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아치 앨버트 윌리엄 렌다이크 엘링턴 베일리쉬 윈저튼 왕자님께.
이제 슬슬 이 긴 이름을 외워가던 참인데 한 자가 더 추가된 것을 축하드리며,
연초록달의 막바지에 당신의 쓸쓸한 벗 코델리아 인사올립니다.
어때요? 좀 궁정예법을 따르고 있나요?
혹시 지금 당신의 작은 집필실 책상에 앉아계신다면 대답해주세요, 왕자님.
6.25. 저녁.
-부르다 숨 막혀 죽을 당신 이름을 모두 기억하는 코코
추신: 애칭이 없는 것이 아쉬우시면 제가 지어드릴까요? 아치는 더 줄일 수 없으니 앨비, 버티, 윌리, 윌, 리암 중에 골라봐요. 아니 안되겠네요. 리암은 이제 저에게 다른 사람의 이름이 되어버렸고 나머지는 왕자님에게 붙여드리기엔 너무 흔해요. 그냥 계속 저의 아치 왕자님으로 남으세요.
* * *
보지 않아도 당신이 어설픈 자세로 이상한 인사를 하고 계실 것이 눈 앞에 선한 코델리아 플로라 그레이 양께.
오랜만에 나도 당신의 이름을 다 불러보는군요. 물론 우리가 나눈 첫 번째 편지를 찾지 않고 바로 쓸 수 있었어요. 서로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 우정의 증명이라 한다면 내 쪽이 당신 쪽보다 훨씬 쉬운 게임이 될테지만요.
그나저나 우린 정말 잘 맞는 것 같지 않나요? 지금 막 플로리안을 피해 집필실로 들어와 책상에 앉은 참이었거든요.서책보관함을 열자마자 스윽, 소리가 나면서 당신 서신이 도착하더군요. 이런 기분 좋은 우연이 나의 하루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난 이 세상의 대부분의 일이 타이밍의 문제로 완성되고 또 어그러진다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주저앉았을 때 마침 거기와서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운명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난 주저앉지도, 꼭 당신이 손을 잡아줄 필요도 없는 상태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책상 앞에 앉았을 때, 당신도 거기에 있다는 것이 주는 위안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크네요.
당신의 유월, 나의 연초록달이 끝나가고 있는 밤에,
-당신이 필요하다면 언제고 여기에 앉아있을 당신의 벗, 아치 앨버트.
* * *
내 부름에 충실히 응답해주는 나의 벗, 아치.
그래서 플로리안은 좀 괜찮아졌나요?
이 말로 편지를 시작하신다면 은근히 독점욕이 강하여 저와 베데르의 편지도 허락하지 않으시려 했던 당신은 분통을 터뜨릴지도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우리 둘다 책상 앞에 앉은 이 시점에선 솔직해질 수 밖에 없네요.
지금 제가 제일 궁금한 것은 플로리안의 정체예요.
깊은 숲 속에서 뿅 하고 등장한 과실같은 뺨을 가진 소년이라니요.
게다가 세실리아 공주님이 그애에게 반했다니, 플로리안은 대체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인걸까요?
하긴, 적의가 가득한 당신 편지 속에서도 플로리안 엘핀델이란 청년이 몹시도 사랑스럽다는 것은 읽어낼 수 있었을 정도니, 모두가 그 사람에게 빠지는 것도 조금은 이해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플로리안을 의심하는 당신의 의견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나의 왕자님.
에드위나 공주와 기사의 이야기를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은 그들의 자식이니 그렇다치고, 어떻게 오두막에 등장했는지부터 뭘 먹고 살아남았는지까지 제대로 설명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건 참으로 수상쩍은 일이네요.
너무 큰 적의감을 드러내지는 마시고, 공들여 플로리안을 관찰하세요. 시간을 갖고 깊이 대화도 해보시고요.
아치, 당신은 600페이지짜리 책 속에 몰래 숨겨놓은 베데르에게 보낸 편지도 찾아낸 분이시니, 그애가 사기꾼이라면 바로 알아채실 수 있을 거예요.
네, 전 뒤끝이 좀 있는 성격이랍니다. 당신이 제 편지를 훔쳐보신 것에 대한 저의 끝없는 원망을 없애시려면 빠른 시일내, 베데르에게 가서 뒷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해주세요.
