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나의 소중한 벗 아치 바보 앨버트에게.
당신은 정말 바보예요, 불쌍한 나의 왕자님. 정말이지 당신께 모든 걸 알려드리고 싶지만 지금이 바로 ‘가슴이 미어터져도 하고 싶은 말을 참아야 할 ‘ 상황이란 생각이 점점 더 굳어지네요.
혹시 지금 너무하는 것 아니냐며 내 편지를 구기고 있는 건 아니죠?
여태까지는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 모두 알려주었으면서 이제 와서 왜 외면하냐고요?
그야 플로리안, 그 가여운 아이 때문이죠.
들어봐요, 아치.
그애는 분명 당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어요, 그렇죠?
하지만 당신도 느끼셨다시피 꽤 착한 아이같네요.
우리가 처음 추측했던 것처럼 흑마술 같은 것에 연루되어 있는 것 같지도 않고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이 아직도 모르고 있는 그애의 비밀, 세실은 벌써 한참 전에 들었잖아요?
그래도 세실은 그애를 의심하기는 커녕 더욱 믿고, 친절하게 보살펴줬죠.
세실이 바보도 아니고, 그애가 조금 귀엽게 생겼다고 바로 넘어가서 꿀처럼 굴 여자는 아니라는 걸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그럼 그애가 숨기는 건 대체 뭘까요?
잘 생각해보세요, 아치.
난 절대 당신에게 먼저 얘기해줄 수 없으니까요.
별 악의도 없는 아이가 무슨 사정인지 한 가지 비밀을 가지고 있는데, 전 그 사정까지는 도통 짐작할 수 없고, 단지 그 아이의 비밀이 뭔지만 대충 짐작하겠단 말이죠.
상황이 이런데 제가 왕자님께 쏙 비밀을 알려드리면 그아이는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아치 앨버트, 당신이 나의 소중한 벗이긴 하지만, 엄마 아빠가 모두 돌아가셔서 혼자 남은 채 몰래 비밀을 품고 끙끙 앓는 그 애 사정도 꽤 딱하다니까요.
당신은 모르시겠지만 우리 고아들은 이렇게 시공간을 초월한 연합을 구축하고 있답니다.(거짓말이에요. 그런 것은 없어요. 전 홀로 외로운 사람이니 늘 쓸쓸해지지 않도록 돌봐주세요.)
그래도 그깟 전우주적 고아연합보다는 우리의 은밀한 우정을 더욱 깊이 생각하는 난 이 편지 안에 힌트를 잔뜩 심어두었지요. 자, 내 편지를 다시 한번 처음부터 읽고 곰곰히 생각해보세요. 나의 셜록.
추신:
십이야를 다시 읽어보는 건 어때요? 재밌는 책이잖아요.
추신2:
감기에 좋은 약이라도 보내고 싶지만, 그걸 마법의 상자에 넣는 순간 감기약 위로 세월이 켜켜이 쌓일 테고 당신께 도착할 때쯤엔 누구도 먹을 수 없는 독이 될테죠? 그걸 먹였다간 플린의 상태는 더욱 심각해질지도 모르니 그냥 간단한 레시피를 알려줄게요.
버드나무 껍질 한줌과 시호뿌리를 가루낸 것을 뜨거운 물에 끓여 아침 저녁으로 먹으라 해봐요. 우리 엄마만의 비법인데, 전 이것만 마시면 오들오들 떨리던 몸도 안정되고 열도 쑥 떨어지더라고요. 여기선 꽤 구하기 힘든 재료라 이런 것들을 구하러 다니던 우리 엄마가 특이 취급을 당했지만 아를리 궁 처럼 너른 정원이 있는 곳에선 그저 밖에 나가 따오기만 하면 될 것 같네요! 차를 내리는 법은 신부수업도 받은 당신이니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7월이 초열달이란 것을 막 알아버린 첫 날,
-당신보다는 탐정 노릇에 소질이 있는 것 같은 코델리아.
* * *
야속한 나의 벗 코코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한 가지씩 있어요.
당신은 분명 좋은 소식부터 듣고 싶어할테니, 그것부터 먼저 말할게요.
플린의 열은 당신이 알려준 차를 만들어 먹이자 마자 바로 떨어졌어요.
나도 한 모금 마셔봤는데, 이걸 먹였다 죽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구역질 나는 맛이더군요. 그런데도 플린 그 녀석은 착하기도 하지, 눈물을 글썽이며 꿀꺽꿀꺽 싫은 기색도 없이 다 삼켜버렸어요.
