인지 바로 ‘에드위나?’ 라고 묻긴 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바로 이성을 찾으시고 그앨 좀 의심하셨거든요.
그앨 앉혀두고 바로 오두막에선 어떻게 살았는지, 에드위나 공주와 기사 아서 길런은 언제 죽은건지 같은 걸 차분히 물어보셨어요. 상냥한 말투이지만 전 알 수 있었죠. 어머니가 그 아이를 시험해보고 계신다는 걸요.
그런데 그애는 그 모든 질문에 술술 대답을 하고는 이렇게 말하지 뭡니까?
“아델라이드 여왕님. 이제 슬퍼하지 마세요. 염려도 더는 마세요. 에드위나 공주는 당신을 모두 용서했어요. 바라던 대로 행복하게 살았어요. 아시잖아요.”
순간, 우리 어머니 눈에 눈물이 핑 돌더군요.
정말이지, 왜 그렇게 마음이 약하신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애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에드위나 공주가 어떻게 기사 아서 길런을 찾아 헤매였는지, 두 사람이 재회 후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지를 술술 꺼내놓더라고요.
제가 얼마전에 어머님과 선왕폐하께 읽어드렸던, 코델리아 당신이 내게 주었던 그 책 속에 나오는 내용 그대로 말입니다.
이미 세실과 제가 그 책을 모두 낭독해드린 후였으나, 그래도 공주의 아들이 직접 말로 전달하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나봅니다. 어머니께서도 선왕폐하께서도 눈물을 감추질 못하셨습니다.
이 모습에 감동한 대신들 몇까지 훌쩍이니 알현실은 그야말로 눈물바다가 되었지요. 그렇게 윈저튼 왕가는 플로리안, 그 쪼그만 녀석의 손아귀에 들어가버리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마지막 희망이 있었어요.
내 누이, 뱀같은 세실리아 윈저튼 말입니다.
변방에서 돌아온 세실은 과연 호락호락 그애에게 넘어가진 않았습니다.
말을 타고 도착한 세실에게 플로리안이 다가가 아이처럼 환호하며 불쑥 손을 잡으니, 세실은 제 성격대로 바로 그 손을 쳐냈으니까 말예요.
그래도 그 아이는 기도 죽지 않고 웃으며 세실을 반기더군요.
“세실 공주님이시죠? 우와, 정말 멋져요. 멋지단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멋지실 줄은 몰랐어요. 저 정말 세실 공주님의 팬이에요.”
그애는 오두막에 살면서도 세실에 대한 ‘전설’을 익히 들었노라, 아름다운 외모며 탄탄한 몸매며 뛰어난 검술에 늘 열심히 공부하시는 것까지 다 알았노라, 가끔 어머니 아버지가 마을에 들어가서 그런 소식을 전해 들어 올때면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노라 하고 한참을 떠들어댔습니다.
세실은 당연히 콧방귀도 끼지 않았죠.
“비켜.”
그렇게 말하고 지나가는 세실을 보며 주춤 거리지도 않고 ‘역시 멋있다..’ 같은 말을 하는 플로리안도 보통 놈은 아니구나 싶긴 했습니다.
그때처럼 세실이 든든하긴 처음이더라고요. 전 얼른 세실에게 가서 그애가 얼마나 수상쩍은지와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할지에 대한 긴 의논을 시작할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께서 다시 저를 부르시지 뭡니까?
제게 작위와 훈장을 수여하시겠다면서요. 급히 불려간 자리엔 선왕 폐하와 궁내부 대신 등을 비롯한 몇몇 주요 인사들, 그리고 나의 누이 세실리아가 서 있었습니다.
코델리아, 당신도 아시다시피 제가 선왕을 모시고 숲에 가던 때, 세실은 놀고 있던 게 아니었습니다. ‘공주로서의 막중한 의무’를 띠고 변경백을 도와 변방의 괴물들을 처리하러 목숨을 걸고 갔던 것이죠.
일이 늦어진 것도 세실의 일처리가 그만큼 철저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선왕 폐하도 어머님도 세실의 일은 당연히만 생각하시는지 일언반구도 안하시고 오로지 플로리안을 찾아낸 저에게만 찬사를 쏟아내셨어요.
특히 어머님은 전에 없이 호들갑을 떠셨습니다.
