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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을 주세요,왕자님-24화 (24/56)

#24

시도 때도 없이 끼를 부리는 나의 왕자님께.

아무데서나 ‘나는 언제나 당신의 것’ 이란 말을 쓰면 안된다는 건 궁중예절에 들어가 있지 않나요? 여자에게 그런 소리를 함부로 했다간 큰일나요, 아치 앨버트.

어쨌든 그 말로 당신은 내 일주일치 기분을 샀어요. 당신이 아를리로 돌아오는 날까지 조용히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초열달의 시작 쯔음에.

-반쯤은 당신의 것인, 코델리아가.

* * *

지금쯤 이 큰 오빠가 돌아오지 않을 것에 쓸쓸해하며 울고 있을 코델리아에게.

놀랐어요? 생각보다 일찍 돌아와서요?

플린을 잠깐 수도원에 두고 나 혼자 아를리로 돌아온 참이에요.

지금은 당신은 또 녹색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가엾은 아이를 두고 도망온거냐고 하고 계시겠지만, 그런 것은 절대 아니랍니다. 아무래도 레테 수도원에서의 체류가 꽤 오랜기간이 될 것 같았거든요.

우리가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꼭 미행이라도 한 것처럼 바로 세실이 수도원에 도착했어요.

알고보니 베데르가 나도 모르는 새에 왕궁에 도움을 요청한 모양이더라고요. 이제 플린의 영지이기도 한 수도원 근처 숲에서 나오는 마물 수가 요즘들어 수도사들의 힘으로 처리하기엔 역부족일 정도로 늘어난 모양이로더군요.

에드위나 공주님이 사시던 오두막 근처의 결계가 풀리며 이 주변의 모든 것이 엉망이 된 듯 하더라고요. 세실이 부서진 결계를 복구하고 눈에 보이는 마물은 다 처리하고 간 참이지만 일은 이렇게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로이틀링엔 쪽에 도움을 청해야할 것 같아요. 이렇게 결계가 무너진 건 생각보다 처리하기 까다로워 마탑의 마법사나 해결할 수 있을 일이거든요.

길면 일주일, 짧으면 3,4일 안에 갈 거리니 그 사이에 별 일이야 일어나겠냐만 수도원 사람들이 어찌나 무서워하던지 결국 내가 모든 일을 미루고 수도원에 머물러주기로 했어요. 레테 수도원으로서는 아주 축복된 일이고, 아를리 궁 사람들로서는 안타까운 일일겁니다. 내 아름다움이 일주일 넘게 사라지는 것은 궁 안의 사람들로서는 굉장한 손실일테니까요.

그런데요, 코델리아.

그렇게 오래 수도원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한 생각은 내 시종장 에드문드나 우리 여왕폐하, 그리고 내 얼굴을 매일 보고싶어 죽으려 하는 시녀들의 안위가 아니었어요.

난 오로지, 나의 벗 코코, 당신만을 생각했습니다.

일주일이 넘게 당신과 편지를 나누지 못한다니, 그건 마물이 베데르를 먹어버리는 것보다 더 큰 비극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게다가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일주일이나 편지를 쓰지 못하면 코델리아가 날 걱정하진 않을까?

지금쯤 당신은 내 높은 자의식을 비웃고 계시겠죠? 하지만 정말로 내 머릿속엔 그 두 생각이 떠올랐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해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아무 생각없이 당신 편지를 집어던지고 수도원으로 내빼던 나인데 말이죠. 이제는 당신과의 편지가 하루만 늦어져도 바로 마음이 휑해져오거든요.

그러니 안심해요, 나의 벗. 이렇게나 소중한 우리의 마법상자를 땅에 떨어뜨려 부술 일은 없을 겁니다. 불면 날아갈 안개꽃처럼 조심스레 안고 갈게요.

그리고 플린을 혼자 두고 온 것에 대해서도 너무 걱정은 마세요. 그애는 그림책 속 리디아처럼 적응력이 좋네요.

레테 수도원이 자기가 살던 숲 근처라 그런걸까요? 수도원에 가서 필경사들이며 노엘을 만나고서는 가뜩이나 반짝 거리는 그 초록눈에 더 큰 생동감이 어렸어요.

나의 벗, 당신이 좋아할 만한 얘기를 하나 해줄까요? 내 마차를 알아보고는 신발을 제대로 신을 새도 없이 달려나온 우리 노엘 아가씨께서는 플린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답니다.

“코델리아?”