“그게 맛있습니까?”
어이없어서 그렇게 물으니까 추억의 맛이라나 뭐라나요. 에드위나 공주님께서 이 애에게 어렸을 때 흙탕물이라도 먹였던 걸까요?
어쨌든 그걸 마시자마자 열이 쑥 내려 거의 난생 처음으로 세실에게 칭찬을 다 받았습니다. 뭐 정확히는 ‘너도 아주 쓸모없는 놈은 아니구나.’ 라는 소리였는데 세실의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대 칭찬이죠.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어요. 세실은 오늘 아침, 한번 더 날 제대로 칭찬해주었거든요. 그것은 플린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선왕 폐하와 어머님께서 한달음에 그애 방으로 달려오셨을 때였습니다.
선왕 폐하께서는 늘그막에 되찾은 손주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두려우셨던 모양이에요. 이제 다 나았다는 플린의 말에도 그러지말고 얼른 치유술사를 불러 큰 병이 아닌지 알아보자고 하셨죠.
그것도 괜찮은 것 같아 얼른 치유술사와 의사를 불러오려고 방을 나서는데 세실이 저를 만류하며 그러더라고요.
“괜찮습니다, 폐하. 아치가 만든 차 한잔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어요. 아치 녀석, 이래봬도 치유술을 제대로 배웠어요. 안심하셔도 됩니다. “
세실이 선왕폐하 앞에서 저를 추켜세운 일은 살면서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이었기에 방안엔 이상할 정도로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답니다.
그 묘한 분위기를 깨준 것은 플린이었어요. 그애는 생글생글 웃으며 모처럼 이렇게 모였는데 방안에만 있는 건 너무 속상한 일이라고 아를리의 후원을 다 함께 구경하고 싶다는 거예요. 그 동그란 눈동자를 빛내며 우릴 졸라대니 별 수가 있나요. 세실과 나, 어머님과 선왕 폐하, 그리고 플린, 우리 다섯 사람은 다 같이 후원으로 갔죠.
아를리의 후원이야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우리로서는 늘 보는 것 광경이라 그리 큰 감흥이 없었는데, 그 애는 끙끙 앓던 것이 언제냐는 듯 껑충 껑충 뛰어다니며 보이는 모든 것에 감탄을 했습니다.
하얀색 산사나무 꽃이 종종 피어있는 길을 걸으면서는 산사나무니 하는 것은 너무 재미없는 이름이라며 이곳을 ‘요정의 하얀 길’ 이라고 부르겠다고 하더라고요.
보송보송한 하늘색 부바르디아가 핀 길은 ‘연하늘 벨벳 숲’ 이라나요.
코델리아, 당신도 알다시피 난 조금만 진지한 일이 생기면 바로 외면하고 농담이나 던지는 한심한 놈이지 않습니까.
그 버릇은 사실 심각할 때 뿐만이 아니라 모든 감정 과잉의 순간에 나온단 말예요.
선왕폐하께서 딸을 잃은 슬픔을 말씀하실 때도 뭐라 위로할 지 몰라 말을 돌리기도 하고, 시종 에드문드가 시를 읊으며 눈물을 글썽이거나 하늘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아치 왕자님 하고 감격에 찬 얼굴로 저를 바라볼 때도 딴청을 부리며 모르는 척을 하지요.
난 정말 다른 사람들의 슬픔, 그리움, 행복, 감동을 앞에 두면 뒷걸음질 치고 싶어지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죠. 이번에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말을 돌리지도, 딴 델 쳐다보면서 괜한 소리를 지껄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꽃들 사이에 파묻혀 행복해 하는 플린의 그 표정이며 목소리는 너무 맑고 진지해서
그 애가 그렇게 말하니 ‘그래, 이 하얀 길로는 밤마다 요정이 다닐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웃으며 그냥 이렇게 말했어요.
"그래요. 하늘색 꽃잎들이 벨벳천으로 싸매어 놓은 드레스 단추 같아보이네요."
그 소리에 플린이 신나서 ‘그럼 왕자님이 지어주신 대로 연하늘 벨벳 단추’ 라고 부를래요 하고 웃을땐 저도 아,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긴 했지만요.