그동안 책 읽는다는 핑계로 수도원에 골몰하며 온갖 일에 농땡이만 치던 우리 왕자가! 혼사는 다 물리치고 스물 넷이 되도록 무도회나 돌아다니며 왕실 이미지를 흐리곤 하던 우리 아치가! 사실은 이렇게 진국이었다!
...뭐 이런 말도 안되는 자랑들을 하시느라 여념이 없으시니 낯이 부끄러워 미칠 노릇이겠더군요.
선왕폐하 역시 플로리안을 발견했을 때 함께 있어드린 저에게 얼마간 빚이라도 느끼시는 겐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제 수치심을 부각시켰습니다. 세실은 그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죠. 그땐 정말이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답니다.
어머님께서는 절 아주 죽일 셈이셨는지 제 귓가에다 대고 이렇게 귓속말까지 하시더라고요.
“세실이 오두막을 발견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치, 이 모든 것이 네가 한 일이란 걸 모두 안다. 어디 세실이 수도원 근처에나 갈 아이니? 암, 그렇지 네가 했고 말고.”
물론, 그 귓속말은 바로 옆에 있던 세실에게도 들렸을 겁니다. 암 그렇고 말고요. 우리 여왕 폐하꼐서는 젊어서 귀를 다치셔서 목소리가 정말 크시고 세실은 고양이처럼 귀가 밝으니까요.
그렇게 저는 한 것도 없이 작위를 수여받았습니다.
전의 편지에 말한 바와 같이 내 이름은 두 음절 더 길어져 이젠 더 외우기 힘들게 되었어요. 전 이제 아치 앨버트 윌리엄 렌다이크 엘링턴 윈저튼이 아니라 아치 앨버트 윌리엄 렌다이크 엘링턴 베일리쉬 윈저튼이에요. 난 내 이름 끝에 이어지는 엘링턴-윈저튼의 리듬감에 몹시 만족했는데 말입니다.
작위는 나에게만 수여된 것은 아닙니다. 한 것도 없는 플로리안 그애는, 살아돌아왔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공작위를 받았지요. 그가 발견된 오두막 주변 영토는 왕명에 따라 ‘엘핀델’ 이란 이름을 하사 받았고, 이제 그는 에드위나 공주의 아들, 플로리안 엘핀델 공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변경까지 다녀온 세실이 우리 둘의 옆에서 독사처럼 눈을 빛내며 서있었죠.
내 누이가 얼마나 화가 났을지는 코델리아, 당신도 짐작하시겠지요?
그 눈빛이 어찌나 흉흉하던지 전 나 아니면 플로리안은 오늘 밤 안에 죽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한 핏줄이니 나보단 그 녀석 쪽이 더 확률은 높았습니다.
의심스러운 놈이긴 했지만 죽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요.
그래서 전 작위 수여식이 끝나자마자 그 녀석의 그 가느다란 팔목을 잡고 끌고 갔어요.
조용히, 한 구석으로 가서 그애에게 물었습니다.
“플로리안 엘핀델, 난 그대를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린 숲을 봉쇄했어요. 100명이 넘는 군사가 오두막을 샅샅이 뒤졌고요. 그러는 동안 그대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갑자기 오두막으로 나타난겁니까?”
“지금 제 이름 부르신거죠? 플로리안 엘핀델이라고요?”
“네, 그게 당신이 받은 이름 아닙니까?”
“어쩜, 제 이름 정말 예쁘죠. 왕자님, 전 제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제가 심각한 표정을 짓든 말든 그애는 연신 싱글벙글이었어요.
갑자기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사람이 된 것 같더군요. . 코코, 이건 모두 당신 책임이에요.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저도 저 플로리안 녀석처럼 해맑게 딴소리만 하고 다닐 수 있었는데 말이죠.
나의 엄격한 천사 코코, 당신을 알지 못했더라면 저도 ‘그래 엘핀델이란 성은 참 어감이 좋아.’ 같은 소릴 하며 그 녀석과 시시덕거릴 수도 있었단 말예요.
하지만 이제와서 그랬다간 당신에게 불호령이 떨어지겠죠?