그러고보니 플린 그 녀석도 붉은색 머리카락에 초록 눈을 하고 있지 않겠어요?

게다가 그 동그란 얼굴은 앳되고 아름다우니, 잠깐 그렇게 착각하는 것도 당연한 것 같습니다.

노엘은 평생 수도사들에게만 둘러싸여 살며 여자라고는 거의 구경해보지 못했거든요.

내가 플린은 코델리아가 아니고, 에드위나 공주의 아드님이라고 말해도 노엘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 코델리아가 맞다고 우겨대더군요.

플린 그 녀석은 여자로 오해 받은 걸로 기분 나빠하기엔 너무 순수한 녀석이라 ‘그래, 노엘.그냥 코델리아라고 불러도 좋아.’ 라고 맞장구를 쳐주고요. 상황이 이러하니 노엘은 나보다는 플린을 더 따르고 있네요. 당신이 가져간 그 그림책도 결국 내가 아니라 플린 녀석이 읽어주었답니다.그 녀석 이제보니 아이 보기 도사더군요.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여기봐라, 이 그림이 뭐지? 여기 리디아 삼촌 표정이 어때? 웃고 있어?’ 하고 잘도 읽어주는데 그저 노엘을 앞에 두고 낭송만 할 계획이었던 내가 조금 부끄러워졌습니다.

사실, 타고난 이야기꾼도 아닌 이상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준다는 것은 참 어색한 일이지 않나요? 그런데 플린 그 놈은 대체 그걸 어쩜 그렇게 잘하는 것일까요?

그런 것이 궁금해진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그애는 내 속마음이라도 알았는지 웃으면서 다가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어렸을 때 엄마가 이렇게 책을 읽어주셨거든요.”

베데르는 또 그 소리를 듣고 에드위나 공주님이 철이 들어서 아이한테 책까지 읽어주는 다정한 엄마가 되었냐고 난리입니다.

아, 물론 베데르에게는 당신에게 줄 서신을 쓰라 일러두었어요. 그 양반, 쓰긴 쓸테지만 이번에는 절대로 훔쳐보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더군요. 당신의 첫 필담 친구의 자격으로 먼저 검열해보려했으나, 이렇게 독점욕을 부리다가 반쯤만 소유한 당신의 마음마저 잃어버리면 내 마음은 분명 무너져버릴테니 이번에는 손도 대지 않고 고이 보내드릴게요.

대신 늙은 영감이 당신에게 실례되는 소리를 하면 꼭 내게 일러바쳐요!

-아를리 궁에 오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집필실에 앉은 당신의 충실한 벗, 아치.

추신:

베데르의 편지보다 당신이 더 즐거워할 것이 있어요. 네, 노엘이 쓴 편지에요. 이번에도 편지라기보다 그림이네요. 빨간머리 여자는 당신인 것 같고, 그 옆에 손을 잡은 갈색 머리 애가 노엘입니다. 자기 이름 정도만 쓸 줄 알았던 수준에서 글이 더 늘었는지 이번엔 짧은 글까지 썼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코델리아.’

그래요. 사실 이건 노엘이 플린 녀석에게 준 거예요. 오늘 아를리로 출발하려고 말을 타는데 그 녀석이 뛰어나와서 이걸 내게 주더라고요. 진짜 코델리아에게 전해달라나요. 참 속도 깊고 눈치도 있는 녀석 아닙니까?

* * *

나의 사랑스러운 벗, 아치.

난 비웃고 있지 않아요, 왕자님.

일주일 넘게 당신 편지가 오지 않았더라면 당신의 서책 보관함은 아마 내 독촉 편지로 가득찼을 걸요. 아시잖아요, 아치. 내가 기다리는 것을 얼마나 못하는지를요.

그나저나 노엘의 그림은 점점 늘고있군요. 언젠가는 나도 노엘과 직접 만나 풀밭을 뛰노는 날이 올까요? 갑자기 플린이 너무 부러워집니다. 그애는 당신과 풀밭을 거닐고 차를 마시더니 이제는 노엘에게 그림책까지 읽어주고 있네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모두 다 하고 있는 그 가엾고도 고약한 아이에 대한 부러움을 잘 움켜쥔채 잠자코 앉아 베데르의 편지 기다릴게요.

자, 우리의 마법 상자를 안고 떠나세요, 나의 왕자님.

추신: 당신이 내 미움을 살 일은 영원히 없을 거예요.

7.4. 밤. 당신의 때이른 편지를 받고 기쁜 코델리아가.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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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득이한 연참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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