어려보이는 얼굴이긴 하지만 그래도 스물은 넘었다고 하는 놈이 이럴 때면 꼭 열두살 아이같다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해맑다가도 저를 보면서 새침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왕자님이 받아주시니까 이런 소리도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한텐 비밀이에요, 아치 왕자님. 제 친구들은 꽃길에다가 제가 이름을 지었다고 하면 와, 너 돌았구나 하고 놀려댈껄요.”
“그야... 그러겠지요.당연히.”
“하지만 왕자님은 안그러잖아요.”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는 세실은 약간 그애에게 ‘너 돌았구나’ 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왠일인지 꾹 참고 입을 다물고 있더군요.
세실과 꽃밭이라니, 애초에 좀 이상한 조합이지요. 내가 그림에 재주가 있다면 코코, 당신께 그려서 보여드리고 싶을 정도로 웃기는 조합이에요.
그런 세실이야 저리 제쳐두고, 나머지 우리 네 사람은 정말 즐거웠답니다.
선왕 폐하께서는 그런 엉뚱한 소리들과 함께 하는 오랜만의 후원 나들이를 무척 즐거워하셨고, 어머니 역시 자주도 웃으시더군요.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플린을 발견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당신 말대로 그 아이가 에드위나 공주의 자식인 것도 거의 분명해보이고, 무엇보다 그 아이가 오고 나서 아를리 궁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버렸거든요.
아들이 죽고 딸 하나마저 사라진 후 완전히 마음을 닫아버린 우리 선왕 폐하와,
괜한 죄책감에 선왕 폐하 앞에선 늘 안절부절 못하시는 양녀 우리 아델라이드 여왕 폐하,
그 밑의 무뚝뚝하기 그지 없는 내 누이 세실,
이 셋 사이에 흐르는 어색함을 농담으로나 메꿔보려다 말고 도망다니는 저,
우리 네 명만 있어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이상한 훈훈함이 아를리 궁에 감돌기 시작했으니까 말이죠.
이런 기쁜 날 대체 나쁜 소식이 어디 있냐고요?
뭐 뻔한 이야기죠. 당신이 준 레시피대로 차를 내리고 후원을 산책하느라 정신없는 통에 당신의 셜록은 아직도 수수께끼의 정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집필실에 돌아와 당신 편지를 장장 세 번이나 읽은 끝에 〈십이야〉 안에 무언가 힌트가 숨어있을 것이란 걸 깨닫긴 했지만 말입니다.
아니, 얼른 〈십이야〉를 다시 읽어보려 온종일 침실과 집필실을 모두 뒤져보았지만 다른 것은 다 제자리에 있는데 딱 그 책만이 없는 거예요. 레테 수도원에 있을 때 노엘이 내 짐 속에서 몰래 빼간 것이 틀림없어요. 노엘은 내 도둑질 동무거든요. 내가 서책보관함을 몰래 가져올때도 키득거리며 날 도왔죠. 이렇게 내가 키운 개가 나를 물어버리네요.
어쨌든 내일 아침엔 그 책을 찾으러 레테 수도원에 갈 참입니다. 그런데 성가신 녀석이 하나 따라 붙었네요. 네, 그 성가신 녀석의 정체는 물론 플린입니다. 그래서 이번엔 우리의 서책보관함을 그냥 아를리에 두고 가려해요.
그 녀석은 뭐가 그렇게 호기심이 많은지 호시탐탐 집필실에 들어와보려고 난리이고, 어쩌다 한번은 저 몰래 집필실에 들어가 우리만의 마법 상자를 만지려다 들킨 적도 있거든요.
착한 녀석이라는 당신의 말엔 동의하지만 그래도 이 세상엔 ‘혹시 모를 일’ 이라는 게 있잖아요. 난 우리의 마법 상자만큼은 무엇보다 소중히 하고 싶으니까요. 책을 잃어버린 주제에 이런 말을 하냐고 호통치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며칠 내가 소식이 없다해도 쓸쓸해하지 말아요, 나의 벗.
베데르를 만나면 에드위나 공주와 마법의 상자에 관한 이야기를 마저 해달라고도 졸라볼테니.
-초열달의 세 번째날 밤.
어리석은 당신의 벗, 아치.
추신: 내가 플린이라고 쓴 것을 꼬집으며 벌써 그렇게 친해진 것이냐고 비웃으려거든, 부디 그만둬요. 플로리안이란 이름은 너무 길고 발음하기 힘들잖아요.