그게 아니더라도 그저 나몰라라 하기엔 내게 그애의 목숨이 달려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딴청을 부리는 그애를 앉혀두고 이것저것 캐물었어요. 그애는 조물거리는 입술로 잘도 대답하더라고요.
“오두막 아래에 지하창고가 있어요. 거기 몰래 숨어있었어요.”
“지하 창고가 있다는 것은 나도 압니다. 병사들은 분명 그곳에도 들어가 생쥐 한마리 없다는 걸 확인했고요.”
“병사들이 올 땐 무서워서 위로 올라갔어요. 다시 위로 오면 아래로 내려갔고요.”
“100명의 군사를 모두 따돌렸다고요?”
“제가 좀 날렵하게 생겼잖아요, 아치 앨버트 윌리엄 왕자님?”
따박따박 잘도 대답하는 그 얼굴은 생글생글 웃고 있어서인지 밉게 보이진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오두막에 먹을 것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고, 숲 속에도 사냥해서 잡아먹을 만한 짐승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어찌 그애가 일주일 넘게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냐고 물으니 플로리안은 그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쐐기를 박더라고요.
“제 얼굴이 되게 많이 굶은 사람 같나요, 아치 왕자님? 음식이 좀 남아 있었어요. 그걸 먹었고요. 진짜예요.제발 제 말을 다 믿어주세요. ”
그렇게 말하고 씩 웃는 볼따구는 탐스럽게 동그랬습니다.
그의 말이 맞았습니다. 플로리안은 좀 마르긴 했지만 며칠을 굶고 살았다기엔 지나치게 뽀얗고 혈색도 좋았어요.
그 귀여운 얼굴을 보고있자니, 뭐 그래 음식이 지하창고 같은 곳에 남아있을 수도 있었겠다 싶기도 하더라고요.
그 동그란 얼굴, 마른 몸, 생기 넘치는 움직임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애 셔츠자락 사이로 둘둘 싸매어놓은 붕대 같은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어디가 아픈걸까? 하고 생각하니 지난 번 기절했을 때 그저 잠든 것이라 했던 마을 의사의 말이 떠올랐어요. 상처난 곳이라도 있었다면 아무리 작은 마을의 의사라도 그걸 발견하지 못했을리는 없지요.
그러고보니 시종장 에드문드가 말하길 그 애는 씻는 것도 옷을 입는 것도 모두 혼자 한다고 말한 것이 생각나더군요.
매번 오두막에서 혼자 했던 일이니 이제사 시종이 따라붙는 것이 너무 어색하다나 뭐라나요. 그때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몹시도 이상한 일이었급니다.
혹시 가슴팍이 둘둘 감은 붕대 안쪽에 어떤 흉터라도 있는 건 아닐까?
몸에 무슨 흑마술사의 주술이라도 새겨둔 것은 아닐까?
코코, 당신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흑마술을 행할 때 문양은 언제나 견갑이나 척추 근처에 그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잖아요. 저애는 어쩌면 에드위나 공주의 아들로 분장해 태연히 웃고있는 발레아의 흑마술사 일 지도 몰랐어요.
저는 얼른, 그애의 셔츠자락을 잡았습니다. 그애는 그저 실실 웃었어요.
“왜 그러시는거예요, 아치 왕자님?”
“벗어보세요.”
“네..?”
“벗으라고 말했습니다. ”
플로리안은 당황해서 딸꾹질을 다 하더군요. 설마, 제가 셔츠를 벗으라 할 줄은 몰랐겠지요. 하지만 그따위 셔츠, 당당하다면 그저 벗어재끼면 되는 것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애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저 무언갈 숨기고 있는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하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하더라고요.
이렇게 된 이상 제가 직접 벗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뒷걸음질을 치는 그애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아니 달려들었다고 하기도 그렇습니다. 코코, 당신도 아시잖아요. 전 타고난 자태가 고운데다가 몸놀림도 우아한 사람이란 걸.
그저, 그애의 셔츠를 벗기려 팔을 뻗으며, 몇발짝 다가섰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애가 창문가로 가더니, 그대로 밖으로 뛰어내렸어요. 이젠 내가 딸꾹질을 할 차례였습니다.
세상에, 거긴 4층이었는데 말이죠.
다행히 수박 쪼개지는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어요. 그런 소리가 나면 머리통이 박살나 그대로 즉사했단 뜻이거든요.