아, 이참에 플로리안을 데리고 수도원에 가보는 건 어때요?
정말 흑마법사인지 확실할 수 있도록 수도원에 가서 성수라도 뿌려봐요.
...음, 이건 아닌가요? 어제 제가 본 영화에선 그런 장면이 나오더라고요.
6월의 끝자락에.
-솔직히 말해 흑마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의 벗, 코코.
추신: 타이밍이 거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당신의 이론에는 얼마간 동의하는 바예요. 하지만 정말 강렬한 감정들은 시간차 같은 것을 뛰어넘지 않나요? 우리가 지금 시간과 공간을 무시하며 이렇게 정다운 벗이 된 것 처럼요.
솔직히 말해서 아치, 내가 울고 있을 때 당신이 바로 내 옆에 없다고 해도 난 당신 마음을 기억할거예요. 당신은 언제나 내가 쓸쓸하지 않도록 책상 앞에 앉아있으려 하는 사람이니까요.
* * *
미워하기엔 너무 자주 쓸쓸해하는 코코,
혹시 메리앤이 당신을 때리기라도 했어요?
마크나 리암이 당신을 울리기라도 했나요?
다시 내가 당신의 큰 오빠 노릇을 할 차례라면 어서 말해봐요.
플로리안의 소식에 흥겨워하는 당신이 덧붙인 추신이 너무 쓸쓸한데다 글씨체마저 당신답지 않게 가라앉아 있어 염려되는군요.
나의 사랑스러운 코코, 당신의 아치는 어찌나 걱정이 되었던지 그만, 서책 보관함 안에 내 손을 우겨넣을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전례를 보건데, 당신께 도착하는 것은 다 썩어 문드러지고 잘생긴 골격만 남아있는 앙상한 손목뼈가 다겠지요.
그런데 쓸쓸한 건 그렇다치고 정말 내 편지를 모두 읽고도 플로리안이 좋다는 소리가 나옵니까?
심지어 그 예쁜 얼굴을 직접 보지도 않고서 이런 반응이라니, 그애 초상화라도 본다면 당신도 세실 못지 않게 플로리안을 싸고돌기 시작하겠군요.
그래도 수도원에 가서 성수라도 뿌려보라는 말이 조금 귀여웠고, 당신 글씨가 영 힘 없이 가라앉아 있으니 이번 일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드리지요.
당신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궁금해하시는 그 과실같고 꽃같은 청년의 근황도 들려드리겠습니다.
플로리안은 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는지 다리가 부러진 것 외에는 큰 상처는 나지 않았습니다. 그 마저도 제가 바로 치유마법을 써, 오래 가진 않을 예정이고요. 아마, 이번주가 지나면 바로 다시 뛰어다닐 수도 있을 거예요.
참고로 세실은 아직도 플로리안을 엄청나게 싸고돌고 있답니다. 자기 방 바로 옆의 방으로 그애 거처를 옮겼다는 말을 했나요? 시종을 쓰지 않겠다는 플로리안의 고집도 아직도 잘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사실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아 오늘 아침엔 플로리안의 방에 들렸다 온 참이에요.왕족의 처소는 원래 문이 달려있지 않은 것이 관례이고, 달려있다 해도 기척을 내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무작정 문을 열었더니 그애는 글쎄, 제가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크게 소리를 지르지 뭐예요?
그 높은 비명 소리에 제가 더 놀라 그만 어느 레이디의 방이라도 침입한 무뢰배처럼 그만 뒤로 확 돌아버렸습니다.
한참 후에 그 녀석이 이제 다시 돌으셔도 된다고 하여 앞으로 돌아보았더니 플로리안은 그 커다란 초록 눈을 가늘게 뜨고 흘겨대며 절 예의도 뭣도 없는 놈팡이 취급을 하는 겁니다.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었다나요?
제가 얼른 아를리의 왕가가 머무는 방엔 원래 문이 달리지 않았다, 네 방이 임시거처라 문이 달려있는 것인데 내가 익숙치 않아 따로 인기척을 낼 생각은 못했다 말해봤자 소용이 없었어요.