그리고 뭐, 플린 그 녀석은 참 볼 수록 괜찮은 녀석이긴 해요. 차를 다 마시고 글썽이면서 저에게 고맙다고 하는 모습을 봤어야 한다니까요. 아기새처럼 귀여웠답니다.
* * *
나의 귀여운 왕자님께.
내일 수도원에 가신다고요? 그렇다면 아직 아를리궁이시겠죠?
아직 책상 앞에 앉아있다면 답장을 주세요.
당신께 드릴 작은 선물이 있답니다.
-당신의 편지를 읽고 오랜만에 웃고 있는 코코.
추신: 당신은 나의 진지한 감정은 한번도 외면한 적 없으시잖아요.
* * *
나의 코델리아.
네, 당신의 아치 지금 여기 있어요.
그런데 나의 코코, 왜 오랜만에 웃어요?
난 당신이 늘 웃었으면 싶은데.
아무래도 레테 수도원으로 서책 보관함을 들고 가야할까요?
나의 아름다운 미모로는 당신을 웃기기엔 역부족일테니(눈이 멀지 않으려면 얼굴을 찌뿌려야 할거예요) 베데르로 웃겨보겠습니다.
덩치가 크긴 하지만 상자 안에 잘 욱여넣어보죠. 좀 늙어서 가긴 하겠지만 어차피 늙은 양반이니 큰 차이는 없을 겁니다.
-당신의 벗, 아치.
당신의 추신에 대한 답: 그래요. 자주 쓸쓸해하는 나의 벗과의 편지가 나를 완전히 바꿔버렸나봐요.
농담따먹기나 하기엔 이제 너무 진지한 아치 앨버트가 되었습니다.
* * *
늘 단정하던 글씨의 왕자님께.
내가 급히 부를 때면 빨리 대답하려고 엉망이 되는 당신 글씨가 좋아요.
물론 엉망이 되어봤자 내 글씨보단 낫지만 말예요.
추신: 당신 편지만 있으면 난 언제든 웃을 수 있으니 서책 보관함은 얌전히 내려놓고 다녀와요. 떨어뜨려 부서지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나의 추신에 대한 답에 대한 답: 농담이나 하시면서 농담따먹기 하기엔 글러먹었다고 말하는 당신이 좋아요, 아치.
* * *
영특한 나의 코코,
맞아요, 늘 당신 글씨보단 내 글씨가 낫죠.
그나저나 이야기해봐요.
무슨 선물인데요?
선물이 탐이 나서가 아니라 당신이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이 좋아서 그래요.
매일 같이 리암과 놀러다니느라 바쁠 줄 알았거든요.(맞아요. 저는 지금 질투 중입니다.)
-질투를 잘 숨기고 있던 당신의 아치.
* * *
집착과 질투의 대가 아치 앨버트 왕자님께.
당신이 질투하는 모습을 볼 줄야.
장난이란 걸 알지만 괜히 마음이 좋네요.
나의 왕자님, 당신의 질투는 나의 힘이니 오랜만에 편지를 좀 길게 써보겠어요.
사실 오늘 내가 주려는 선물은 당신이 아니라 노엘을 위해 준비한거예요.
노엘이 아직 글을 모른다기에 그림책을 선물하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처음에 골라둔 건 우리 출판사에서 만든 글 하나 없이 그림만 있는 책이었는데, 오늘 당신 편지를 읽고나니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얼른 책장을 뒤져 찾아왔어요. 글도 있는 쪽이 당신에게도 얼마간의 기쁨을 드릴 수 있을테니 말예요.
이 책 제목은 〈리디아의 정원〉이고 가난한 집의 리디아라는 꼬마 아이가 주인공이죠.
궁핍한 사정 때문에 무뚝뚝한 삼촌네 집에 맡겨져 기차를 타고 아주 먼 곳으로 가면서도 리디아란 아이는 아주 씩씩해요. 가족들을 두고 먼 길을 떠나가면서도 울지도 않으며 좋아하는 꽃씨를 챙기고 삼촌 집에서 빵 만드는 걸 배울 의욕도 불태우는 긍정적인 아이지요.
리디아를 맡아주시는 삼촌은 절대로 웃는 법이 없는 무표정한 양반이지만 다행히 마음은 꽤 따뜻한 분으로 보이고요.
리디아는 밝은 아이답게 새로운 환경에서도 금방 적응을 합니다. 삼촌네 빵집에서 빵만드는 것을 배우며, 찌그러진 케이크팬이자 깨진 컵에다 집에서 가져온 꽃씨를 심죠.