플로리안은 나무에 살짝 걸쳤다가, 한번 튕겨나가 풀숲에 안착한 모양이었습니다. 몸이 축 늘어진게 그대로 실신한 듯 했어요.
제 생에 그렇게 열심히 뛰어본 적은 또 없을 겁니다. 얼른 내려가 그애가 죽을 새랴 치유마법을 했죠. 그런 제게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지금 뭐하는 거냐?”
일국의 왕자에게 이렇게 말이 짧은 건 내 누이밖에 없었죠. 전 너무 황당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아 어버버, 말도 제대로 못하고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치유 마법을 행하고 있었죠.
세실이 쯧, 하고 혀를 차더니 터벅 터벅 정원 근처 분숫가로 가 제 투구에 물을 받아와 그애의 얼굴에 쏟아버렸습니다.
어푸, 소리를 내며 플로리안이 일어나자마자 세실은 플로리안을 쳐다보지도 않고 저만 보며 말하더군요. 네, 정말로 그랬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세실은 아주 냉정했습니다.
“이 정도론 안 죽어. 뭘 해본 적이 없으니 사람이 쉽게 안 죽는다는 것도 모르지.”
분하지만 맞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아무말도 못하고 있자 세실은 다시 혀를 차며 덧붙였죠.
“그래도 치유 마법은 좀 하네. 잘 붙들고 있어. 의식 안 떨어지게. 너보다 더 제대로 할 줄 아는 놈으로 데려올테니까.”
그렇게, 세실이 그애를 두고 가려는데 의식을 되찾은 플로리안 녀석이 세실의 바짓 가랑이를 잡더라고요.
“뭐야.”
세실은 평소처럼 뿌리치려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애가 세실의 다리를 부여잡더니 제 쪽으로 고개를 숙여달라고 하는 거였어요.
세실은 어쩐 일인지 순순히 그애가 시키는 대로 했고, 그애는 세실의 귓가에 무언가를 말하는 듯 했습니다.
우리 여왕님처럼 목소리가 큰 것은 아니라, 뭐라 귓속말하는 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고요.
잠시 후, 세실이 일어나 저를 보고 말했습니다.
“꺼져.”
라고요. 그리고 그애를 공주님 안듯이 끌어안고 가더군요. 뭐, 키는 세실보다 조금 큰 정도인데다 마르기도 했지만 그래도 남자애라 무게가 제법 나갈텐데 말입니다.
그때 세실과 플로리안이 무슨 말들을 주고받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날 이후로 세실이 그애를 보는 눈은 전에 없이 정다워졌습니다.
그런 거 묻히고 다니지 마라, 하면서 그애에게 손수건을 쥐어주질 않나(세실이 손수건이라니요.) 시종을 두어야 한다고 박박 우기는 저를 무시하며, 그애 방을 자기 방 옆으로 옮겨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자기한테 말하면 된다고 하질 않나.
정원을 구경하고 싶다는 그애 말을 들어주며, 세실 답지 않게 꽃 사이를 거닐지 않나, 아니 오늘은 플로리안을 플린, 이라고 애칭으로 부르지 뭡니까? 정작 친 동생인 저에게는 ‘아치 놈’ 이라고 하면서요.
대체 플로리안은 세실을 어떻게 구워삶은 것일까요?
전 지금 크나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장 내 방에 얼쩡이는 플로리안 녀석에게 저리 가라 한번 했다치면 세실이 달려와, 다정하게 말하라고 윽박을 지르고 가니 말입니다.
저에게 큰 소리를 치고 나서 그애를 바라보는 세실의 눈빛은 또 얼마나 누그러져 있는지 모릅니다.
세실은 대체 어떻게 된거죠?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코델리아.
정말 내 누이가 그 녀석에게 단단히 반한 것일까요?
-길어진 이름을 다 말할 힘도 없는 당신의 벗, (애칭없는 그냥) 아치.
==========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오늘의 연참은 끝났습니다.
아홉편을 단번에 다 읽어주신 독자님들이 계시다면 정말, 사랑합니다.
추신: 다음 편은 아작난 손목으로 열심히 빚어 내일 또 가져올게요. 언제나 그렇듯 독자님들의 반응이 글쓰는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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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