“오, 오두막집에서는 그러란 법은 없었어요. 문은 가리라고 있는거죠! 닫힌 문은 두드려야하는거고요, 아치 앨버트 윌리엄 왕자님!”
“혹시 마른게 부끄러워서 그러십니까?”
“네?”
“난 그대 몸이 춤을 추기에 적합한 멋진 선을 가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래도 혹시 마르셔서 누구에게 맨몸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우시다면 가벼운 검술이라도 가르쳐드릴까요? 썩 볼만한 몸이 될 겁니다.”
그애는 제 말이 구미에 당기는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검술도 좋긴 한데, 그건 세실리아 공주님에게 배울게요.”
방까지 근처로 바꾸면서 친하게 지내더니, 세실이 얼마나 검을 잘 쓰는지까지 이미 알고 있더라고요. 뭐, 키나 덩치만 보아도 저보단 세실이 가르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저는 그러고마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솔직히요, 여기서는 저도 그 녀석이 제법 마음에 들더라고요. 요즘 윈저튼의 젊고 얼빠진 놈들은 주제도 모르고 세실이나 다른 여자 기사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여자의 명은 따를 수 없다는 둥, 여자 근위대장의 아래에는 있고 싶지 않다는 둥 하는 이야기를 하다 벌써 몇 명이 세실이나 다른 출중한 기사들의 칼에 갈려 꽁무니를 뺐지요. 세실은 저한테는 아주 냉정하지만 제 슬하의 여자들에게는 꿀처럼 달콤하게 구니까 말이지요.
어쨌든 그런 생각없이 허영만 많은 젊은이들이 많은 마당에 플로리안 이 녀석이 자청하여 세실에게 검을 배우겠다 하는 것이 저는 꽤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래서 괜히 한번 더 그애에게말을 붙여보았습니다.
“그래, 그럼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
“저를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셨으면서 이제 와서 뭘 물으세요.”
그애는 마른 몸에 어울리지 않는 토실토실한 볼을 복어처럼 부풀리면서 조막만한 입술을 쭉 빼서 뿔이 잔뜩 난 티를 내더라고요. 참 뒤끝 하나는 제대로 길지요.제가 치유술로 바로 고쳐준 것도 모르고 말예요.
그래봤자, 우리 어린 노엘 아가씨의 불호령에 면역에 생긴 저에게는 별로 무섭지도 않은 표정이었습니다. 전 그냥 웃으면서 답했어요.
“말은 바로 해야죠, 플로리안 엘핀델 공작. 내가 던진게 아니라 당신이 뛰어내렸잖아요.”
“그건, 그러니까, 왕자님이 저를 막.”
“제가 플로리안 공을... 막, 뭐요?”
그애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더니 몰라요, 하고 뒤를 돌더라고요. 정말 노엘도 이렇게 유치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전 아직 좀 미안한 마음이 있어 마지막으로 한번 더 묻긴 했습니다.
“검술이 됐다 하시면 춤이나 가르쳐드릴까요?”
“춤..이요?”
“네, 검술은 내 누이에게 배울 수 있지 모르나, 춤은 좀 힘들걸요. 여자 파트너가 필요하겠지만...”
그렇게 말하고 저는 그애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어요.
“왜, 왜요?”
“보아하니 제대로 된 스텝도 익혀본 적 없지요?”
“그게 잘못인가요?”
아무에게나 하악거리는 새끼고양이처럼 그 녀석이 또 도끼눈을 뜨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쳐다봤자 하나도 무섭지 않은 걸 모르는 채 말이죠.
“전혀요. 하지만 왕궁에서 지내면 싫더라도 한 두번은 무도회에 가게될 거고,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물어본 겁니다. 여자 선생을 파트너로 해서 배우는 게 낫겠지만, 스텝을 익히는게 우선이죠.”
“스텝이요? 저는 박치인데요?”
“괜찮아요. 스텝이 엉키면 풀면 되지요. 발만 내딛을 줄 알면 춤은 출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하니까 플로리안 그 놈은 또 그 초록눈을 반짝 거리며 ‘정말 멋진 말이에요!’ 하고 제 손을 붙잡아 오지 뭡니까? ‘춤, 그거 꼭 가르쳐주세요. 스텝이 엉키는 건 저도 자신있어요.’ 하고 하면서요.