그러다, 어느날 아무도 올라가지 않는 빵집 위의 잿빛 옥상을 발견하고, 그곳에 비밀의 화원을 만들 결심을 해요.
빵집 사람들은 처음엔 꽃씨 정도 심어 별 일이 생기겠어 하고 생각하지만 일년이 지나자 사방에서 꽃이 피어나고, 이제 리디아는 '원예가 아가씨' 라고 불리우게 되지요. 리디아의 삼촌 역시 눈이 있으니 주변의 꽃을 보겠지만, 아직 옥상의 화원에 대해서는 모르고 계시고요.
리디아는 결전의 그 날이 와서야 삼촌을 졸라 빵집 문을 닫고 옥상으로 올라가 잿빛 공간에 흐드러지게 핀 색색의 꽃들을 보여드려요. 삼촌은 여전히 웃지는 않지만 약간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서있고요. 그래, 꼭 꽃밭에 서 있는 세실처럼 말예요.
옥상 전체에 피어있는 꽃 그림은 제법 감동적이지만, 그래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한장 더 넘기면 나오는 마지막 페이지예요. 아빠가 일자리를 구해 가정 형편이 나아졌단 소식을 듣고 드디어 리디아가 집에 돌아가게 되는 장면이지요.
이 장에는 글이 한 줄도 없어요. 두 장에 걸쳐 아주 커다란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을 뿐이죠.
처음 도착했던 그 회색빛 기차역이 두 페이지에 걸쳐 커다랗게 보이고,
저쪽 한 구석에 리디아를 바래다 주러 나온 삼촌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1년이 지나도 여전히 자그마한 리디아를 꽉 끌어안아줍니다.
할 말을 참 듯 입술을 꾹 깨물고,
눈물을 삼키듯 눈을 꽉 감고요.
리디아를 떠나보내기 아쉬운 삼촌의 마음은 웃음 하나, 눈물 하나, 대사 하나 없이도 모두 전해진답니다.
그림만으로도 사람 마음이 이렇게나 찡해질 수 있는 걸 보면 어쩌면 노엘도 조금 천천히 글을 배워도 될 것 같지 않나요?
전 오늘 당신이 해 준 플린 이야기를 듣고 괜히 다시 이 그림책을 펼쳐보았다가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답니다.
리디아 같은 사람들을 보면 세상이 잿빛이라고 기죽을 필요는 하나도 없어보여요.
세상 어디에든 몰래 꽃씨를 심을 장소는 있으니 말예요.
내 생각엔 플린도 그런 사람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아치. 난 당신도 그런 부류라고 믿는답니다.
책이 너무 커다래서 장 마다 찢어서 보관함에 넣을테니, 잘 붙여서 노엘에게 가져다주세요.
아마 베데르라면 찢어진 페이지를 모아 더 아름다운 책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추신: 조금 질투나긴 하지만, 방해하지 않을테니 플린과 잘 놀다와요.
7.3.
-다음 편지까진 정답을 찾길 바라며, 코델리아.
* * *
사랑스러운 나의 코코
첫째, 난 언제나 당신 것이니 질투하지 말 것.
둘째, 책을 보다 우는 것을 제외하고는 울지 말 것. 특별히 슬픈 일이 있으면 내게 말해요.
셋째, 책이 커다랗다고 장 마다 찢어서 넣어줄 야만적인 생각을 하다니, 몹시 인상적이군요.
넷째, 당신도 그런 사람이에요. 코델리아. 당신이야 말로 내가 아는 사람 중 제일 리디아 같은 사람이죠.
초열달의 네번째 날 아침, 아를리를 잠시 떠나며, 당신의 아치.
========== 작품 후기 ==========
아치와 달리 영민하셔서 이미 다 알고계실 독자님들께 올리는 글.
첫째, 십이야는 남장여자가 나오는 책이에요.
둘째, 리디아의 정원은 “서간체” 그림책입니다. 위에 나온 모든 줄거리가 편지로 전달되지요.
셋째, 독자님들의 선작과 추천, 너무도 사랑스러운 댓글ㅠㅠ들에 누가 힘을 얻을까요!(정답: 저요..저..!이번편도 부디 재밌으셨길 바라며 울고있는 저..)
이상 조용한 관종의 작은 주접이었습니다.
댓글과 추천, 선작 모두 감사해요. 내일 자정에 베데르의 편지를 들고 돌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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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득이한 연참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