정말 대책 없이 엉뚱한 녀석이에요. 솔직히 말하면 춤 이야기는 코델리아, 당신 말대로 플로리안과 이야기라도 더 나누어볼까 해서 꺼낸 말인데 그렇게나 좋아하니 저도 괜히 기분이 좋긴 하더군요.
코코, 당신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윈저튼의 궁정예법에 따르면서 그 아이를 관찰하려면 춤 만큼 좋은 것이 없거든요.
춤을 출 때만큼 상대와 몸을 가까이하고, 그 눈동자 속에 숨은 진심마저 낱낱이 응시해볼 수 있는 때는 흔치 않죠. 춤 외에 그럴 수 있는 때가 있다면 오직 검을 맞댈 때 뿐일거예요.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되어 전 내일부터 플로리안 엘핀델 공에게 춤을 가르칠 참입니다. 춤을 가르치며 나누는 은밀한 대화가 그애의 진실을 밝혀내는데 일조할 수 있겠지요?
-뱀처럼 꾀를 내려 노력 중인 당신의 아치.
추신: 그런데 리암을 만난 얘기는 더 해주지 않을 거예요? 혹시 그도 마크같은 머저립니까?
* * *
나의 순결한 뱀 아치,
당신은 뱀이어도 아주 순한 눈을 하고 있는 물지 않는 뱀일거예요.
‘플로리안 녀석’ 거리면서 마음에 안든다고 해놓고 정작 하는 일은 모두 다정하시기만 하잖아요?
아마 당신에겐 악의라는 것이 전혀 없나봐요.
솔직히 말하면 전 세실리아 공주님을 엄청나게 좋아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가진 이 순한 성정을 더욱 사랑합니다. 의심스럽고 밉살맞은 이에게도 결국엔 친절만 베푸시는 점이요.
하지만 셜록홈즈 같은 정없이 날카로운 탐정이 되시긴 조금 힘드실 것 같네요.
그래도 잘해봐요, 아치 앨버트. 내가 늘 당신을 응원할게요.
그런데요 아치 탐정님, 플로리안이 세실리아의 귓가에 대고 무슨 말을 했는진 안 물어본 거예요? 대체 어떤 감언이설을 속삭였길래 세실이 바로 플로리안을 끌어안고 간 걸까요? 분명 이야기 속 멋진 기사님처럼 공주님 안기를 했겠죠? 어쩜, 세실은 정말이지 멋지다니까요.
6.25.
-그래도 윈저튼 왕가의 모든 사람을 통틀어 당신이 제일 좋은 코델리아 올림.
추신: 우습지만요. 마크 이야기를 주절 주절 떠들고 좀 부끄러워졌거든요. 그래서 리암과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비밀로 할래요. 우리 엄마가 늘 하던 말씀이 있죠. 좋은 것은 비밀이라고요.
그래도 당신에겐 비밀이고 뭐고 다 말하고 싶은 심정을 담아 하나만 알려드리면, 내일 리암과 같이 스트랫포드에 가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연극 보기로 했어요. 당일치기 여행이지만 조금 늦을 수도 있으니 내일 밤, 제가 책상 앞에 없더라도 섭섭치 말아요, 나의 왕자님. 새벽녘까진 반드시 돌아올테니까 말예요.
〈햄릿〉은 끝없이 고뇌하는 왕자님이 나오는 이야기이니, 당신에게도 이 책을 빌려드릴게요. 나를 기다리다 적적해지면 읽어주세요.
========== 작품 후기 ==========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연참을 한 것은 투베 30위권 안이라도 어떻게 해보자는 음흉한 속셈이 있긴 했는데 8월 첫날의 메인 투베 10위안에 들어갈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재밌다고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ㅠㅠ 전 저만 재밌는 줄 알았는데..흑. 조용한 관종은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어요.
추신: 짧은 환호의 댓글, 저의 서툰 떡밥을 잡아드셔주시는 댓글들, 제게 말걸어주시는 댓글들, 서로의 댓글을 읽어주시는 댓글들, 선작과 추천, 오타와 오류 지적 모두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떡밥을 수거하는 그날까지, 자정마다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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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